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립

“미국은 이제 늙은 경찰이기 때문에 데리고 다닐 경찰견이 필요하다. 거기에 아베가 놀아나고 있다.” 작년 7월 해석개헌 직후 야마자키 다쿠 전 자민당 부총재가 아베를 겨눈 말이다. ‘집단적 자위권’을 먹고 짜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절규이겠으나 듣는 사람 중에는 늙은 경찰에 경찰견 추가 수준이면 뭐 별일 있겠는가 싶은 위안을 제공하는 비유다.

그러나 지난달 아베의 방미는 그 작은 위로를 박살냈다. 4월 27일 양국은 미일 안보가이드라인 개정을 통해 “세계 어디서든 미국과 더불어 전쟁을 할 수 있는 일본”을 선언했다. 공간적으로는 “열도의 주변”에 갇히고 기능적으로는 “미군의 후방지원”에 머물러야하는 전범국가의 족쇄를 합의 해체한 것이다. 이어 두 나라는 28일의 정상회담에서 공동의 적으로 사실상 중국을 공식 지목하는 결연한 동맹의 예식을 치른다.

그리고 마침내 29일 아베 일본 총리는 미국 상하양원합동회의장에 입장했다. 1945년 무조건 항복한 이후 단 한 번도 일본 총리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그곳에서 그는 45분 동안 45번의 박수를 받으며 연설을 했다. 일제의 침략과 착취로 희생당한 수백, 수천만 아시아인을 철저히 외면했음에도 그 연설에는 1분에 한 번씩 박수가 쏟아졌고, 그 소리는 세차장의 고압 물줄기처럼 아베 총리의 이마에 작렬, 전범국가 일본의 낙인을 지웠다. 그렇게 일본은 아베가 부르짖던 보통국가로 다시 태어났다.

“2020년이 되면 중국의 경제력이 미국을 추월한다”는 이구동성에 미국이 “2020년 안에 군사력의 60%를 아시아에 배치한다”는 아시아회귀 전략을 공식발표한 게 2012년이다. 군사력으로 중국을 압박, 경제의 발목을 잡고 기회가 오면 뚫고 들어가야만 미국은 G1을 유지할 수 있다.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나 돈이 없다. 유럽에서는 러시아와 싸우고 중동에서는 IS와 붙었으니 빼올 전력도 없다. 경찰견이 아니라 신규 경찰이 필요한 미국과 핏빛 인간으로 부활하고픈 아베는 그래서 만난 거다.

그리하여 미국은 아시아에 전개한 미군 전력과 맞먹는 일본군대를 획득했다. 미국이 ‘1+1’이 되자 중국은 졸지에 ‘2:1’의 1로 찌그러졌다. 중국의 부상과 미국의 쇠퇴가 조성한 아시아의 세력균형은 이제 무너졌다.

“미국의 목표가 인공 섬 건설을 저지하는 것이라면 남중국해에서 중국과 미국의 전쟁은 피할 수 없다.” 지난 5월 27일 중국 관영 환추시보 영문판 기사다. 미군 해상초계기가 난사군도 중국 주장 영공에 진입, 무려 8차례의 경고를 받은 후에야 돌아간 것에 대한 반응이다. 미일 안보가이드라인개정 한 달 만에 1+1의 자신감과 2:1의 불안감이 정면충돌, 벌써 뜨거운 불꽃을 튀고 있는 것이다.

불꽃은 머나먼 남중국해가 아니라 우리 코앞에서도 튀고 있다. 지난 18일 케리 미 국무장관이 주한미군 기지를 택해 “북의 위협 때문에 사드를 말하는 것”이라고 일갈했다. 미국의 대외관계 총책임자가 공개적으로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를 입에 올린 것은 우리정부가 닫아 건 이른바 ‘3NO정책’의 문을 쾅쾅 부순 것이다. 이제 그만 나오라는 것이며, 6월 방미 때 사드 구매요청서를 휴대하라는 것이다.

사드가 무엇인가? 미일동맹에게 사드는 중국의 미사일 역량을 샅샅이 파악하여 궁극적으로는 중국 미사일에 최적화된 MD(미사일방어)를 구축하는 전략적 침로다. 그들은 두 가지를 동시에 노린다. 사드를 고도로 발전시켜 중국의 군사적 무력화에 도달한다. 그게 아니라면 군비경쟁 와중에 힘에 겨운 중국이 소련처럼 무너진다. 둘 다 지금의 중국은 없다. 그러므로 사드는 현대판 정명가도(征明假道)다.

