어쩜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면서도 또한 뛰어난 적응력을 갖춘 동물이기에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는지 모르겠다. 아니, 그렇기에 나름 만물의 영장이네 뭐네 하며 거들먹거리며 잰 체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망각과 뛰어난 적응력이 때로는 얼마나 큰 재앙을 불러오는가.

어디? 어디? 하며 멀리 둘러 볼 필요조차 없다. 그냥 거울을 보면 된다. 주위를 둘러보면 된다. 광복 70주년이라는 ‘역사적’인 올 해 대한민국의 슬프고도 어처구니없는 지금의 모습을 보면 된다.

광복 70주년은 곧 분단 70년이다. 차마 할 말이 없어야 마땅하다. 심히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다. 어느 분의 말씀처럼 동서독의 ‘통일둥이’는 25세 청년이 되었는데, 한반도의 해방둥이는 칠십 노인이 된 상황. 그것이 그렇게 자랑스러운가, 그리도 잘나서, 그처럼 성대하게 축하하고 싶은가.

짧은 생을 돌아보면 나의 은사 중에서는 유독 국어, 역사를 가르치셨던 분들이 많았다. 담임선생님 중 대부분은 국어 아니면 역사 선생님이셨고, 졸업 후 지금까지 가끔씩이나마 소식을 전해 듣는, 인사를 드리는 분들 역시 국어, 역사 선생님들이다.

그 중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두 분이 계시다. 모두 중학교 때 담임 선생님이셨다. 한 분은 1학년 때 담임이셨던 역사 선생님, 또 한 분은 2학년 담임이셨던 국어 선생님이시다. 어쩜 어리바리한 어린 녀석의 삶의 방향을 급선회하게 만들었던 분들이라고, 지금 와서야 느끼곤 한다.

역사 선생님은 왼손의 약지와 새끼손가락이 한 마디씩 절단된 분이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왼손이었다. 그 배경엔 역사가 담겨 있었다. 4·19혁명이었다. 당시 서울대학교 사학과 청년이었던 선생님은 벗들과 함께 경무대 앞으로 달려 나가, 이승만 부패정권의 퇴진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손가락이 잘려나가는 부상을 입게 되셨다. 선생님이 경무대 앞 바리게이트를 넘어서는 모습은 <TIME>지 기자의 카메라에 담겼고, 한국의 민주주의를 소개하는 글이 담긴 타임지의 표지 사진이 되었다.

선생님은 완고한 분이셨다. 잘못을 저지른 아이들에게 가차 없이 회초리를 드셨다. 어린 기억으로는 공부를 잘 하지 못했던 아이들에게도 크게 꾸짖곤 하셨던 것 같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개인적인 감정으로 매를 드신 적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분명 ‘맞는’ 이유가 존재했다. 난 그 명쾌함이 어린 나이에도 맘에 들었다. 비록 많이 맞았어도….

역사 선생님은 후에 정년퇴임을 하신 뒤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진보적 성향의 온라인 매체에 기고를 하시고, 크고 작은 집회나 행사도 참여 하신다. 페이스북을 통해 잘못된 한국 근현대사의 어두운 민낯을 알리기도 하셨다. 부끄럽고 어처구니없는 역사라도 남의 것이 아닌 ‘우리의 역사’이기에.

2학년 담임이셨던 국어 선생님은 이른 바 빨간 물(!)이 들었다는 ‘전교조’ 선생님이었다. 물론 어린 내가 전교조에 대해 알고 있을 리 없었다. 주위에서 소곤거리는 ‘잡스런 소음’으로 선생님에 대한 전설(!)이 퍼졌다.

총각이셨던 선생님은 평소 오지랖 넓기로 자타가 공인하는 어머니의 중매에 의해 같은 학교 음악 선생님과 결혼에 골인했다. 뭐 그것 때문에 어머니가 중신에 대한 대가성(!) 금품을 수수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암튼 두 분은 참 잘 어울려 보였다.

국어 담임선생님과는 참 즐거운 한 해를 보냈다. 북한산 자락으로 아이들 몇 놈들과 등산을 갔다 길을 잃어 해매다, 냇가를 발견하고는 “여기서 우리 홀딱 벗고 미역 감을까?” 하시던 호연지기! 그때 나타난 군인들에게(도대체 북한산 자락의 군인들은 어디에 숨어있다 나타난 것일까!) “여기는 들어오면 안 되는 구역입니다!”라는 경고성 멘트를 듣고도, 순전히 몰랐다는 이유로, 고의성이 다분히 없었다는 이유로 끝까지 미역을 감고 철수한 또 다른 호연지기! 선생님은 작은 체구에서도 수많은 에너지가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준 분이었다.

선생님과 관련된 에피소드는 참 많다. 하나 같이 이제는 소중한 기억이자, 추억이다. 그런데 그 중 가장 아프고도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시간이 있었다. 국어 수업 시간, 선생님은 카세트 플레이어를 들고 오셨다. 영어 시간도 아닌데, 어인 플레이어? 국악이라도 들려주시려나? 아이들은 이 분이 또 어떤 음모(!)를 꾸미려고 하는지 의혹의 눈초리로 쳐다봤다.

