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철 (서강대학교 공공정책대학원 교수)


‘세계를 시야에 넣고, 우리의 미래를 설계하는 책사(策士)되기’

1970년 11월 13일 청계시장 한 복판에서 한 청년이 자신의 몸에 불을 당기고 분신하였다. 그의 이름은 전태일이었다. 그는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채로 독학으로 근로기준법을 공부하면서 노동자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애쓰다 쓰러졌다. 그가 했다는 ‘나에게 대학생 친구가 한 명이라고 있었다면....’이라는 말은 배우지 못한 채 홀로 독학을 하며 어려운 법조문을 한 자 한 자 읽어가야 했던 자신을 책망하는 말이자, 세상의 지식인을 향한 의미심장한 경종의 외침이라 할 수 있다. 전태일의 분신에는 사회적 약자에게로 향하지 못했던 지식인도 절반쯤은 책임이 있지 않았을까?

시대를 거슬러 1910년 8월 29일, 비록 고종황제가 끝내 승인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일본이 대한제국을 합병한 경술국치에는 어땠을까? 당시 열강의 한반도 침략이 하루가 다르게 이리저리 형세를 바꾸어가며 진행되던 시기, 세계를 시야에 넣고 한반도를 둘러싼 각 국의 이해관계를 냉철하게 분석하여 대책을 세웠던 이가 있었을까?

고종도 아마 ‘나에게 세계를 독해할 수 있는 책사가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하는 회한을 품었을 법하다. 경술국치 역시 힘없는 국력의 결과이지만, 거기에 단단히 한몫 했던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상당한 책임이 있지 않을까? 요즘에야 그러한 지식인의 분열을 ‘당쟁’이라 부르기도 하고, 친일파, 친미파, 친러파, 친중파 등등으로 이름하지만, 국제적인 시야를 상실하고, 눈앞의 이익에만 민감했던 속 좁은 사익 추구란 측면에서 공통적이라 하겠다.

오늘날 한반도를 둘러보면 고종이 느꼈을 것 같은 감정과 유사한 느낌을 받게 된다. 도대체 우리나라는 어디로 가고 있으며, 북한은 무엇을 꿈꾸고 있고, 우리를 둘러싼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는 어떤 생각으로 한반도에 발을 걸치고 있을까? 이런 질문들에 대해 아직까지 속시원한 해명과 분석을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어쩌면 이러한 질문은 계속 우리를 괴롭히는 질문일 것이고,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가는 것이 끝나지 않는 지식인의 책무가 아닐까 한다.

물론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시야가 한반도에 갇혀있어서는 안되고, 더욱이 한반도 남단의 좁은 울타리에서 이편저편의 편협한 정치적 이익에 휘둘려서는 안 될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특히 지식인은 툭하면 뱉어내는 외국어로 된 화려한 개념을 통해 우리의 현실을 정치적 이해관계의 틀에 가두어놓고 한반도를 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더욱이 우리는 지난 70년 동안 이러한 사고방식에 아주 익숙했다.

분단선에 갇힌 섬나라와 다를 바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대륙적 사고는 고사하고, 한반도 전체를 시야에 넣고 철학과 역사를 논하지 못해왔다. 세계사는 잘 알았지만 한반도 북단까지를 포함하는 우리의 역사와 철학 탐구, 전한반도적 사고, 전체로서의 관점은 부재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이나 일본의 눈을 통해 특히, 미국의 눈을 통해 한반도를 바라보고, 한반도의 미래를 설계하고, 한반도의 통일을 상상해왔다. 이래서는 고종이 갈망했을지도 모를 ‘세계를 시야에 넣고, 우리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었던 책사되기’는 결코 불가능할 것이다. 너무 과장된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이것이 사실에 가까운 ‘현실’이 아닌가 한다.

한반도가 중심이 돼 동북아 정세 흐름을 주도할 수 있을까?

