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영 목사 / NK VISION 2020 대표 

나의 이번 방북 기간은 2014년 9월 25일부터 10월 6일까지이며, 내가 설립한 NK VISION 2020의 중요 기관 중에 하나인 손정도목사기념학술원 원장의 자격으로 방문을 했다. 특히 이번 방북에는 평소 중국과 북한 문제에 관심이 많은 미국 시민권자 신분의 목회자 부부가 학술원 회원의 자격으로 나와 함께 동행을 했다.

이번에 나의 방북 목적은 종교적인 업무와 학술적인 업무를 비롯하여 남과 북의 양측 사회가 서로 소통하고 통합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다양한 프로젝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 일행 세 명은 매우 차분하면서도 기대감이 넘치는 마음으로 중국 심양에 당도하여 북한 영사관측으로부터 비자를 받고 평양발 고려항공편에 몸을 실었다. (필자)


밤에도 특수조명과 달빛으로 위용을 드러내는 태양궁전

김일성 주석이 생전에 관저로 사용했던 ‘금수산태양궁전’을 내가 처음 구경한 시기는 2012년 9월 말-10월 중순이었다. 그 이후 너댓차례 방북 시마다 지속적으로 궁전 외형의 변모과정을 지켜보았으며 체류기간에 시내를 이동하거나 지방 현지답사를 위해 오고 갈 때마다 활짝 열려진 궁전 대문을 통해 광장 내부를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2012년과 2013년에는 궁전 광장을 녹지 공원으로 조성하는 사업 때문에 수많은 인민군 장병들이 벌떼처럼 모여 마치 돌격대처럼 광장 바닥에 벽돌처럼 깔려 있던 화강석 돌들을 걷어내고 잔디밭과 꽃밭을 조성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으며 아울러 태양궁전 주변과 합장강 양쪽 둑 제방 녹지화 작업을 하는 모습들도 자주 목격했고 2014년도 접어들어서는 이 모든 조성사업이 깔끔하게 완성된 화려한 정원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금수산’은 평양시 중심지 북쪽에 있는 모란봉을 중심으로 그 주변지역을 합쳐 부르는 이름이며 동으로는 대동강과 접해있고 나머지 세 방향은 모두 계곡으로 펼쳐져 예로부터 ‘조선팔경’이나 ‘평양팔경’의 하나로 불렸던 곳이 바로 금수산 자락이다. 평양 중심가에서 북동쪽으로 8㎞정도 떨어진 금수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태양궁전은 대성산에서 발원한 합장강이 대동강을 향해 흐르다가 금수산 자락과 만나는 미암동과 미산동 중간 지대 명당에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순안공항에서 태양궁전을 직선으로 가기 위해 1997년 완공한 금릉 2동굴(터널)을 통과하면 마치 운동장처럼 넓은 왕복 6차선 도로가 눈앞에 펼쳐지며 합장강 다리를 경계로 화강암으로 지어진 웅장한 태양궁전 본관과 광활하고 화려한 정원이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며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나는 지방 참관을 다녀오느라 늦은 밤에 평양시내에 진입하여 지나는 길에 금수산 태양궁전 앞 대로를 종종 지나간 적이 있었는데 야간에 바라보는 궁전은 그야말로 건물 전체가 은은하면서도 휘황찬란하다. 궁전 지붕 꼭대기에 펄럭이는 공화국(북한 국기) 깃발부터 시작해서 아래로 내려오며 공화국 국장, 그리고 두 지도자의 대형 초상화와 광장 주석단 아래 부분에 부각된 대원수 휘장에 이르기까지 어디에 숨겼는지도 모를 특수한 조명들은 마술을 부리듯 이국적인 멋을 연출하며 신성불가침 지역 같은 이곳을 더욱 신비스럽게 만들어 주었다. 북의 용어로 ‘집중투광’과 ‘확산투광’의 특수조명 효과들은 건물 전체 실루엣은 물론 전면 기둥들과 창가의 아치형 부각들까지 음양으로 드러나게 해주며 웅장한 건축미와 품격을 더욱 높여주고 있다. 요즘 평양은 전승기념관, 인민대학습당, 만수대의사당 등을 비롯해 창광거리 아파트 건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공공건물과 상점, 주택, 도시거리에 이르기까지 야간 특수조명을 설치해서 평양의 야간 도시 미관을 한층 격조
있고 화려하게 보여주고 있다.

