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1주기가 다가온다. 새삼 맨 정신을 가지고 앞을 바라보기 힘겨워진다. 뉘에게 꼴뚜기질을 해야 하는지도, 뉘에게 비나리 해야 하는지도 도통 알 수 없다. 도대체 누굴 붙잡고 달구쳐야 상명(喪明)을 겪은 아비와 어미를 달랠 수 있을까.

혼돈, 제강의 세상에서 이미 염량을 잃어버린 지, 잊어버린 지 오래이다. 하긴 나에게 애초 그런 염량 따위가 가당키나 했었나.

그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기에, 남은 이들의 부은 눈가와 서럽게 잘려나간 머리카락을 지금껏 그 얼마나 보듬어 주었기에, 잊어버리자, 흘려보내자는 무참한 이야기가 나올까. “세월호를 시간의 흐름 속에 침몰시켜버리면, 결국 우리는 우리 사회의 야만성에 굴복하고 말 것”이라는 어느 철학자의 말은 차라리 애원에 가깝다. 여전히 차가운 물속에 가라앉아 있는 슬픔을 그 누가 억지로 잊으라 할 수 있을까.

그동안 권력을 틀어쥔 자들은 자식을, 가족을 잃어버린 이들의 슬픔과 한을 달래고 어루만져, 진실과 해원의 너머로 모시는 월천꾼이 되기보다는 무참한 소리장도, 망종의 모습만 보여주었다.

또 이러한 아둔패기, 옹춘마니들에게 호된 꾸짖음을 주어야 할 지식인, 언론인 중 일부는 단지 책상물림이 되어 오히려 권력의 따리꾼이 되었다. 유가족들에게 몽니마저 부렸다. 무참한 세월이었다.

거기에 지도자의 메꿎은 행동은 유가족들의, 수많은 ‘우리’들의 가슴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부친처럼 오래 장기집권을 했던 외국 지도자의 장례식에는 참석하면서도, 제주의 피맺힌 4월은 외면했고, 이제 아이들이 떠난 지 한 해가 되어가는 지금, 그 어떤 ‘중대한’ 업무를 이유로 나라를 떠난다고 ‘통보’한다. 그의 매정한 모습이 이 땅의 수많은 부모, 형제들에게는 범강장달이보다 더한 무서움과 분노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과연 알고 있을까.

▲ 코바야시 타끼지 지음 / 서은혜 옮김, 『게 가공선』, 창비, 2012년 10월, 원제 蟹工船 (1929년). [자료사진 - 통일뉴스]
 

이 잔인하다 못해 무참하고 무심한 세월 속에서 그 ‘세월’을 감당치 못해 어리둥절하다가, 어리석게도 코바야시 타끼지의 오랜 소설을 집어 들었다. 아둔한 놈이다. 하지만 나름의 이유도 분명 있었다.

1920년대 제국주의의 피바람 속에, 자본이라는 강력한 괴물 앞에, 짐승보다 못한 노동과 착취에 내몰려 죽어나가야 했던 일본 노동자들의 삶, 그리고 그들의 정당한, 비장한 분노가, 비단 과거의 일이, 일본만이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공포스러운 자본의 논리 앞에 다름 아닌 세월호가 있기 때문이었다.

죽은 자식이, 도대체 왜 그렇게 죽어야 했는지 알려달라는 부모 앞에, 그리고 아이들의 소박한 밥그릇을 빼앗지 말라는 부모 앞에, 서슬 퍼런 ‘종북’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이 끔찍한 세상에서, 『게 가공선』은 지극히 당연하게도 ‘불순함’이 가득한 작품으로 비칠지 모른다. 물론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게 가공선』에 사회주의의, 공산주의의 냄새가 풍기는 것도 당연할 테다.

하지만 1920년대와 2015년을 아우르는 괴물과도 같은 자본의 논리 앞에 우리는 더 이상 주눅들 수는 없다. 250명의 아이들을 포함해 304명의 생명이 가라앉는 것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은, “다시 한 번!” 똑똑하게 되물어야 한다. 과연 무엇이었는지, 도대체 괴물스런 자본 앞에 무기력했던 국가가, 권력이 반드시 해야만 했던 일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지금 이 시간,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세월호 침몰 후 한 달 뒤, 정부는 사고의 원인을 이렇게 말했다. 잘못된 증축, 화물의 과적, 컨테이너 고박 상태의 불량 등. 이것들은 껍데기만 다 다를 뿐 오직 하나의 것을 가리키고 있었다. 돈이다. 그 돈 때문에, 아이들은 생명을 잃어야 했다.

