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규섭/백물도/디지털회화/2015. [자료사진 - 심규섭]

백물도 연작 중에 3번 째 그림이다. 이로써 장승업 백물도를 새롭게 변주한 백물도 연작을 완성했다.
이번 백물도에는 솥과 벼, 소쩍새, 청동향로, 마늘, 장미, 국화, 먹과 벼루, 주전자, 탁자, 술병과 술잔, 주전자 따위의 사물을 그렸다.
이런 사물들은 모두 인간의 삶과 밀접한 관련을 맺은 나름의 상징을 가지고 있다. 굳이 문자유희나 생태적 상징을 활용하지 않더라도 직관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다.
백물도에 나오는 모든 사물은 생명의 풍요와 관련이 있다. 생명의 가치를 높이는 의미가 직관적으로 들어가 있다는 말이다.

국화는 군자의 꽃이고 먹과 벼루는 학문의 상징이다. 학문을 통해 인격적 완성체인 군자를 지향하는 것은 생명의 가치를 높이는 일이다.
또한 술병과 술잔은 풍류의 상징이다. 술은 욕망을 부추기고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시름을 달래고 긴장을 이완시키는 역할도 동시에 한다. 우리그림에서 술은 지조와 절개를 지키는 어려움을 달래고 작은 것에도 만족하는 풍류의 상징으로 사용한다.
주전자는 사람살이에 필요한 물건이고 청동향로는 불교의 상징이 아니라 부유함의 상징이다.
부귀의 의미에는 개인적인 가치와 공동체의 가치가 혼재되어 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부귀는 반사회적이다. 한정된 물질재부를 놓고 특정한 개인이 독식하면 다른 사람들은 굶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의 생명을 높이기 위한 재부의 독점은 다른 생명을 훼손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공동체 차원에서의 부귀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잘 사는 일이라 생명의 가치를 높이고 확장하는 역할을 한다.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모든 사람들이 풍요를 얻기 위해서는 생산력이 높아야 한다. 생산력을 높이는 방법은 개인의 창조적인 능력과 더불어 사회구성원들의 유기적인 협력체계가 전제된다.  
마늘은 우리민족의 음식이자 향신료라고 할 수 있다. 단군신화에도 나오고 남자들에게는 정력음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음식에는 마늘이 들어간다. 일본인들의 몸에는 간장냄새가 나고 미국인들 몸에는 노린내와 같은 고기냄새가 나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마늘냄새가 난다고 한다. 사람의 몸에서 나는 냄새는 무언의 소통을 만들어낸다. 어떤 동물들은 냄새만으로 새끼를 찾아내기도 한다. 마늘냄새로 동포를 알아보는 것이다.
장미는 서구에서 축복, 사랑, 은총 따위의 상징을 가지고 있다. 조선시대의 장미는 장춘화라고 해서 장수와 회춘의 상징이다. 젊게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은 누구나 가지고 있고, 이것은 생명활동의 활기와 폭을 만들어내는 상징이다.
  

▲ 장승업/백물도/종이에 수묵담채/조선 말. [자료사진 - 심규섭]
 
▲ 심규섭/백물도/디지털회화/2015. [자료사진 - 심규섭]

장승업의 백물도는 수묵으로 사물의 형태를 잡고 그 위에 엷은 채색을 한 것이다. 이에 반해 아래의 그림은 진한 채색을 한 그림이다. 진한 채색이 들어가면 그림이 화려해지고 선명해진다. 무엇보다 각 사물의 존재감이 강해진다. 전체적인 구도는 비슷하지만 각각의 사물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주했고 위치도 조금 바꿨다. 사물은 주변 사물의 색이나 질감, 크기, 모양 따위에 영향을 주고받는다. 이 때문에 자잘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오른쪽의 커다란 향로는 솥으로 바꾸고 책과 복주머니, 꽃신, 마늘, 장미, 가지, 감 따위를 추가했다.
이렇게 장승업의 백물도를 변주한 것은 백물도를 완성한 장승업에 대한 존경의 표시이다.
 