▲ 특수 조명과 달빛이 어우러진 금수산태양궁전의 야경. [사진제공-최재영]

▲ 1995년, 주석궁을 기념궁전으로 개건공사하기 위한 설계모형 앞에서 지도하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모습. 좌측에 오진우 인민무력부장이 바라보고 있다. [사진제공-최재영]

▲ 김일성 주석의 유해를 영구보존하기 위해 금수산기념궁전을 개축한 직후의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베르사유궁전과 타지마할묘가 중복 연상되는 외관

금수산태양궁전을 참관한다고 하니 갑자기 프랑스의 루이 14세 국왕이 생각났다. 당시 유럽의 최강대국이었던 프랑스를 무려 72년 동안 통치했던 그는 ‘태양왕(Sun King)’이라는 명칭과 함께 프랑스 역사에서 가장 화려한 시대를 이끌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집무를 보고 생활할 수 있는 관저를 짓기 위해 유럽 역사상 가장 화려한 베르사유궁전을 24년에 걸쳐 건축했다. 궁전 안에 300m 길이의 거대한 복도가 있고, 형형색색의 수백만 그루의 꽃과 나무들로 꾸며진 대정원을 비롯해 램프와 연못, 분수가 조성된 것 등이 이곳 평양의 금수산태양궁전과 외형적으로 동일한 부분들이 많다. 이처럼 세계 문화유산으로 남아있는 궁전들과 사원들은 저마다 독특한 역사적 사연과 그로인한 경이로움을 지니고 있는데 나는 금수산태양궁전의 건물을 떠올리면 인도의 타지마할묘가 베르사유궁전과 중첩돼 생각이 난다.

인도 무굴제국의 5대 황제인 샤자한은 두 번째 부인으로 맞아들인 뭄타즈마할을 각별하게 사랑했는데 그녀가 아들을 출산한 뒤 운명하자 황제는 백성들에게 2년 상을 치를 것을 공포하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묘를 지어 왕비에게 바치려 했다. 무려 22년 동안(1631-1653년) 거액을 들여 완성한 이 궁전묘는 무굴제국의 미술, 공예품, 건축예술은 물론 온갖 재보가 총 집약된 종합예술의 극치를 보여주었으며 당시로서도 파격적인 국제적 프로젝트로 설계되어 축성되었다. 이란의 유명 건축가 이사칸이 참여했고, 유럽대륙의 전문 기술진들까지 동원되었을 뿐 아니라 건설인력도 인도 자국민뿐만 아니라 중앙 아시아인을 포함하여 2만 명의 인원이 참여하였고 러시아와 중국 등에서 수입한 각종 희귀 원석들과 보석들을 구입해 예술적으로 완공했다. 이 묘지건물은 천정의 돔양식을 올린 건축기법도 불가사의했지만 그보다는 전설보다 더 아름답도록 아내를 사랑했다는 사실과 왕비인 아내를 위해 국력을 탕진하면서까지 야무나강변 앞에 궁전보다 화려한 묘를 건설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볼 때 금수산태양궁전은 베르사유궁전과 타지마할묘와 건축과정과 외관이 연상되는 듯하지만 독창적인 조선식 사회주의 건축물로 완공됐다고 보여진다. 뿐만 아니라 궁전식 특급 실내 국립묘지에 안치된 북한의 두 지도자는 정치적 후폭풍이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고 생전의 모습 그대로 인민들의 애도와 추모를 받고 있다는 사실은 역사와 권력의 속성상 전무후무한 일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일성 주석을 금수산기념궁전에 안치한 것에 대해 북측은 “국가와 수령에게 바친 충성과 효성의 고귀한 결정체이며 최대의 국보”라고 강조하고 있다. 세계역사에는 유명한 신전이나 릉묘들이 많이 있으나 이곳 금수산태양궁전은 유훈통치가 생생하게 계승되는 미스테리한 장소이며 이른바 ‘영생의 모습’으로 누워 있는 투명유리관에서 발원하는 사후 리더십은 한반도(조선반도)와 아시아 역사의 중심축이 되고 있는 듯 보였다.

▲ 인공위성 맵으로 내려다 본 금수산태양궁전과 그 주변 전경.우측이 합장강이며 좌측은 김일성종합대 캠퍼스이다. 궁전 정면 건너편 우측이 중대형 버스 주차장이다. [사진제공-최재영]

▲ 꽃과 나무와 분수대를 갖춘 정원을 조성한 이후의 금수산태양궁전 전경. [사진제공-최재영]

▲ 김정은 국방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군관민 대규모 합동군중집회가 정원 사이에 조성된 금수산태양궁전 광장에서 열리는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금수산태양궁전의 건물 변천사