일본에서 수입된 세월호는, 일본에서라면 벌써 오래 전 폐기되었어야 했다. 이런 노후한 배가 한국에서 버젓이 운항할 수 있었던 것은, 이명박 정부가 연안 여객선의 연령을 30년까지 연장하는 법을 통과시켰기 때문이다. 돈을 아끼기 위함이었다.

배는 그 후 증개축이 이루어진다. 화물과 승객을 더 많이 싣기 위함이었다. 여기에 CEO의 ‘사진’을 전시하기 위한 공간까지 따로 만들었다. 이 역시 돈이었다. 정부는 이런 배에 영업 승인을 내주었다.

컨테이너에 화물들이 단단히 묶여 있는지 점검했어야 했다. 하지만 과적과 잘못된 고박에도 불구하고 출항 허가는 떨어졌다. 현장 점검 없이 서류로 대체했기 때문이다. 컨테이너 현장 안전 점검의 축소는 현 정부의 규제 완화 정책의 일환으로 시행되었다. 창조 경제를 이루기 위함이었을까.

물론 이러한 것들은 정부가 설명한 사고의 원인이다. 사고 이후 구조 과정의 참혹함, 정부의 무능력, 무기력, 무책임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그렇지만 전부 차치하고, 정부가 말한 사고의 원인만 놓고 보아도, 세월호는 오랜 시간 오직 ‘돈’이라는 논리로 누적된 비상식과 비정(非情)으로 인해 가라앉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자본과 그 자본을 제어하지 못한 정부가 만들어낸 사고. 감히 그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만국의 노동자’가 단결하는 세상은, 아마도 영영 오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미 오래 전 자본은 하나의 거대한 물결이 되어 국경을 넘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수많은 게 가공선을 만들어냈고, 수많은 세월호를 만들어냈다. 대부분 국가 권력은 무력했고, 심지어 협조했다. 이미 세상은 거대한 게 가공선, 거대한 세월호가 아닌가.

『게 가공선』은 1926년 북양어업을 떠난 게 가공선 하꾸아이마루에서 노동자가 배의 윈치에 매달린 채 사망한 사건을 바탕으로 쓰여 졌다. 게를 잡아 배 안에서 통조림으로 바로 만들어내는 가공선. 항해법도, 공장법도 적용되지 않는 무법지대. 자본에겐 천국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노동자들에겐 지옥에 다름 아니었을 배. ‘어이, 지옥으로 가는 거야!’라는 소설의 첫 문장이 이미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노예나 다름없는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들. 막일꾼, 가난한 농민과 어부, 학생 등 국가적 산업이라는 허울로 죽음보다 고통스러운 노동에 내몰린 이들은, 결국 “죽지 않기 위해” 단결하게 되고, 파업에 들어간다. 하지만 구축함, 즉 군대라는 이름의 국가는 이들을 구해주지 못한다. 오히려 또 다른 탄압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하지만, 노동자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다시 한 번!” 그들은 일어선다.

먼지가 쌓여있던, 철지난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다시금 일본에서 커다란 반향을 얻고, 많은 젊은이들이 『게 가공선』을 탐독했다. 어쩜 그들이 처한 바로 지금의 상황이 또 다른 게 가공선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게 짐작해본다.

그렇담 우리 역시 다르지 않다. 거대한 세월호에 갇혀, 거대한 게 가공선에 갇혀 어찌할 줄 모르고 있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 떠나간 아이들에게 떳떳한 부모가 되어, 어른이 되어 맞이할 용기도 능력도 여전히 크게 부족하다.

일 년이란 시간이 다가온다. 두려운 시간이다. 하지만 지금 이 땅에 만들어진 지옥, 이 아비규환의 세상을 어떻게 바꿔야 할지, 어떻게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야 할지 멈춤 없이 되묻고, 또 다시 행동해야 함은 변하지 않았다. 누가 지옥을 만들어냈는지, 누가 이 지옥을 끝장낼 수 있는지, 그 답은 오직 우리 자신만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어떤 건방진 위로조차 닿지 않음을 잘 알지만, 아이들을 먼저 떠나 보낸 어미와 아비들에게, 가족들을 여전히 기다리는 남겨진 이들에게, 부끄러운 목소리로, 치 떨리는 목소리로 죄송하다 전한다. 그리고 위로 드린다.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응원의 몸짓도 함께. 그리고 다시.

떠난 이들이여, 부디 영면하시라. 잊지 않음을….

※ 이 글은 이충진의 <세월호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유승진의 <포천>에 많은 빚을 지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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