원래 장승업의 백물도에는 없지만 솥을 넣었다. 솥은 밥을 짓는 그릇이다. 밥은 곧 생명의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상징의 총화이다. 생명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생명을 먹는 모순을 가지고 있다.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생명의 순환이라는 관점이 필요하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은 다른 생명을 먹으면서 동시에 먹이가 되는 것이다. 
솥의 상징성을 높이기 위해 솥 안에 벼를 넣었다. 또한 솥의 바닥에는 불이 지펴져있는 느낌을 만들었다. 모두 상황적 해학을 만들기 위함인데 이런 장치는 감상하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이야기꺼리와 시각적 즐거움을 준다.
약간은 특이하게 솥뚜껑 위에 소쩍새를 넣었다. 알다시피, 소쩍새는 부엉이의 한 종류이면서 ‘소쩍~ 소쩍~’하는 소리를 낸다. 어릴 적 시골에서 할머니에게 소쩍새는 솥이 적다고 운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솥이 적다는 말은 밥을 할 쌀이 넘쳐난다는 말이니까 풍요를 상징한다.
처음에는 물총새를 그려 넣었다가 나중에 소쩍새로 바꿨다. 내용적인 면에서 물총새보다는 소쩍새가 솥과 더 연관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쩍새를 선택하는 과정은 꽤 복잡했다. 내용에서는 소쩍새가 적합하지만 조형적으로는 물총새가 훨씬 좋다. 소쩍새는 일단 못생겼고 표현하기가 복잡하고 까다롭다. 이런 고민에 빠진 작가는 당연히 조형적 가치가 있는 물총새를 선택한다. 하지만 상황적 해학을 가진 소쩍새를 포기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림을 완성할 때까지 새가 들어갈 자리를 비워두면서 고민을 했다는 것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이번 그림에는 매화를 그렸는데 그 위치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앞쪽 탁자에서 시작한 매화나무는 탁자보다 뒤쪽에 있는 술병 뒤로 그려져 있다. 확대원근법의 관점에서는 자연스런 배치이겠지만 원근투시법으로 보면 상당히 거슬릴 수도 있다. 확대원근법이든 원근투시법이든 간에 뭐든지 자연스런 구도가 좋다. 그럼에도 이런 배치를 넣은 것은 순전히 내용과 구도적 필요성 때문이다.
일단 매화를 선택한 것은 술병과 벼루 따위가 풍류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매화가 없는 술은 절제가 없는 것과 같다.
어쨌든 술병 앞으로 매화를 그리면 술병이 가려져 버린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뒤로 그려야 했다. 문제는 매화나무에 있다. 매화는 그야말로 나무이다. 그래서 좀 작은 사물을 그리는 백물도에 넣으려면 화병에 넣거나 괴석 뒤로 연결시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괴석은 앞선 그림과, 화병은 술병과 겹쳐서 배제했다.
또한 살아있는 나무를 잘라서 생명의 가치를 표현하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실제 국화나 장미도 다른 방법으로 그려볼까 하는 많은 고민을 했다.
그래서 매화나무를 자르지 않고 표현하기 위해 탁자 뒤로 시작점을 숨긴 것이다.  
결과적으로 매화의 표현은 능청스럽다. 얼핏 보면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시각적인 자극을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나뭇가지를 뒤로 늘여 술병 뒤에서 천연덕스럽게 피어있는 것이다.    

장승업의 백물도를 세 개로 나누어 그린 다음 다시 결합했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각각의 낱개 그림이기도 하고 연결된 하나의 그림이 되기도 한다. 그림에는 약 35 종류의 사물이 들어가 있다. 그러니까 한 점당 평균 10종 이상의 사물을 표현한 것이다. 들어간 사물도 소쩍새, 두꺼비, 잠자리, 꽃게, 전복과 같은 생물부터 수선화, 감, 장미, 국화, 산삼 따위의 식물, 청동향로, 도자기, 책상, 노리개, 복주머니 따위의 인공물까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세계의 어느 나라 그림에도 이렇게 다양하고 많은 사물이 하나의 그림에 표현되는 경우는 드물다. 만약 실제 사물의 크기에 준해서 그림의 크기를 정한다면 대략 3M에 이르는 대작이다.
또한 모든 사물은 생명가치와 풍요라는 상징을 가지고 있으면서 확대원근법과 조형적 해학에 따른 기발한 구도와 화면연출, 세밀한 사물의 채색과 표현을 통해 수많은 볼거리와 이야기꺼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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