평양시 대성구역 미암동 금수산(모란봉의 별칭)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태양궁전은 원래 1973년 3월에 ‘금수산의사당’으로 착공되어 1977년 4월 김일성 주석 탄생 65돌을 맞아 완공된 유럽식 5층짜리 복합석조 건물이었다. 설계도면 대로 실제 총부지 면적이 350만㎡이며 지상 건축면적이 3만 4910㎡에 달했다. 이는 미국의 백악관이나 한국의 청와대, 프랑스의 엘리제궁 등의 규모와 수준을 훨씬 능가하며 그곳에 근무하는 대통령들처럼 북한의 국가 최고지도자가 집무를 보는 관저의 용도로 건축되었기 때문에 ‘주석궁’이라고도 불렀다. 김 주석은 17년간 그곳을 관저와 집무실로 사용하며 국사를 돌보던 중 묘향산 특각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다 1994년 7월 18일에 갑자기 심근경색으로 운명했다. 국장이 치러지는 가운데 김 주석의 유해는 투명유리관 속에 안치되어 국내외 조문객들의 참배를 받았으며 장례식 직후 그의 유해는 2층 중앙 홀(현재 영생홀)에 안치되어 영구보존에 들어갔으며 이때부터 만수대의사당 내부는 특급 실내 국립묘지 용도에 맞게 개축 설계에 들어갔다. 내부와 외관은 이름에 어울릴 만큼 ‘궁전과 묘역의 조화’를 이루는 특수한 구조로 개건되기 시작한 것이다.

김 주석 생존시 사용하던 본관의 모든 창문들은 쾌적한 실내공기와 부패방지 시스템으로 인해 기존 대리석 벽과 동일한 화강암으로 막아 버렸고 실내묘역으로 조성하기 위한 1차 확장 및 개조 공사가 1주기인 95년 7월까지 불철주야 진행됐다. 특히 그해 10월 16일, ‘김일성 주석 서거 100일 중앙추모대회’에 참가했던 10만 명 이상의 추모군중들이 잔디를 밟으면서까지 주석궁 마당에 벌떼처럼 운집하자 김 국방위원장은 대규모의 광장이 시급함을 절감하고 시멘트였던 궁전 앞마당을 20만 명이 동시에 운집할 수 있는 10만㎡의 규모의 화강암 광장으로 조성토록 군부대에 지시했다. 이는 현재 김일성광장 넓이의 두 배에 달하는 규모였으며 바닥은 화강석 70만개를 20여 가지 모양의 규격으로 다듬어 깔았으며 광장 넓이는 두 지도자의 생일을 상징해 김일성광장(216미터)처럼 너비 415(4월 15일)미터, 길이 216(2월 16일)미터의 규모로 조성되었다.

1주기를 앞둔 1995년 6월 12일, 당중앙위, 당중앙군사위, 국방위원회, 중앙인민위원회, 정무원 등 북의 최고 권력기관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를 영생의 모습으로 길이 모실 데 대하여’라는 제목의 공동명의를 결정하여 금수산의사당을 ‘금수산기념궁전’으로 개칭하는 결정서를 채택하고 이때부터 김일성 주석의 유해를 영구보존하기 위한 ‘기념궁전’으로 본격적으로 꾸며졌으며 1주기가 되는 1995년 7월 8일에는 ‘금수산기념궁전’으로 공식 개관하며 유리관 속에 안치된 김 주석의 유해를 생전의 모습처럼 인민들에게 공개했고 1996년 7월 27일에 거행된 조국해방전쟁 승리 43주년 기념일 이후부터는 외국인 관광객도 시신보존실을 참관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 이후에도 개건공사는 계속 진행되어 1996년에는 주민들의 관람 편의를 위해 건물 바깥쪽 외랑(긴 복도)을 직선과 지하로 건설하였고 물품 보관실과 옷보관실, 학을 조각 형상한 화강석 울타리와 대원수별을 형상한 돌 정문을 세웠으며 궤도전차노선 운행, 운하와 다리 건설 등을 인민군대를 통해 단기간에 완공했다.

이듬해인 1997년에는 평양시내를 비롯한 전국 곳곳에 ‘김일성주석 영생탑’을 건립했고 단군릉-순안공항-태양궁전을 이어주는 아미산의 금릉 제2동굴을 완공했다. 1998년에는 무려 100여 정보에 달하는 수목원을 조성하는 대규모 산림 녹지공사를 추진했고 풍치림 조성을 위해 인근 임흥지구에 대단위 주택을 건설했으며 연못동에서 기념궁전을 잇는 수백 미터의 6차선 도로를 건설하기도 했다. 김 주석의 유해를 안치한 기념궁전이 되면서 중앙 홀에는 김일성 주석의 대형 초상화와 너비 60m짜리 입상이 세워졌으며 그 후로도 궁전내부와 외부는 지속적으로 보완공사와 추가공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또한 기념궁전을 지하 200m 깊이의 평양지하철과 연결하였으며, 경내는 위수구역으로 지정돼 30여 개의 감시초소와 검문초소가 설치되어 일반인과 불순분자의 접근을 통제했다.

