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출처-Daum영화]

남자는 불법 이민자다. 아프리카 세네갈 출신의 그는 다른 외국인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프랑스 드림을 꿈꾸며 이 나라에서 버티고 있다. 고향에는 애타게 그의 송금을 기다리는 부모와 형제들이 있고, 합법적인 이민자로 큰 레스토랑의 요리사가 되어 프랑스에 정착한 삼촌처럼 되는 것이 그의 꿈이다.

그가 정식으로 보조 요리사가 된 날, 그는 체포된다. 거주권 신청이 거부되면서 국외 추방을 통고받게 된 것이다. 프랑스에 체류한 지 10년이나 되었지만, 접시닦이부터 시작하여 공들여 쌓아온 10년 세월은 한순간에 수포로 돌아간다.

여자는 대형 헤드헌팅사의 고위직 간부이다. 능력 있는 커리어 우먼으로 잘 나가고 있었다. 끊임없는 경쟁과 성과주의 속에서 하루 12시간씩 미친 듯이 일만 하며 살아왔다. 어느 날 그녀의 전쟁터에서 그녀는 폭발해 버렸다. 스스로를 방전됐다고 표현하는 그녀는 분노를 조절할 수 없으며 무력감과 우울증으로 병원 신세를 진 끝에 치료의 일환으로 시민단체에서 자원 봉사를 하게 된다.

경찰서에 구금된 불법 이민자를 구해 내고, 인종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말도 안 통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애환을 상담해 주며 심성 수련을 하는 것이 그녀의 사회 복귀를 위한 처방인 셈이다.

▲ [사진출처-Daum영화]

영화는 인종도 다르고 성별도 다르고 직업도 다르고 사회적 지위도 달라 평생 단 한 번도 마주칠 것 같지 않은 이 두 사람을 이민자 지원 센터에서 엮이게 한다. 난생 처음 해보는 일에 난생 처음 접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으로 어색하고 긴장된 앨리스의 첫 고객 삼바.

그런데 이 억세 보이는 세네갈인은 잔뜩 얼어 있는 그녀를 부드럽게 풀어 주는 의외의 면모를 보인다. 그리고 앨리스는 스스럼없는 태도를 지닌 이 낯선 남자의 건장한 체격과 흉터 많은 등을 본의 아니게 훔쳐보게 된다. 삭막하고 황폐한 삶에 지친 그녀가 처음 삼바에게 끌린 이유는 삼바에게서 느껴지는 낯설지만 거칠고 강인한 생명력 때문이 아니었을까.

바르고 성실한 삼바는 누구에게나 배려 깊고 친절한 성품을 지녔다. 그래봤자 그는 프랑스 사회의 최하류층, 가진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이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는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 중 한 명에 불과하다. 불법 체류자가 되면서 그는 체포, 구금, 그리고 쫓기는 자의 생활을 한꺼번에 경험하게 된다. 사람 많은 곳을 피하고, 양복에 코트를 걸치고 프랑스인 흉내를 내면서, 위조한 신분증으로 일용직을 전전한다.

사정 모르는 고향집에서는 네가 우리집 기둥이라며 송금을 재촉하고, 자신은 늘 경계심에 가득차서 도망치고 숨어다니는 처지. 무엇보다도 먹고 살기 위해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닥치는 대로 해야 한다는 것이 그를 점점 지치게 한다. 설상가상으로 친구의 여자와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어 버린 그는 뒤늦은 후회와 자신의 흐트러진 모습에 대한 자책감으로 심사가 괴롭다. 앨리스의 호감이 그에게 한 줄기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 [사진출처-Daum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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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두 사람의 관계를 우정이라고 내세운 것은 감독의 전작 <언터처블: 1%의 우정>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삶에 지친 두 남녀가 자연스럽게 가까워지는 과정은 우정이라기보다는 사랑에 가깝다. 그러나 우정이든 사랑이든 그것이 뭐가 중요하랴. 남녀 사이에 우정과 사랑의 경계는 무 자르듯 딱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우정이든 사랑이든 그 바탕을 이루는 것은 서로에 대한 이해와 교감일 것이다.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두 남녀가 각자의 삶에 지쳐 있을 때 서로의 존재가 위안이 된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줄 것이다.​

▲ [사진출처-Daum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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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가 ‘무한 걱정 의욕 제로’라는 영화의 카피는 반만 맞는 말이다. 걱정은 삼바의 몫이다. 그녀는 사막 같은 현실 속에서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주체할 수 없는 분노와 무력감 사이를 오가고 있고, 일하거나 미치거나 둘 중 하나인 대인 관계 속에서 극도로 위축되었다. 자신의 스토리에 귀기울이는 삼바의 따뜻함과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그와의 관계에 대해 그녀는 다른 데서 얻지 못한 ‘편안함’을 느낀다.