이것은 실제상황이다. 미일동맹의 정명가도에 붙을 것인가? G2 중국에 구원병을 청할 것인가? ‘일본군은 얼레빗, 명군은 참빗’ 그게 그거, 우리는 죽음을 면치 못한다. 살 길은 오직 하나, 중립뿐이다. 지난 5월 9일 북 김정은 제1위원장이 붉은 광장, 푸틴과 시진핑 옆에 서지 않았다. <북한이 중·러의 품으로 들어가면, 미국이 미-일 동맹의 연장선상에서 한국에 반중 통일전선의 한쪽 날개 역할을 요구할 때 그걸 거절하기 어려워진다. ("남북화해, 미국에게는 중국 압박 분위기 흐리는 것" 오마이뉴스 5월 19일)> 미일동맹과 중러동맹이 사생결단으로 싸우는 이 와중에도 우리가 살 길은 있다.

연립

중립의 모범국가 스위스의 비결을 말할 때 으뜸 꼽히는 것은 무장중립이다. 위에 독일, 왼쪽에 프랑스, 오른쪽에 오스트리아, 아래 이탈리아. 한 번씩은 유럽을 휩쓴 강대국 사이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중립 때문이며, 그걸 지킨 건 어떤 나라와 붙어도 물리칠 수 있는 군사력이라는 줄거리다. 맞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면 50점. 중립 스위스의 또 다른 원천은 연방국가라는 데 있다. 4개 언어, 16개 주로 조각난 그들이 연방의 퍼즐로 뭉치지 않았다면 그들 16개 주 가운데 누구도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

남과 북이 대립하면 미일과 중러, 약육강식 맹수들의 동맹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중립의 철벽을 구할 수 없다. 대립, 즉 맞서는 것이 아니라 연립, 즉 함께 서야만 그 보물을 얻을 수 있다. ‘함께 서는’ 방법이 서로 달랐으나 615공동선언으로 단일안이 만들어졌다. “연합제와 낮은 단계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그 방향으로 통일을 지향한다.” 얼마나 좋은가? 15년 전에 벌써 합의한 그대로 뚝딱 실천만하면 밖으로는 중립, 평화의 보호막이요, 안으로는 615통일, 공존공영인 거다.

그러나 현대판 정명가도에게는 그것이야말로 최악이다. 하여 그들은 6.15 비슷한 것만 봐도 난리, 난리 찬물을 발사한다. 올해 1월 1일과 2일 남과 북에서 각각 덕담이 있자 1월 3일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휴양지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대북 추가제제’를 발표한다. 한미합동군사훈련이 끝난 후 우리 통일부가 “대북 민간교류 확대, 광복 70년 민간교류 추진”을 발표하고 6.15남측위원회의 대북 접촉을 허가하며 분위기를 띄우자 케리 미 국무장관은 ‘더욱 강력한 대북 제재’를 고창한다. 남북 공동행사가 예정된 6월 15일을 전후하여 박근혜 대통령을 초청하는 건 또 뭔가?

독립

정명가도, 이중의 지옥에서 벗어나려면, 중립과 연립의 생존과 번영으로 가려면 그래서 독립이 필요하다. <(1991년 북미, 남북의) 이 화해무드를 일거에 뒤엎어버린 것이 1992년 가을 딕 체니 당시 미 국방장관의 팀스피릿 훈련의 1993년 재개 선언이었다... 지금의 미-쿠바, 미-이란 화해를 선취했던 북-미 접근(2000년 북미, 남북의 접근)도 체니가 부통령으로 미국의 안보군사정책을 좌우했던 조지 부시 정권의 등장으로 또 파산했다. (“악마화 정책은 성공한 적이 없다” 한겨레 5월 28일>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 대사도 말하지 않는가? 수백만 명을 죽일 수 있는 가공할 독성을 품은 채 페덱스 포장지에 싸여 쥐도 새도 모르게 이 땅에 들어온 탄저균이 또한 말하지 않는가? 문제는 미국이고, 답은 독립이라고.

 

 
전 한국진보연대 집행위원장

전 6.15남측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

전 반전평화국민행동 공동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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