그 후 ‘금수산기념궁전’은 2011년 말이 되면서 또 다시 일대 대전환기를 맞게 된다. 2011년 12월 17일 아침,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현지시찰 도중 달리는 전용열차 안에서 운명한 것이다. 유해는 김 주석 때와 마찬가지로 투명 유리관 속에 안치되어 국장에 참석한 국내외 조문객들의 참배를 받았으며 장례식을 마친 직후 그의 유해는 1층 영생 홀에 안치되었다. 궁전측은 기존의 내부 구조를 활용해 영구보존과 관리에 필요한 사업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2012년 1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은 “주체의 최고성지인 금수산기념궁전에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를 생전의 모습으로 모신다”는 결정을 공표하였으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70회 생일을 맞은 2012년 2월 17일에는 금수산기념궁전을 ‘금수산태양궁전’으로 개칭하고 성대하게 개관식을 치렀다. 이로써 그동안 궁전 내외부에 홀로 설치된 김일성 주석의 모든 초상화와 입상 옆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추가되는 사업이 신속히 진행됐으며 아울러 평양시내와 전국에 있는 모든 ‘김일성 주석 영생탑’도 이제는 ‘김일성, 김정일 영생탑’으로 보완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또한 전국의 모든 공공장소와 기관, 가정집에 게시된 김일성 주석의 초상화와 입체 영상물과 동상 옆에는 김정일 위원장이 추가되어 커플화 되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서거 100일 중앙추모대회’가 끝난 직후 김정은 제1위원장은 당중앙위원회의 책임자들에게 “금수산태양궁전 주변과 합장강 녹지사업 뿐만 아니라 궁전 광장에 수종과 수형이 좋은 나무와 꽃들을 많이 심어 정원과 분수대를 조성하여 일반 인민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주검이 안치된 건축물의 특성상 엄숙한 분위기와 회색 빛 무거운 분위기였던 묘역 광장에 화려한 꽃밭과 잔디밭 등의 정원을 조성한다는 것은 누구도 전혀 상상하지 못한 역발상이었다. 뿐만 아니라 2013년 4월 의회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법령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금수산태양궁전법을 채택함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금수산태양궁전법을 채택해 ‘영생홀’에 안치된 두 지도자의 유해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법안을 제도적으로 법제화했다.

이로서 주석궁(금수산의사당)에서 금수산기념궁전으로, 다시 금수산태양궁전으로의 변천과정을 세 번이나 거친 현재의 궁전은 각종 꽃과 나무들을 갖춘 대정원이 되어 고풍스러우면서 밝고 환한 이미지로 거듭나게 되었다. 현재 태양궁전 본관 2층 중앙 ‘영생홀’에는 김일성 주석의 유해를, 1층 중앙 ‘영생홀’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유해가 생전의 모습으로 지난해만 연인원 150만 명의 국내외 참배객들을 맞으며 이곳을 ‘주체의 최고성지’, ‘혁명의 성지’, ‘사회주의 조선의 성지’로 변모시키고 있다.

▲ 70만개의 화강암을 걷어내고 새롭게 정원으로 꾸며진 태양궁전 광장 모습. 공원화된 이후에도 대규모 군중집회를 열 수 있게 조성되었다. [사진제공-최재영]

▲ 태양궁전 정원 분수대 주변을 거니는 주민들의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 꼬마 인민군 복장을 한 어린이가 분수대에서 엄마와 할아버지가 지켜보는 가운데 포즈를 취하는 모습. 평일에도 일반 인민들과 군인들이 단위별로 많이 찾고 있다. [사진제공-최재영]

태양궁전 본관에는 어떤 시설물들이 있나?

현재 태양궁전 본관에는 어떤 용도의 시설물들이 구비되어 있을까? 본관 입장 절차를 모두 마치면 가장 먼저 정면에 나타나는 것은 환하게 웃는 두 지도자의 영정(초상화)이 붉은 대리석으로 형상화한 공화국 깃발에 새겨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 궁전의 좌측 계단을 오르면 은은한 조명 아래 양복을 입고 뒷짐을 진 생전 모습의 김일성 주석과 인민복을 입은 김정일 위원장의 거대한 입상이 흰 대리석으로 세워진 대형 홀이 나타난다. 이 두 홀에는 언제나 근조 화환이 증정돼 있고 좌우로 각각 5명씩의 각군 명예 근위병들이 집총자세로 의전근무를 서고 있는데 이 두 홀은 김정은 제1위원장과 최고 수뇌부들이 ‘영생홀’에 참배하기 전에 가장 먼저 들려 인사하는 곳이다.

