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노동절, 경남 창원에서 남북 노동자 통일축구대회가 열렸다. 경기를 마친 남북 선수단이 서로 선수복을 바꿔 입고 포옹을 하며 우정을 나누고 있다. [자료사진-통일뉴스]

2007년 5월 1일 제117회 세계노동절을 맞은 경남 창원종합운동장에는 '단합'팀과 '연대'팀으로 서로 섞인 남북 노동자 축구 선수들과 그들을 응원하는 6천여명 관중들의 통일열기로 뜨거웠다.

감독과 코치도 남북이 서로 섞여서 '연대'팀은 북측 김정수 책임감독과 남측 김선경 감독이, '단합'팀은 북측 한원철 감독과 남측 전종구 코치가 각각 담당했다.

전반 17분 연대팀의 10번 중앙공격수 북측 채두영 선수의 첫골에 이어 전반 26분 연대팀 12번 중간방어수 북측 김성철 선수가 골키퍼 키를 넘기는 슛을 성공시키고 후반 15분경 전날 골을 뽑아냈던 북측 박철룡 선수가 연대팀 중간방어수 자리에서 세 번째 골을 추가하며 경기를 주도했다.

단합팀은 후반 16분 남측 10번 미드필드 조민성 선수가 추격골을 넣고 곧이어 18분에 13번 남측 이창주 선수가 골을 추가해 결국 연대팀과 단합팀은 3:2로 경기를 마무리했다.

전날 같은 경기장에서 대항경기로 치러진 '5.1절 남북(북남)노동자 통일축구대회'는 굵은 빗줄기속에서 붉은색 상하의를 입고 나온 등번호 20번 박철룡 선수의 결승골로 북측의 1:0 승리로 끝났다.

전반전이 끝나도록 골은 터지지 않았지만 선수들은 치열한 몸싸움을 벌이면서도 상대 선수가 넘어지면 손을 잡고 일으켜 주었으며, 1,500여 명의 관중들은 하프타임에도 자리를 뜨지 않고 양측으로 나뉘어 단일기를 흔들며 연신 '우리는', '하나다'라는 구호를 주고 받았다.

후반 42분, 코너킥에서 흘러나온 공을 이어받은 '중간 방어수' 박철룡 선수가 중앙 골에어리어 바깥 쪽에서 쏜 중거리슛이 그대로 남쪽의 골문을 흔들었다.

북측선수들은 서로를 껴안으며 기뻐했으며, 관중들도 일제히 일어나 환호를 보냈다.

▲ 관중들은 '우리는', '하나다'를 연호하며, 최선을 다해 뛴 남북 선수들을 격려했다. [자료사진-통일뉴스]

남북 선수도 관중도 '우리는 하나다' 학인

경기가 끝난 뒤 서로 몸을 부대끼며 경기장을 누빈 남북 선수단은 셔츠를 바꿔입고, 상대편 감독과 관중들에게 두손을 들어 인사했다. 관중들도 일제히 일어나 '우리는', '하나다'를 연호하며, 최선을 다해 뛰어 준 남북 선수들을 격려했다.

경기를 마친 후 북측 김정수 책임감독은 "우리는 통일이 기본이지 승부가 기본이 아니다"라는 논평을 남겼다.

한국노총 조합원인 남측 김성견 감독은 "형제 가족처럼 화기애애한 양측 선수들이 자랑스럽다"며, "이 대회를 계기로 (통일의) 새로운 장이 열렸으면 한다"는 희망을 전했다.

경기 결과에 대해서는 "우리는 이틀 훈련한 급조팀으로 꾸려져 수비에 치중하면서 역습을 노렸으나 체력이나 선수기량이 부족했다"며 "북측의 선수들 대부분이 개인기가 화려하고 응집력이 좋아 보였다"고 평가했다.

당시 북측 조선직업총동맹 중앙위 통일위원회 최창만 부위원장은 대회사에서 "오늘 축구경기는 자주통일을 열어나가는 의지와 단결을 힘있게 과시하는 경기로 통일운동사에 자랑스럽게 기록될 것"이라며 "오늘 경남 땅 창원시에서 단합의 함성이 온 삼천리에 길이길이 메아리치게 하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지희 민주노총 부위원장은 "99년 5월 1일 평양에서 처음으로 개최된 남북 노동자 통일축구대회 이후 빠른 시일 내에 통일축구로 만나자는 약속이 오랜 시간 지난 오늘, 남녘 땅 창원에서 이뤄져 실로 기쁘고 가슴이 벅차다"며 "또 하나의 역사적인 날로 만들어 내자"고 말했다.

유재섭 한국노총 수석부위원장은 "99년 남북 노동자 통일축구대회가 남북노동자의 연대연합의 물꼬를 튼 기폭제라면, 오늘은 단결과 단합의 폭을 확대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며 "높이 높이 응원하자. 창원, 경남을 넘어 평양까지 다다르도록 응원하자"고 외쳤다.

