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의 시작과 끝은 인물화이다.
서양화에 입문하는 사람은 인물화를 가장 먼저 배운다. 초급자들이 입시학원에서 석고상 따위를 그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시대에 걸맞은 인간상을 표현할 때 화가의 작품세계가 완성된다. 현대미술에서 인물화는 길거리 초상화로 대중화되었다. 또한 현대에는 다양한 형태의 인물화 작품을 그리지만 추상화되어 있거나 작품 속에 내재되어 있다. 이것은 인물이 작품 속에 대상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작가와 한 몸으로 결합하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사물의 조형성을 탐구하거나 내면의 상태를 표현하는 추상미술은 모두 인간의 가치를 표현한 것에 다름 아니다.

▲ 심규섭/백물도/디지털회화/2015. [자료사진 - 심규섭]

그렇다면 우리그림의 시작과 끝은 무엇일까?
산수화일까, 아니면 사군자 따위일까?
우리그림의 시작과 끝을 안다는 것은 우리그림의 전모를 이해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우리그림의 시작점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방법으로 우리그림을 배우고 익혀야 하는지 과학적으로 해명되지 않았다. 대부분은 스승에게 주먹구구로 배우는 도제방식에 의존해야 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그림의 시작과 끝은 [백물도百物圖]에 있다.
우리그림에 입문하는 사람들은 백물도를 먼저 배워야 한다. 또한 우리그림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궁중회화는 백물도의 총합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그림의 중심은 백물도이다.
혹시 산수화나 인물화가 아닐까 여기는 사람도 있다.
수묵산수화는 관념의 산물이다. 다시 말해 사물을 보지 않고도 그릴 수 있다는 말이다.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가 나오지 전까지 화가들은 남의 그림을 베끼거나 상상을 통해 산수화를 그렸다. 대부분의 산수화는 붓질의 기법인 준법(皴法)에 의존한다. 준법은 바위를 그리는 붓질, 숲이나 나무를 그리는 기법인 것이다. 하지만 기법은 그림의 기본기가 아니다. 그것은 수많은 표현방법 중에 하나일 뿐이다.
아무튼 먹과 붓, 한지를 이용하여 글을 쓰는 선비들에게는 익숙하고 편안할지 몰라도 전문화가의 입장은 조금 다르다.
만약 진경산수화를 그린다면 실제 풍경으로 보고 사생을 해야 한다. 풍경은 결국 나무와 숲과 바위와 물, 풀 따위의 결합체이다. 각각의 요소를 제대로 그리지 못하면 진경산수화를 그릴 수 없는 것이다.

우리그림에서 인물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그리지 않았다. 그래서 궁중회화 방식의 어진이나 공신들의 초상화를 빼고는 발전하지 않았다. 김홍도의 신선도나 풍속화에서 인물은 중심이 아니다. 인간 자체를 그린 것이 아니라 상상의 인물인 신선의 상징을 그린 것이다.
얼굴은 정신을 드러내는 역할이고 몸은 옷으로 가려버렸다. 그래서 우리그림 속의 인물은 인체해부학적으로 어설프다.

화조도나 십장생도, 책가도 따위도 결국은 각각의 사물의 결합일 뿐이다. 다양한 꽃이나 새, 풀, 학, 사슴과 같은 동물, 각종 나무, 책, 크고 작은 괴석, 골동품, 문방구 따위의 사물을 사생하고 표현할 능력이 있어야 가능한 그림이다.
시각예술을 담당하는 화가들은 사물에 대해 정확히 알아야 한다. 사물의 조형성을 이해하고 실물처럼 그려낼 수 있는 기량을 익히는 것은 화가의 기본 중에 기본이다. 각각의 사물을 수천, 수 만 번 이상 그려 체화시켜야 원하는 주제를 자유자재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동서양이 다르지 않다.

▲ 신사임당/초충도 병풍/지본채색/각 48.6x35.9cm/강릉시 오죽헌시립박물관. [자료사진 - 심규섭]

▲ 장승업/백물도/종이에 수묵담채. [자료사진 - 심규섭]

과거의 기록을 보면, 그림을 배울 때 가장 먼저 그리는 것이 괴석이라고 한다. 또한 선비들이 문인화를 시작할 때 그리는 매, 난, 국, 죽은 인물도 아니고 풍경도 아닌 그냥 사물이다.
신사임당이 그린 [초충도]도 사물을 그린 것에 다름 아니다. 단지 사람들이 작품 속의 소재를 보고 풀과 곤충을 그렸다고 말하는 것뿐이다.
신사임당은 생활 주변에 있는 사물을 꼼꼼하게 관찰하고 조형적 원리를 익혔다.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어찌 보면 신사임당은 우리그림의 시작점, 기본기를 익히는 방법을 제대로 보여준 화가라고 할 수 있다.