본관의 가장 중요한 핵심 시설은 아무래도 2층 중앙홀에 안치된 김일성 주석의 ‘영생홀’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유해가 안치된 1층의 ‘영생홀’이다. 현재 김 주석이 안치돼 있는 ‘영생홀’은 금수산의사당 시절에 자주 사용하던 넓은 연회장을 개조해 만들어 놓은 것이며 현재 사용 중인 2층과 1층의 영생홀 외에도 만일에 대비하여 2개의 시신 보존실이 더 확보되어 있으며 두 개 모두 시스템 구축이 완료된 방이라고 한다. 일반 참배객들은 정해진 참관 코스만 다니기 때문에 다른 안치실의 존재를 모르고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김일성 주석의 생존 시에는 대한제국의 멸망과 함께 행방이 묘연했던 조선왕조의 옥새가 주석궁에 보관돼 있었는데 지금은 그 행방이 어딘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 근거는 2001년 2월 북한의 예술전문잡지 ‘조선예술’의 기사에서 이미 자세히 다루었다. ‘조선예술’은 당시 ‘주석궁(금수산기념궁전)’에 있는 이 조선조의 옥새가 경상도 출신의 한 노인이 퇴역한 일본군 장군의 집에서 몰래 훔쳐내 수 십 년간 보관해오다가 지난 1970년대 중반 자신의 아들과 함께 존경하는 김일성 주석을 직접 찾아가 바친 것이라고 소개했다. 이 노인은 일본 퇴역장군의 집에서 심부름꾼으로 일하다가 이 집에 조선왕조의 옥새가 있음을 알게 돼 의도적으로 빼내온 것이며 이 사건으로 그의 아내와 자식,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일경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 끝에 억울하게 죽었다고 밝혔다. ‘옥새’와 ‘국새’는 다른 것이며 이곳에 보관된 것은 조선왕조 임금이 직접 사용한 ‘옥새’라고 전해진다.

태양궁전에는 1995년 6월 12일 금수산의사당을 금수산기념궁전으로 전환하고 김 주석 안치실 설치와 동시에 ‘주체사상로작관’을 조성해 “탁월한 사상이론가로서의 활동 전모를 보여 주도록 하여 금수산지구가 주체의 최고성지화” 되도록 하였다. 김 주석을 안치한 ‘영생홀’을 나오면 ‘울음홀’이라고 불리는 넓은 공간이 나오는데 이곳은 김 주석의 마지막 장례식 절차가 거행된 곳이다. 이때 참석한 각계각층의 인민들이 땅을 치고 몸부림치며 통곡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는 이곳은 김 주석 생존시 ‘삼지연홀’로 불리던 궁전 1층 중앙홀이었으며 정면에 양강도 삼지연의 모습을 그린 대형 풍경화가 걸려 있다고 해서 ‘삼지연홀’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김 주석이 외국의 지도자나 해외동포 인사들을 만날 때 이 그림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했던 익숙한 방이다.

또한 대원수로 추대 받은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생애 마지막까지 현지지도와 외국방문 길에 이용하던 승용차와 전동차, 선박, 전용열차 등이 사적물로 지정돼 초대형 전시실에 보존돼 있다. 그리고 두 지도자가 세계 각국으로부터 수여받은 훈장과 명예박사학위들을 보존한 ‘훈장실’이 각각 별도의 대형전시관에 화려하게 전시돼있다. 참관자들의 마지막 코스로서 감상문과 소감문 등을 기록하는 거대한 ‘방명록 홀’이 있는데 이곳에는 백두산 봉우리를 그린 초대형 병풍이 비치되어 있는 곳이다.

▲ 태양궁전을 찾은 인민군 장교 가족들이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 주황색 유니폼을 입는 평양시내 일반 환경미화원들과는 다르게 밝고 고급스런 하늘색 유니폼을 입은 태양궁전 소속 여성 환경미화원들의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 정원을 찾은 주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룬 태양궁전 광장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 태양궁전 광장 정원내 유리지붕 휴게소에서 휴식을 취하는 주민들. [사진제공-최재영]

▲ 태양궁전 대문 앞 인공연못에서 노니는 백조들의 모습을 난간위에서 주민들이 지켜 보고 있다. [사진제공-최재영]

▲ 인공연못가에서 한가로이 노니는 백조들의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주체사상’과 ‘선군사상’의 파르테논을 찾아가다

2014년 4월 17일, 아침식사를 마치자 담당 안내원은 일행들을 향해 “오늘은 가급적이면 검은 정장과 넥타이를 갖춰 입으시고 카메라는 물론 지갑, 원주필(볼펜)도 일체 가져 갈 수 없으니 숙소에 두고 모두 빈손으로 가시기 바랍니다”라고 당부하듯 주문했다. 오늘은 예정대로 금수산 태양궁전을 참관하는 날이다. 그 동안 방북 체류시 거의 매일 지나다시피 했고 가끔 자동차를 잠시 세우고 사진촬영도 하며 자유롭게 구경했던 곳이지만 실제로 태양궁전 경내에 진입하여 정식으로 참관하기는 오늘이 처음이다.