이 대회의 정식 명칭은 '6.15공동선언실천을 위한 5.1절남북노동자통일대회'이며, 2017년 4월 29일부터 5월 2일까지 경남 창원에서 진행됐다.

이 대회는 1999년 8월 14일 평양 양각도축구경기장에서 처음으로 열린 '통일염원남북노동자축구대회'이후 8년만에 치뤄지는 남북 노동자 체육교류 행사였고, 남쪽에서는 처음으로 진행된 계층 부문 남북공동행사였다.

▲ 1999년 남북 노동자 통일축구대회를 합의한 베이징회담 10주년을 맞아 민주노총이 기념행사를 갖고 노동자 축구대회가 '6.15공동선언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평가를 했다. [자료사진-통일뉴스]

1999년 8월 첫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

1999년 8월 13일 평양 김일성경기장에서는 남과 북의 노동자 축구선수들이 '연대'팀과 '연합'팀으로 서로 혼합 구성해 '남북노동자연대연합 통일축구경기'를 펼치고 전날에는 양각도축구경기장에서 '통일염원 남북노동자축구대회'를 개최했다.

북측의 열기는 대단해서 12일 양각도축구경기장에는 3만여명 규모의 관람석을 평양시민들이 꽉 채운채 TV 생중계로 경기가 진행됐다. 폭우가 내리는 가운데 북측이 전반전에만 5골을 넣었지만 후반들어 하늘이 개이면서 민주노총 팀이 분전해 4골을 따라잡았지만 결국 5:4로 북측이 승리했다.

다음 날 김일성경기장에서 '민족의 자주와 대단결을 위한 99통일대축전 10차 범민족대회' 개막식에 이어 남북혼합팀을 구성해 벌인 전후반 각 30분 경기에서는 남과 북이 약속이나 한듯이 4:4 동점으로 체면을 살렸다.

경기장에서는 앞 사람의 어깨를 잡고 다른 한손을 흔들며 '조국통일'을 외치면서 달리는 '통일열차' 놀이가 한창이었고 평양의 연도에는 시민들의 환영과 배웅의 물결이 넘쳤다.

이 대회를 위해 민주노총은 그해 3월 이규재 당시 부위원장 겸 통일위원장, 조준호 당시 금속노조 통일위원장이 베이징에서 조선직업총동맹(직총)을 만나 통해 대회 개최를 합의하고 이후 후속협의를 위해 7박8일의 일정으로 평양을 방문했었다.

구속을 무릅쓴 방북이었지만 이때 이규재 부위원장과 리진수 조선직총 중앙위 부위원장의 서명이 담긴 합의로 인해 '남북노동자축구대회' 개최가 현실화되고 이듬해 역사적 남북 정상회담과 6.15공동선언문 발표로 이어지는 계기가 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노동자통일축구대회, 6.15공동선언 발표 계기

베이징 회담 10년을 맞아 지난 2009년 3월 3일 민주노총이 발표한 '6.15공동선언의 밑거름, 남북노동자 첫 상봉 10돌 민주노총 특별성명'에는 "1999년 상반기 발생한 서해교전의 긴장을 완화하며 6.15공동선언 발표의 대중적 토대가 된 통일염원남북노동자축구대회의 성사를 비롯해 남북관계의 고비마다 민족의 화해와 단합의 밑거름으로 때로는 견인차로 역할해왔다"는 각별한 언급이 있다.

민주노총은 성명에서 "이명박 정권의 등장아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남북갈등 남남갈등을 부추기는 반민족적이며 반민중적 반노동자적인 정책들이 쏟아 부어지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남녘 노동자들의 자주적이며 민주적인 노동조합운동의 구심체인 민주노총은 8천만 온 겨레의 한결같은 염원인 나라의 평화와 통일, 6.15자주통일시대의 완성을 위해 앞으로도 더욱 힘차게 헌신투쟁해 나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북측 직총도 이때 축사를 보내와 "돌이켜보면 북과 남의 노동자들의 뜨겁게 손잡고 연대 단합의 첫발걸음을 뗀 그날부터 지난 10년간 북남노동자통일운동은 6.15공동선언의 기치밑에 민족적 화해와 단합을 도모하고 나라의 평화를 수호하며 겨레의 통일진군을 추동하는 애국운동으로 강화 발전해 왔다"고 의의를 부여했다.

1999년 평양에서 열린 첫 번째 남북 노동자 통일축구대회로부터 8년이 지나 2007년 창원에서 두 번째 노동자통일축구대회가 열렸고, 그로부터 8년이 지난 2015년 올해는 광복 및 분단 70년을 맞아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가 추진되고 있다.

지난해 인천아시안게임 당시 1천여명으로 구성돼 각 경기장을 누비며 통일응원을 펼쳤던 민주노총 응원단 '아리랑'이 16년전 본격화된 열망에 힘입어 남과 북 노동자의 합창으로 결실 맺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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