‘무한 긍정 대책 없는’이라는 삼바에 대한 카피도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두 사람의 다름을 부각시키기 위해 대비적 표현을 쓴 것이겠지만, 삼바는 낙천적인 사람이 아니다. 그냥 잘 견디려고 노력할 뿐이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고, 다행히도 그는 성실하고 속이 깊은 사람이라 타인의 감정을 헤아리며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줄 알기 때문이다.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살아가야 하는 불법 체류자가 되어 그가 자신의 정체성에 회의를 느낄 때,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한 악다구니 속에 자신의 존엄성을 상실해 갈 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기대어 오는 앨리스에게 그는 ‘특별함’을 느낀다.​

▲ [사진출처-Daum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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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결핍된 영역을 채워 주며 다른 세계가 소통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나는 오랜만에 편안한 느낌으로 영화를 보았다. 특히 이 ‘다름’이 외국인 노동자의 현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은 특별하다. 오늘날 세계의 지리적 경계는 허물어졌지만 국가의 장벽은 더욱 높아졌다.

프랑스가 관용의 나라라 한들 외국인 노동자의 처지는 어디나 크게 다르지 않다. 온갖 궂은 일을 하는 무시할 수 없는 노동력으로 프랑스 경제의 한 귀퉁이를 떠받치고 있지만, 끊임없이 잠재적 위험 요인으로 간주되고 경계의 대상이 된다.

합법 이민자로 안정된 일자리를 가지고 그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고 생각한 삼바의 삼촌조차 자신의 잘못과 상관없이 경찰 조사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바로 해고된다. 이 나이든 세네갈 요리사는 재취업을 기대할 수 없는 현실에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밖에 없다.

그들은 영원히 그 사회에 귀속될 수 없는 타자로 취급된다. '웰컴'이란 제목은 다문화사회를 표방하는 우리의 현실을 곱씹어 보게 한다.

▲ [사진출처-Daum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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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결말은 해피엔딩인가? 여전히 대인 관계에 두려움을 느끼고 직장 복귀에 자신이 없는 앨리스에게 삼바의 존재는 행운의 주문 같은 의지처가 된다. 자신의 실수가 불러온 커다란 비극으로 삶이 뒤엉켜 버린 삼바는 앨리스가 아니었다면 평생 자책감과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는 재기 불능의 인간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앨리스가 언제 또다시 방전되어 폭발해 버릴지는 알 수 없고, 언제까지 앨리스가 삼바의 인생 무게를 나눠 져 줄지도 알 수 없다. 물론 삶이 가혹하다 할지라도 둘의 처지가 다르니만큼 그림자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삼바의 삶은 어떤 경우에도 해피엔딩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전쟁 같은 현실에서 각자의 삶을 견뎌야 하는 두 사람이 서로의 인생에 건넨 손은 그래도 현실의 숨통을 틔워 주는 작은 위안이 된다. 그들의 만남이 가능했던 배경이 이민자 센터임을 생각한다면 사랑 또는 우정의 다른 표현은 연대가 될 것이다.

법대생 인턴 사원이나 자원 봉사를 하는 이들이 이민자의 애환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장면이나 이민자들과 격의 없이 어울려 삶의 소중함을 나누는 파티 장면이야말로 “너무 다른 우리,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라는 영화의 카피와 딱 들어맞는다.​

▲ [사진출처-Daum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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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곰곰이 생각했다. 진짜 ‘무한 긍정 대책 없는 불법 거주남’인 삼바의 알제리인 친구와 이민자 센터의 법대생 인턴 사원의 연애, 불법 체류자 삼바와 대기업 간부 앨리스의 사랑, 이게 가능한가? 이거야말로 신데렐라 스토리 아닌가? 잘나가는 프랑스 본토 여자를 잡은 세네갈인과 알제리인은 당연히 “땡 잡았네!”를 외쳐야 하지 않은가?

연애를 결혼과 연결시키고 결혼은 곧 신분 상승의 유력한 수단이라는 인식이 암암리에 퍼져 있는 우리의 결혼 문화에 비해, 결혼보다 동거가 많고 혼외출산 비율이 50%가 넘는 프랑스의 문화 풍토가 사랑의 순도를 높이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속물적 결혼 풍토를 보건대, 적어도 두 사람의 애정이 결혼이라는 사회적 승인 과정에서 독립해야 전적으로 서로에 집중하는 애정 관계가 형성될 수 있지 않을까. 씁쓸한 상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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