근 1세기 동안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소련의 레닌(1924)을 필두로 인민들의 신임을 받는 정치지도자들이 타계하면 그들의 유해를 영구보존하여 공개하는 독특한 사회주의 장례문화 관습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잘 알려진 대로 불가리아의 디미트로프(1949), 소련의 스탈린(1953), 체코슬로바키아 고트발트(1953), 베트남의 호치민(1969), 앙골라의 네트(1979), 가이아나의 바남(1985), 중국의 마오쩌둥(1976) 등에 이어 김일성 주석(1994)은 전 세계에서 9번째로, 김정일 국방위원장(2011)은 10번째로 유해가 영구 보존됐다. 오늘은 북한에서 ‘주체사상의 창시자이며 사회주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김일성 주석과 ‘선군사상을 창시’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영구를 안치한 영생홀을 동시에 참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안내원들과 관리들에 의하면 마침 올해(2014)가 김일성 주석의 20주기가 되는 해라서 석 달 후(7월 18일)에는 대규모 추도행사가 예상된다고 했다.

우리 일행은 다른 외국인 일행들과 해외동포 일행들과 함께 고려호텔 숙소에서 대형버스에 탑승해 30분을 달려 태양궁전 정문 도로 건너편 주차장에 도착했다. 중대형 버스를 이용하는 참관자들은 궁전 정문 길 건너편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도보로 이동하여 정문 담장 왼쪽 끝에 마련된 길다란 임시 회랑(外廊)으로 가야 했다. 모든 참관자들은 회랑에 집결해야 본관 입장 절차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주차장에서 정면으로 궁전을 멀리 바라보니 워낙 광활한 부지에 자리 잡은 궁전터라서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였다. 궁전 좌측으로는 합장강이 유유히 흐르고 그 강줄기는 조금 더 흘러 대동강과 합류하는데 그 부근에는 전 세계 국가 지도자들이 방북할 때 숙박하는 백화원 초대소와 호수가 자리하고 있으며 태양궁전 경내 바로 우측에는 울타리를 사이로 김일성종합대 캠퍼스가 울창한 숲속에 자리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태양궁전에 설치된 엄청난 두께의 화강암 담장은 학과 구름을 조각했고 정문과 보조 대문에는 금빛 대원수(大元帥) 견장과 목란, 진달래꽃들을 화려하게 조각했다.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인공호수가 경내 길이와 같은 길이로 조성돼 있고 연못에는 금붕어와 비단잉어들이 휘돌아 노닐고 정원에는 꽃과 나무들 사이로 각종 새들과 학들이 날아다녔다.

궁전 본관은 전체 조경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처럼 보였으며 동서 유럽풍의 그 어떤 궁전들과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어 보였다. 회랑에서 가까운 궁전 정원에 도착하니 날씨가 화창한 봄날이라 그런지 각지에서 나들이 삼아 올라온 가족단위, 직장단위 입장객들은 궁전 광장과 정원이 좁아보이리만치 삼삼오오 돌아다니며 감상하거나 사진 촬영에 여념이 없었다. 승용차를 이용한 일반 방문단 차량은 전용 출입문을 통과하자마자 입구 검문소에서 멈춰 모두 차에서 내려 검문소에 들어가야 하며 금속 소지품을 검색하는 5미터 길이의 스크린 앞을 통과한 뒤 다시 차에 올라 주차장까지 가야했다.

외랑 옆 호수 위 다리에서 광장 공원을 바라보니 그야말로 최상의 꽃밭과 아름다운 수목들로 가득 찬 정원에는 분수대 물이 솟구쳤으며 정원 안에 조성된 유리천정 휴게소에는 휴식을 취하는 주민들의 모습들도 눈에 띄었다. 과거 주석궁 시절에는 권력의 핵심부로서 긴박감이 넘쳤다면 김일성 주석의 유해가 안치된 금수산기념궁전 시절에는 근엄한 묘역의 잿빛 이미지였는데 이처럼 태양궁전으로 명명되고 공원화된 이후에는 주민들이 마치 야외에 소풍 온 듯 바뀐 것이다. 외랑 입구에 도착하니 현지 주민들은 질서 정연하게 대기하고 있었으며 남자는 양복이나 인민복, 여자는 조선옷(한복)이나 정장 차림이었다. 단체로 온 학생들과 군인 일행들도 입장 순서를 기다리며 차례로 줄 서 있었고 단체 참관자들은 무조건 4열종대로 줄을 맞춰 질서 있게 이동했으며 우리 일행이 해외동포들이라며 양보하는 모습은 예절이 바르고 어른을 공경하는 모습으로 아름답게 비쳐졌다.