“오늘은 진도를 나가는 대신에 너희들에게 노래 한 곡을 들려주고 싶다. 정태춘·박은옥이라는 분들의 노래야. 제목은 <우리들의 죽음>이다. 너희들과 다르지 않은 아이들의 죽음에 대한 노래란다. 가사를 잘 들어보고, 왜 이 아이들이 죽어야 했는지, 잠깐이라도 생각해보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해도 좋다. 그냥 노래를 들어보기만 하자.”

그리고 선생님은 노래를 들려주셨다. 가난한 맞벌이 노동자 부부. 그들에겐 예쁜 딸과 아들이 있었다. 아이들은 부모님이 일하러 나간 사이, 달리 갈 곳이 없었다. 부모들은 행여나 아이들이 밖에 나가 그 어떤 사고라도 당할까봐, 좁디좁은 방 안에 아이들이 먹을 점심 밥상과 요강을 두고 밖에서 문을 잠그고 일터로 나가야만 했다.

남겨진 아이들은 심심했다. 밖의 세상이 궁금했지만, 나갈 수 없었다. 낮에는 텔레비전도 나오지 않았다. 밤에 나오는 텔레비전에도 엄마와 아빠는 나오지 않았다. 우리 동네, 우리 집도 나오지 않았다. 온통 남의 나라 이야기였다. 아이들은 좁은 방안을 떠돌다 성냥을 발견했고, 호기심에 불을 당겼다. 그리곤 다시는 엄마와 아빠를 볼 수 없는, 먼 길로 떠나고 말았다. 혜영이는 다섯 살이었고, 영철이는 세 살이었다.

중학교 2학년 까까머리 녀석들에게 그 노래는 의문의 연속이었다. 왜 문을 담그고 나가신 거지? 왜 아이들은 불장난을 한 거지? 왜 남매에겐 친구들이 없었지? 그리고 왜 이 아이들은 그렇게 죽어야 했던 것인지….

선생님은 노래가 끝난 뒤에도 우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감상문 따위를 쓰라는 말씀도 없었다. 그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계셨다. 솔직히 당시 그 노래가 강렬한 충격으로 내게 다가온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유 없이 비릿한 슬픔과 의문이 날아들었다. 그리고 난생 처음 그 어떤 ‘아픔’을 느낀 것 같았다. 그저 아팠다.

그 이후에 세상은 참 많이 달라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때론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소름이 끼치곤 한다. 지금도 가난에 의해 살해당하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그리고 다른 한 편에선 돈으로 사람을 죽이는 살인자들이 득시글거린다. 정의와 평등, 상식의 가치는 여전히 저 멀리에 있다.

이 자식이, 왜 또 뜬금없이 백 교수님의 책을 소개하면서, 딴 얘기를 늘어놓고 있나 하실 분들 많으시겠다. 이제 그 이유를 말하겠다. 중·고등학교를 지나는 동안에도 여전히 나의 머릿속은 ‘無’였다. 생각 없이 한심하게 살았다. 그러다 음악에 빠져 공연한답시고, 돌아다니며 만만치 않은 양의 소음을 살포하기도 했다.

그러다 대학을 준비하며, 과연 내가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살짝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내 점수로 그리 많은 선택지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다행스럽게도 부모님 역시 학과 선택에 대한 모든 권한을 나에게 위임해주셨기에, 온전한 나의 선택만으로 학과를 정해야 했다. 그런데, 무얼 배우지?

훌륭하신 담임선생님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던 덕분에, 나에게 생긴 단 하나의 좋은 습관이 있다면 그것은 독서였다. 특히 선생님들은 역사에 대한 개인 공부를 강조하셨다. 무려 공교육의 최 일선에 계신 분들이 역사는 교과서보다는 따로 공부하라는(!) 불순한 말씀을 하셨다. 때문에 다른 것은 몰라도 역사 공부는 나름대로 혼자 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국가가. 그동안 난 단 한 번도 온전한 우리의 역사를 배우지 못한 것이 아닌가. 북쪽의 역사를 빼고, 어떻게 역사를 제대로 공부했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거기에 의문을 품은 사람들은 많지 않아 보였다. 다른 선생님들도 마찬가지였다.

또 하나의 이유, 해방 후 지금까지 남쪽의 역사가 파란만장하게 걸어온 이유, 때론 뒤틀리고 왜곡되고, 정의가 땅바닥에 떨어지게 된 근본 이유는 결국 분단이라는 족쇄 때문이라는 나름의 결론을 얻었다. 분단이 가져온 온갖 기형적인 것들이 이 땅을 살아가는 모두를 구속하고 있음을 느꼈다. 진정한 민주주의도, 평화도, 결국은 분단극복이 이뤄져야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결국 막연히 꿈꾸던 국어선생님이라는 꿈을 버리고(우리 교육계를 위해 정말 잘 한 선택이라고 지금도 믿는다), 신생 학과였던 북한학과에 지원했다. 도대체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북쪽을 배우고 싶었다. 그리고 통일이라는 민족의 숙원을 위해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막연히 품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왔다. 대학 입학 후 부터 따져보니 거의 20년이 되어간다. 그동안 조금씩의 차이는 있었지만, 결국 난 북쪽이라는 화두, 통일이라는 화두를 붙잡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재능과 근면함이 없기에 내공 따위는 쌓을 수 없었지만 말이다.