한 권의 서평에 이렇게 긴 서두를 앞뒤 문맥도 없이 갖다 붙인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책 속의 내용을 이리저리 뜯어보고 설명하는 서평을 쓰는 것보다 더 절실하게 다가온 감상이기 때문이다.

▲ 『이찬우 교수의 한반도 평화경제론 -동북아의 심장을 누가 쥘 것인가』(역사인) 표지. [자료사진 - 통일뉴스]
이찬우 교수가 펴낸 『동북아의 심장을 누가 쥘 것인가』는 어려운 이론도 없고, 요란한 각주도 없이 마치 동북아시아 이곳 저곳을 둘러보고 여기에 한반도의 이러 저러한 사회 현상을 뜯어보면서 무협지에서나 나올 법한 ‘용’, ‘여의주’, ‘등골’, ‘숨통’ 등의 용어를 통해 각 국가의 이해관계와 우리의 과제를 서술하고 있다. 책의 내용도 마지막 대담을 합쳐 대략 270페이지 내외 밖에 되지 않는다. 중간 중간 이해를 돕는 지도와 도표와 그림이 있어서 하루 몇 시간만 투자하면 끝을 볼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이 단순한 책에서 너무 거창한 감상과 무거운 주제를 뽑아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평소 내 스스로도 그렇지만, 우리의 지식인들이 세계를 논하면서도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시아의 지정학에 대해서는 너무나 쉽게 이데올로기적 해석이나 아전인수식 해석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북한을 포함한 우리의 문제를 너무 지나치게 북한의 ‘운명’(북한의 붕괴, 변화 등)으로 귀착시켜 사고하는 것을 목도하면서 느끼는 문제점 때문에 더욱 위와 같은 감상을 무겁게 느끼고 있는지 모르겠다.

저자인 이찬우 교수는 일본에서 활동하면서 지금은 일본 테이쿄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지난 25년 동안 멀리 몽골부터 중국 동북3성, 일본, 그리고 한국을 수 없이 오고갔다. 이러한 답사와 연구를 통해 이 교수가 주장하는 핵심은 지극히 단순하다.

오늘날 중국의 부상에서 볼 수 있듯이, 동북아시아 지역은 세계 경제의 핵심 발전지역이 되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중국과 미국의 지역적 이해관계의 충돌이 앞으로 더 강화될 것이다. 여기에 일본은 미국 편으로 확실히 기울어지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그런 미국을 견제하고 있고, 우리는 이명박 정부 시절 미국 편으로 완전히 기울어졌다. 중국과 북한은 협력관계를 강화하고 있고, 러시아도 그러하다.

그러나 이러한 정세 흐름은 한반도에 그리 바람직한 방향이 아니다. 단지 강대국에 의한 남북한의 의존적 관계의 지속이자, 그 틀에 갇히는 것이다. 동북아시아에서 우리가 이니셔티브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이 책의 표현이라면, 여의주가 되기 위해서는, 나아가서는 숨통을 쥐기 위해서는) 남북의 평화 및 경제협력이 필수적이다. 남북의 협력은 평화와 경제적 번영을 넘어, 자주적 권리의 회복이자 동시에 지역협력의 올바른 추진이라는 것이다. 이게 한반도가 하나 될 때 나타나는 힘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핵심 주장에 등장하는 키워드는 평화(peace), 발전(development), 자주(independence), 지역협력(regionalization)이다. 오늘날 동북아시아를 표현하는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발전이라 할 것이다. 전 세계 지도를 놓고 보면 중동 지역과 더불어 가장 긴장도가 높은 지역이지만, 한편으로는 지역 협력체가 존재하지 않는 거의 유일한 지역이다.

그런데 발전의 결과 오늘날 중국은 세계를 미국과 더불어 지도하는 대국의 지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여전히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하는 일본이 존재하고 있으며, 자원부국으로 새롭게 강한 러시아를 표방하는 러시아 극동이 자리하고 있고, 또 다른 자원부국이지만 아직은 힘에 부친 몽골이 있다. 또한 지리적인 범주를 벗어나 동북아시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바로 미국이다. 여기에 동북아시아의 가장 뜨거운 감자라 할 한반도가 위치하고 있다.