▲ 태양궁전 정문에서 직선거리로 바라 본 금릉동굴(제2 터널)의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 태양궁전 참관을 마치고 대문을 나서는 여군들의 환한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 모든 일반 참관자들의 수속을 밟는 회랑 입구 모습. 버스로 도착한 방문객들은 길 건너 주차장에 내려 도보로 이곳을 찾아야 한다. [사진제공-최재영]

“그냥 편안히 주무시는 모습입니다”

평양 시민들이 태양궁전을 가려면 여러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있다. 북 당국은 관광객 외에도 외국의 주요 방북단이 오면 이곳을 주요 참관지와 참배지로 안내하고 있기 때문에 외국인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얼핏 듣기로 외국의 국빈이나 지도자급 대표단들은 자동차로 경내에 진입하여 본관 뒤편으로 입장하는 특별 코스가 별도로 마련돼 있으며 편의를 배려해 약식 절차만 거친 후 참관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평양시내에 부쩍 증가한 승용차나 자가용 차량을 소지한 주민들은 직접 차량을 운전해 방문자 전용 주차장에 주차한 후에 참관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민들이 개인이나 단체로 찾아 올 때는 주로 버스나 궤도 전차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모습을 여전히 볼 수 있었다.

특히 현재 운행되는 평양 지하철 노선은 크게 천리마선과 혁신선이 있는데 1975년 10월에 개통된 혁신선중에 ‘광명역’이 현재 금수산의사당(현재 태양궁전) 정문과 400m정도 밖에 안 된 거리에 개설됐으나 금수산기념궁전 시설물과 연결됨에 따라 폐역 되고 그 대신 ‘삼흥역’에서 태양궁전까지 가는 ‘금성거리 궤도전차’가 운행되기 시작했다. 또한 1996년에는 김일성종합대학 맞은편에 있는 전용 궤도전차 승차장에 모여 궁전 앞까지 연결해주는 ‘금수산선’이 개통되어 참배객들은 이 전용 궤도전차를 이용해 기념궁전을 찾아간다. 1996년에 이탈리아를 통해 수입해온 이 전차는 스위스 취리히 트램에서 운용하던 4/4 1b 모델을 운행했는데 이 노선은 1,000m 궤간을 쓰고 있으며 광명역 폐역 이후 금수산 태양궁전의 셔틀 차량 역할을 하고 셈이다.

나는 3년 전 태양궁전 부근에 있는 평양 남새과학연구소와 화초연구소를 참관하는 날 대성구역 용흥동 금성거리에서 김일성종합대 맞은편에 있는 전차 승강장에서 궤도전차 탑승을 체험한 적이 있었다. 전차 탑승장부터 태양궁전까지 소요되는 약 2㎞거리(5리)를 운행하는 시간은 10여분 남짓 된다. 탑승자들은 승강장에 모여 자유스럽게 대화를 나누다가 일반 전차에 탑승하면 경건한 마음가짐 때문인지 침묵으로 일관하며 여군복장을 한 안내원의 해설에만 귀를 쫑긋 세운다. 흰 장갑을 낀 여군복장의 전차 안내원은 해설사의 역할을 겸하고 있었는데 유리관 속에 안치된 최고지도자들을 그리워하는 그녀의 애달픈 멘트와 태양궁전에 대한 해설을 몇 마디 듣다보면 금방 정문에 도착한다. 우리 일행 중 한명이 유리관 속에 누워 있는 김일성 주석의 모습에 대해 미리 질문했다.

“유리관 속에 주석님은 어떤 모습으로 계십니까?”
“그냥 편안히 주무시는 모습이십니다.”

짧게 답변을 던진 안내원은 본격적으로 해설을 시작했다.

“... 여러분들은 지금 위대한 어버이 수령님과 장군님을 영생의 모습으로 모신 금수산태양궁전을 향하여 출발하시겠습니다. 천리길 만리길 마다 않고 찾아오신 여러분! 하늘도 울고 땅도 울었던 그날의 비통함을 다시 한번 떠올리며 두 분의 대원수님에 대한 그리움의 마음을 안고 이제 전차는 떠나겠습니다... 훌륭하게 잘 꾸려진 태양궁전을 돌아볼 때 장군님 사랑의 손길이 머무른 한 그루의 나무마저 무심히 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영원한 태양의 성지로 빛나고 있는 태양궁전은 우리 혁명의 앞길을 밝혀주는 등대이고 우리의 영원한 마음의 기둥입니다...”