아주 당연하게도, 그리고 어쩜 다행스럽게도, 돈 따위는 모을 재간이 없었다. 명예나 권력과도 거리가 멀었다. 지금도 빚이나 다 갚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 끈질기게 살아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후회는 없다.

그 이야기를 2학년 담임선생님께 말씀드린 적 있다. 한창 기자로 살아갈 때였다. 선생님은 오랜만에 연락한 녀석의 해괴한 논리의 글을 읽으시고는, 한 마디 하셨다. “당장 뭐 먹고 살까를 궁리하며 학과 선택을 하고 배움의 길을 가는 세상에서 네가 그런 선택을 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대견하다.”

어쩜 그 말씀으로 지금까지 버티고 살아왔는지 모르겠다.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아도, 그 어떤 명예나 권력 따위가 없어도, 나름 자부심과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올 수 있었던 것, 그것은 선생님과 같은 분들의 따뜻한 격려와 위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물론 모른 척(!) 내 길을 응원해주는 가족들의 존재도 크디크다.

여전히 나의 생각은 변함없다. 과거 참여정부 시절, 노무현 대통령이 죽기보다 싫었던 사람들은 “모든 건 노무현 때문이다!”라고 외쳤고, 이명박 시대엔 “모든 건 MB때문”이라고 소리 질렀다. 그리고 지금은? 답하기 싫다.

그런데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오직 분단 때문이다. 때문에 지금의 상황이 지극히 비정상적이라는 자각에서부터 해결의 출발점을 찾아야 한다. 분단을 모른 척하고, 북쪽을 외면하고, 우리가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전무하다. 진리이자 상식이다.

▲ 백낙청 외, 백낙청이 대전환의 길을 묻다, 창비, 2015.5. [자료사진 - 통일뉴스]
백 교수님이 정치, 경제, 여성, 교육, 노동, 환경, 남북관계 등 우리 사회의 주요 분야 전문가들과 만나 나눈 이야기들은, 하나 같이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보다 더 사람답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모든 것들을 관통하는 키워드를 역시나 ‘분단체제’ 극복으로 해석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비정상화의 극대화가 이뤄지고 있는 현 시기에, 무정부 시대라는 슬픈 이야기들이 나오는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결국 상식과 정의에 기반 한 온전한 평화다. 너와 내가 안심하고, 보다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시대, 그런 꿈을 현실로 하나하나 만들어갈 수 있는 노력, 그런 적공이 필요하다.

평화체제를 이야기하고, 평화협정을 말하면, 그것이 마치 북의 주장에 동조하는 것으로 비쳐질까, 두려워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어느 순간부터 평화체제, 평화협정을 이야기는 이들이 보이지 않는 이유이다. 하지만 과연 이러한 논의조차 이뤄지지 않는 상황에서 도대체 광복 70주년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백 교수와 대화를 나눈 전문가들은 모두 나름의 적잖은 내공을 지닌 분들이다.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다가오는 총선과 대선을 포함해, 어떠한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한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박노자 교수는 우리 사회 지식인들의 두뇌 속에 각인된 사대주의를 비판하며, ‘내지’ ‘내지어’란 단어를 사용한 바 있다. 미국과 영어를 의미한다. 이것이 과연 과도한 표현인지, 우리 사회의 지식인을 자처하는 이들의 두뇌 속에 과연 내지와 내지어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바로 이런 뼛속까지 박혀있는 사대주의의 극복이 결국 분단극복의 출발이자, 광복 70주년이 주는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싶다.

그동안, 어쩔 수 없는 나의 무력함으로, 좌절하며 드러눕고만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다시 일어서야 할 것이다. 강렬한 저항과 자각의 과정에서 느끼는 무력감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황에서 느끼는 무력감을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앞으로 매서운 눈초리와 근면함으로 좋은 책 알리기에 부지런해질 것을 말씀드린다. 그동안의 나태함을 용서해주시기 바란다!

“나는 ‘세상’이 얼마나 바뀌었나, 바뀔 수 있나를 묻기 전에 나 스스로 얼마나 바뀌었고 바뀔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이 순서라는 생각이다. 다음으로 주위에 바뀐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는지 찬찬히 살필 일이다. 그리고 두 질문에 모두 ‘아무것도 안 바뀌었다’는 답이 나온 게 아니라면, ‘그런데도 세상 전체는 왜 이다지도 안 바뀌나’를 묻고 끈질기게 파고들어야 할 것이다.”(349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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