저자의 주장은 이 동북아시아 지역에 한반도는 마치 용의 여의주에 해당한다고 본다. 그런데 한반도가 ‘용의 여의주’가 되기 위해서는 남북의 협력이 정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동북아 각 국의 책략과 이해관계 분석

이 책의 제1부는 주로 현재의 동북아시아 각 국가의 이해관계에 대한 분석을 담고 있다. 중국의 부상으로부터 시작하여, 러시아의 극동지역, 한반도와 몽골, 그리고 일본까지 여기에 앞으로의 중국의 책략과 미국의 책략을 덧붙이면서, 이 상황에서 남북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결론은 남북한의 경제가 균형성장하는 것, 혹은 남북의 경제협력과 공동 번영이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담보하고, 지역 협력도 올바르게 추진해 나갈 수 있는 길임을 지적한다.

여기에서 핵심은 한반도가 역동적인 동북아시아에서 ‘여의주’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남북의 정치적 화해와 경제공동체 구축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이명박 정부 시절의 남북관계의 악화와 겨우 숨통만 붙어있는 개성공단의 현실은 이러한 동북아시아의 역동성에 정확히 역행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오늘날의 박근혜 정부에서도 별반 달라지지 않고 있는 이 구조는 미국의 동북아시아에서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며, 이들의 궁극적인 혹은 최선의 시나리오인 한반도 분단의 현상유지에 기여하는 것이다.

현재 이러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곳이 바로 일본이다. 미국의 중국 포위 전략으로 완전히 경사된 일본의 오늘날은 결국 자주적이지도, 평화지향적이지도, 그리고 한반도의 통일에 기여하지도 못하며, 퇴행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미래를 예고한다고 한다.

제1부가 주로 현재의 동북아시아 지형에 대한 분석이라면, 제2부는 과거에 대한 성찰을 통해 더욱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2011년 합의된 중국과 북한의 공동 경제특구 개발 즉, 일구양도(一區兩島) 구상 등에서 볼 수 있는 중국과 북한의 경제전략에 대한 설명은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해석인 북한의 중국 ‘동북4성’화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 잡아주고 있다. 역시 북한이 의욕적으로 추구했던 신의주 특구개발의 좌절은 북-중간의 협력이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의 치열한 국가 이익이라는 냉철한 논리가 관철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과거의 경험을 통해 저자는 북한과 중국의 관계를 크게 3가지의 관계 즉, 당 대 당의 관계, 국가 대 국가의 관계, 그리고 지정학적인 접경지역의 관계로 보아야하며, 이 중 가장 기본적인 관계는 ‘당 대 당의 관계’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복합적인 관계를 종합적으로 보아야하며, 동시에 오늘날의 기본적인 관계를 봐야만 북-중간의 기본적인 흐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제2부는 이처럼 북-중관계를 기본적으로 살펴보면서, 오늘날 일본에서 나타나고 있는 국수주의적 민족주의에 대한 우려, 그리고 동북공정에 대한 시론적 생각 등을 담고 있다.