올해는 2대의 전용 궤도 전차가 하루에 연속 100회 정도 운행하는데 태양궁전이 정원으로 꾸며지고부터는 가족이나 연인, 친구끼리, 혹은 직장 동료들끼리 자유롭게 찾아 올 수 있어 참배객뿐 아니라 일반 관광객들과 방문자들도 부쩍 늘어 하루에 1만여명 정도가 이용을 하며 연간 참배객이 150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 평양시내 삼흥역에서 태양궁전 정문까지 정기운행하는 금성거리 궤도전차의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 평양시내에서 출발한 궤도전차에서 내려 회랑으로 들어가는 참배객들의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 참관객들이 검색대를 향해 통과하는 외부 회랑의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 본관 입장을 위한 검색 절차를 모두 마치면 탑승하게 되는 200미터 길이의 무빙워크. [사진제공-최재영]

외랑에서 무빙워크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입장하다

버스나 전차에서 내려 외랑 입구에 도착하면 본격적인 참관 일정이 시작된다. 김 주석의 1주기였던 1995년 7월 개관 당시에는 외랑과 에스컬레이터가 없었지만 눈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참관하도록 1997년에 새로 설치했다고 한다. 안내에 따라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물품 보관함에 소지품을 맡기는 일이다. 혹시나 자신의 집이나 숙소에서 모르고 가져온 물품들이 발견되면 스스로 락커룸에 맡기고 번호표 열쇠를 받은 후 나갈 때 찾으면 된다. 또한 코트나 외투는 반드시 벗어 전용 옷걸이에 걸어둔 후 맡겨야 했다. 우리 일행은 외국인과 해외동포라는 배려로 주민들 보다 먼저 임시 회랑 접수대에 들어섰으며, 궁전 본관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기까지는 까다로운 여러 과정을 거쳐야 했다.

우리 일행들 중에는 버스 안에서 담당 안내원에게 미리 맡겼는데도 자기 순서가 되어 몸수색을 하자 몸속에서 자꾸 볼펜, 메모지, 라이터, 지갑이나 금속소지품 등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요원들에게 소지품 검사를 받은 후에는 X-선 검색기로 구석구석 몸수색을 받고 통과해야 한다. 그런 다음 신발을 신은 채로 물기가 촉촉이 배어 있는 그린 카펫을 걸으며 먼지나 묵은 때를 제거하며 신발 바닥을 소독해야 한다. 그리고 옷의 먼지나 몸에 붙어 있는 불순물들을 제거하고 빨아들이는 멸균대를 통과한 후에야 궁전 본관으로 이동시켜주는 평면 에스컬레이터(무빙 워크)에 올라 탈 수 있었다. 방문객들에게 차분하고 경건한 마음을 갖게 하려는지 에스컬레이터는 매우 느리게 움직였다. 최고급 대리석으로 건축된 화려하고 긴 복도를 에스컬레이터는 한 없이 움직인다. “왜 복도를 이토록 길게 만들었을까? 서태후가 만든 북경의 이화원 긴 복도를 여기 견주니 어림도 없네?” 혼자 중얼거리며 창가를 바라보니 밖에는 합장강 둑 너머로 파릇파릇 잎이 싹튼 유실수 밭들이 보였다. 1995년에 건축됐다는 이 복도는 그 자체로도 훌륭한 건축예술물이었으며 바닥과 벽면, 천장, 기둥들이 최고급 대리석 재료들로 지어졌다.

일행들과 가볍게 대화하며 이동하다 보니 어느새 무빙워크가 끝나고 앞서가던 단체 입장객들이 2열로 줄을 서며 정체 현상을 보였다. 이때부터 다시 100미터 길이의 수직 에스컬레이터가 눈앞에 나타나자 우리들은 발을 올려 잽싸게 탑승했다. 이제부터 뭔가 긴장감과 엄숙함이 교차되는지 입장객들은 지금까지 서로 소곤대다 말고 갑자기 침묵으로 일관한다. 한참 수직으로 하강하던 에스컬레이터가 끝이 나타나자 연이어 다시 50미터짜리 무빙워크가 나타나자 자연스레 또 다시 갈아탔다. 벽면 좌우에는 두 지도자의 희귀본 사진들이 마치 화랑에 걸려 있는 고급스런 명화들처럼 걸려 있어 무빙워크를 타고 가며 액자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두 지도자의 일대기를 보는 것만 같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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