현존하는 작품만 놓고 본다면, 백물도는 신사임당, 김홍도로 이어진다.
장승업은 이런 백물도를 완성시킨 화가라고 평가할 수 있다. 
김홍도의 백물도는 구체적이지 않다. 인물을 부각시키는 요소로 활용하고 사물의 구체성은 떨어진다. 하지만 사물의 조합만으로도 좋은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오원 장승업의 활동 시기는 19세기 중, 후반이다. 이때는 서양화법과 전통화법이 적절히 결합하는 시기이다. 또한 백물도가 독립적인 작품으로 인정받는 시기이기도 하다.
장승업은 감각이 뛰어난 천재화가이다. 이론이나 화법을 정확히 알지 못해도 눈으로 본 것을 몸으로 체화시켜 작품에 반영하는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장승업의 감각에 의해 창작된 백물도는 서양화법을 적절히 수용하면서도 우리그림의 전통을 최대한 표현하고 있는 장점이 있다.

백물도는 모든 사물을 그린 그림이다.
여기서 사물(事物)이란 물질세계에 있는 모든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존재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그러니까 사물은 생물(生物)과 정물(靜物)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살아있는 짐승이나 식물을 포함해 사람이 만든 물건까지 아우른다.
또한 백물도의 내용은 생명의 가치, 즉 생명의 존엄, 생명의 확산과 발전, 생명의 풍요, 생명의 영속성 따위를 담고 있다.
그래서 우리그림에서 선택되는 사물에는 모두 생명과 관련한 직, 간접적인 상징이 붙어있다.
당연히 상징이 없는 사물은 그리지 않는다.

백물도의 소재를 살펴보면 이렇다.

첫째, 생명력이 풍부한 이상세계나 생명 자체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사물이 있다.
봉황, 용, 사슴과 영지의 결합, 학 무리, 거북, 소나무, 나비, 각종 곤충, 복숭아나무와 열매, 각종 꽃과 새가 있다.

둘째, 선비들의 자발적 청빈, 이상세계에 대한 학문적 가치를 지키고자하는 지조와 절개, 풍류와 유유자적을 상징하는 사물이 있다.
여기에는 생황, 거문고, 파초, 붓과 벼루, 책, 안경, 연적, 괴석, 매화, 학, 수선화, 국화, 대나무, 물고기, 참새, 까치, 난초 따위가 해당된다.

▲ 심주이/백물도/디지털회화/2015. [자료사진 - 심규섭]

셋째, 출세와 관련한 사물이다.
연꽃, 연과, 참게, 갈대, 쏘가리, 오리, 학, 사슴, 잉어, 원추리, 닭, 맨드라미 따위가 있다.

넷째, 부귀영화와 관련한 사물이다.
모란, 괴석, 골동품, 순무, 도자기, 불수감, 박쥐 따위가 있다.

다섯째, 장수와 다산과 관련한 사물은 연과, 산삼, 오리, 갈대, 새우, 영지, 석류, 거북, 장미, 불수감, 고양이, 나비, 부엉이, 목련, 포도 따위가 있다.

여섯째, 부부화목을 뜻하는 사물로는 조개, 원앙이 있다.

일곱 번째, 벽사의 상징으로는 호랑이, 까치, 닭, 개, 해태, 곶감, 눈 뜬 물고기 따위가 있다.

물론 각 사물에는 유학의 인문학적 가치와 백성들의 원초적 욕망을 담은 도교적 가치라는 이중의 상징이 결합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서로 다른 상징을 가진 사물이 결합하여 새로운 상징을 드러내는 경우도 많다.
이상적 가치든 원초적 생명력이든 모두가 생명의 가치를 높이는 것만은 틀림없다.