주목되는 것은 마지막 대담을 통해서 오늘날 북한에서 나타나고 있는 여러 가지 다양한 경제 개선 조치와 현상에 대해 검토한 대목이다. 사실, 제2부에서의 서술은 우리가 바라보는 북-중관계에 대한 일면적 분석에 일침을 놓고 있는 것이 중심 내용으로 다가온다. 보수가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예를 들면, 북-중의 당 대 당 관계), 아니면 보수가 쳐놓은 울타리에 스스로가 갇혀있거나(예를 들면, 북한 경제의 중국 의존론, 일명 중국 역할론 vs 중국견제론: 중국 역할론은 대체로 보수의 입장이며, 중국 견제론은 진보의 입장이다) 하는 문제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북한이 중국의 기업에 토지 사용 50년 임대권을 주었을 때, 이를 우리는 북한 경제의 중국 종속화로 해석한다. 그렇다면, 우리 기업이 중국으로부터 토지 50년 임대권을 얻는다면 그렇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이런 예를 통해 우리가 북한에 대해 바라보는 시각, 그리고 북-중관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지극히 남한 중심적이거나 북한에 대한 우월적 시각이거나 주관적 희망(흔히 말하는 wishful thinking)에 사로잡힌 시각에 불과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지금도 우리는 북-중 관계를 한번도 대등한 관계로 인식한 적이 없다. 물론 이것은 국력의 대등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관계의 대등함이다.

이 책은 대체로 2012-13년까지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북-중간의 경제협력에서도 마치 금방 진행될 것 같았던 나진-선봉(라선시), 황금평, 위화도에 대한 공동 개발과 관리가 아직도 눈에 보이는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오히려 최근에는 북한과 러시아 간의 경제협력이 눈에 띄게 두드러지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를 중국을 제치고 러시아가 북한과의 협력을 통해 동북아시아의 변화를 주도하는 형국이 되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변화무쌍한 국제관계의 현실을 생각하면 이러한 변화는 당연한 것이라 할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지금’의 상황까지는 담고 있지 못하다. 그렇지만 이러한 내용이 담겨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 책의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 책이 주장하는 동북아의 기본 틀이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중국, 러시아 그리고 미국과 일본, 여기에 한반도가 놓여있고, 이들이 만들어 가는 구조적 관계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동북아 정세인식의 기본틀과 사고의 전환

우리는 한반도 특히 북한과 관련된 현상의 조그마한 변화에도 극히 민감한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러한 민감함은 대체로 주관적 희망이 투영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북한과 중국의 관계 소원–북한 경제의 어려움–북한의 고립화 심화–북한의 도발적 행동 혹은 양보’ 등과 같은 우리 자체의 시나리오를 그리거나 혹은 ‘북-중관계의 소원–북한의 위기–중국의 대북한 압박 강화(한중 관계 강화를 통해)-북한의 변화’ 등을 상정한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시나리오는 한반도 실현된 적도 없지만, 북한과 중국의 생각을 전혀 고려치 않은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오히려 우리의 외교적 고립이나 역량 약화만을 초래했다. 대표적으로 이명박 정부 시절 한미동맹 우선, 대북 강경책 등이 한중관계의 약화를 초래했고, 남북관계를 망가뜨렸으며, 결국 한반도에서의 우리의 발언권을 약화시켰던 것을 기억하면 될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우리의 익숙한 사고방식에 대한 비판, 시야를 동북아시아로 넓혀 한반도를 바라볼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비록 시기적으로 ‘지금 이 시간’까지를 담고 있지는 않지만, 이러한 구조와 관점에서 한반도를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할 것이다.

우리는 지난 70여 년간 대륙과 해양을 넘나들며 한반도의 위치를 사고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데에서는 익숙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반도에 갇힌 사고이거나 아니면 미국의 시각(혹은 서구의 시각)으로 한반도를 바라봐 왔다. 이제는 이러한 사고에서 벗어나야 할 때가 되었다. 또한, 한반도만의 국가주의적(혹은 편협한 민족주의적) 사고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세계를 시야에 넣고, 동북아시아를 시야에 넣고 한반도를 논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오늘날을 고민하는 지식인의 책무라 할 것이다.

이 책은 많은 내용을 담고 있지 않으며, 특별한 이론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그저 동북아시아를 시야에 넣고 한반도 문제를 종합적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여기에 저자 자신의 남북 화해와 협력, 평화와 지역공동체의 발전이라는 바람이 담겨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동북아시아를 시야에 넣고 한반도를 그려보고자 하는 연구자들에게, 그리고 남북의 화해를 바라는 일반 독자에게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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