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산-백암을 지나서 낙산과 남산으로 이어지는 18.6킬로미터의 한양성곽 길을 걷노라면 동서남북으로 세워진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을 만나게 된다. 또 그 길목마다에서 600년 장구한 세월을 함께 지내며 만들어진 아프고 슬프며, 기쁜 흔적들과도 마주하게 된다.

▲ 『한양도성 걸어서 한바퀴』(창해) 표지. [사진제공-도서출판 창해]

이 책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성성곽‘이자 서울의 ’타임캡슐’인 한양도성길을 두 발로 몸소 걸으며 그 속에 담긴 사연들에 귀기울이고 말 걸어본 역사기행서이다.

‘한양도성 걸어서 한바퀴‘라는 제목에, 부제를 ’서울성곽길 따라 6백년 역사속으로!‘라고 나온 이 책은 그런 점에서 ’옛 한양도성을 온전히 순례한 역사기행서‘이다.

저자 유영호는 오직 두 발로 걷는 방식으로 하루 네 시간, 일주일에 한번, 총 14차례에 걸쳐 100일 만에 도성과 도성주변의 동네를 샅샅이 훑으며 이 여정을 함께 할 것을 독자들에게 권한다.

“나는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직접 내 발로 걸어 다니면서 그 속에서 숨 쉬고 있는 역사를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직접 다니며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게 되면 소위 '장소감', 즉 특정 장소가 주는 공감과 체감을 통해 활자만으로는 전혀 느낄 수 없었던 새로운 상상이 펼쳐진다. 새롭게 펼쳐지는 상상력으로 우리의 현실을 바라본다면 보다 더 넓은 세상을 조망할 수 있는 안목이 생길 것이다.”

여기에는 풍광에 대한 묘사도 있고 저자의 감상도 있지만 답사구간 지점마다 얽힌 사건과 사연, 그 역사적 의미에 대한 해설이 꼼꼼히 들어있다.

한양을 도읍으로 정한 후 궁궐의 주산을 어디로 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벌인 논쟁에 이어 한양도성의 동서남북문이 각각 맹자의 4덕, 즉 인의예지(仁義禮智)를 한 글자씩 품고 있는 사연까지 책속의 이야기속으로 들어가다보면 보이는 하나하나가 그저 예사롭지만 않다.

도성을 쌓을 때 처음부터 감독관과 책임기술자, 날짜 등을 일일이 새겨 넣는 실명제를 실시했고 시대별로 축성기술도 뚜렷이 차이가 있다는 것은 지금 보아도 신기한 일이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3대 거부로 손꼽히던 최창학이 해방후 자신의 구명을 위해 별장으로 사용하던 건물(경교장)을 임시정부 청사와 김구선생의 숙소로 제공하였다가 김구 선생 암살 후 고액의 임대료를 요구하는 방식으로 결국 회수해갔다는 등의 일화는 페이지 곳곳에 소개되어 있다.

그런가하면 한양도성의 북문에 해당하는 숙정문을 지나 성북동에 접어들면 보게 되는 길상사에서는 요정 대원각의 여주인 김영한이 보여준 불심과 함께 불멸의 순정을 만나게 된다.

김영한은 수천억 원 대의 대원각을 보시하면서 ‘천억 재산이 어찌 백석의 시 한줄에 비할 수 있으랴’는 말로 백석에 대한 변치않는 사랑을 전했다.

지금은 각국 대사관과 재벌가 저택이 들어서 있는 성북동 일대 10만여 평의 원래 주인이 교보생명 창업자인 신용호라는 사실도 흥미롭지만 이 땅이 그의 것이 된 사연은 그야말로 기가 막힌 한편의 드라마이다.

이렇게 도성을 걸으며 그 흔적들이 전하는 이야기에 귀기울이다보면 생존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서울’은 어느새 600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경험을 통해 시공간적으로 확장된 새로운 ‘서울’로 다가오게 된다.

한양도성은 600여 년 전인 1396년(태조 5년) ‘한양’, 아니 ‘조선의 울타리’로 축조, 조선과 근현대사를 지내오는 동안 개축과 훼손이라는 부침을 겪으면서 지금까지 수도를 지켜오고 있다.

우리도 미처 몰랐지만 한양도성은 세계 여러 곳의 도성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514년, 1396~1910) 도성의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정부는 지난해 한양도성을 유네스코 세계유산등재 추진대상으로 선정했고 내년에 등재신청서를 유네스코에 제출할 계획이다.

올 봄 이 책을 벗삼아 한양도성 답사를 시작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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