▲ 안보영/백물도/디지털회화/2015. [자료사진 - 심규섭]

백물도는 겉으로 보기에는 서양의 정물화와 비슷하다.
하지만 내용적으로 서양의 정물화가 죽은 사물을 그리고 조형성에 집착한다면 우리의 백물도는 생명의 가치를 표현하면서 살아있는 사물을 그린다는 차이가 있다.
특히 조형원리에서 정물화가 일인칭 원근투시법을 사용하는데 비해 백물도는 확대원근법의 조형방법을 사용한다.
이 조형원리 때문에 구도가 완전히 달라진다.
확대원근법의 조형원리는 여러 사람의 시점과 생각이 하나의 그림에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공동체의 시점인 것이다.

그림으로만 해석하면, 서양의 공동체는 영웅이나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피라미드 구조이다. 크고 중요한 사물을 중앙에 놓고 나머지 사물은 보조역할을 하거나 뒤로 가려지고 혹은 작아진다. 이런 화면배치는 삼각형 구도로 수렴된다. 삼각형 구도는 피라미드 형태와 동일하다.

우리그림에 나타난 공동체는 독립된 개인의 수평적 관계이다. 각각의 사물은 겹쳐지거나 뒤로 가려지지 않는다. 사물이 겹쳐지는 경우는 두 개의 사물이 짝을 이룰 때이다. 또한 공간의 효율적인 배치와 흐름을 만들기 위해 사물끼리 겹치는 경우도 전체의 3/1 이하이다. 어쨌든 작은 사물이라도 독립성을 유지한다. 각각의 사물이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유기적이고 통합적인 화면을 연출하는 배치방법으로 태극구도(S자 구도)를 사용한다.
이렇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공간이 넓어야 한다. 세로로 긴 그림은 위아래로 공간이 확장되고, 가로 그림은 양 옆으로 공간이 확장된다.

이런 구도의 원리를 바탕으로 규칙을 만들면 아래와 같다.

1)다양한 시공간을 통합하여 공간을 확장하면서 동시에 시간의 영속성을 창조한다.
낮과 밤, 계절이라는 시간을 한 화면에 통합하여 시간적 한계를 넘어선다. 물과 땅, 하늘과 땅과 같은 다른 공간을 한 화면에 통합하여 공간을 확장한다.

2)사물과 사물은 3/1이상 겹치지 않는다.
사물을 겹치지 않는다는 것은 각각의 사물에 독립성을 부여하는 일이다. 사물이 차지하는 공간을 앞뒤가 아니라 평면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앞쪽의 사물과 뒤쪽의 사물을 너무 많이 겹치면 곧바로 서양화방식의 구도가 되어 버린다.

3)사물의 조형적 특성보다는 쓰임새에 따른 조형성에 집중한다.
이를테면 술병을 그릴 때 윗부분은 동그랗게, 중간부분은 좌우대칭으로, 아랫부분은 바닥에 서있을 수 있도록 수평으로 그린다. 조형적 특성상 아랫부분을 둥글게 그릴 때 받침대를 이용하여 잡아준다.
주전자의 손잡이가 뒤로 가려서 보이지 않으면 주전자에 대해 제대로 알 수가 없다. 또한 도자기의 입 부분을 수평으로 그리면 둥근지 사각형인지 알 수 없다. 꽃을 그릴 때 줄기와 이파리을 함께 그리지 않으면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다. 그릇을 그릴 때 아랫부분을 수평으로 그려야 바닥에 세우는 물건인지 알 수 있다. 반대로 가마솥을 그릴 때 아랫부분을 둥글게 표현해야 어디에 걸쳐서 사용하는 물건인지 안다.
사물의 쓰임새는 사물이 인간과 관계를 맺는 방법이자 공동체의 합의이다. 쓰임새가 달라지면 모양도 달라진다. 음식을 요리하는 그릇을 모자로 사용하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에 위배된다. 이것을 특별한 상황이나 우스운 모습을 연출하기 위한 쓰임새이지 일반성은 아니다.

4)모든 사물에는 생명과 관련한 상징이 붙어 있다.
죽임, 분노, 좌절, 고통, 고독, 슬픔 따위와 같이 생명의 환희와 존엄과 무관한 상징이 들어가 있는 사물을 그리지 않는다.

5)모든 사물은 살아있는 상태를 그린다.
꺽은 꽃이라도 살아있는 느낌을 내야하고 게나 새우, 물고기를 그릴 때 물속에서 살아있는 상태를 고려하여 표현한다. 박제된 동물을 소재로 삼지 않는다. 더불어 생명을 억제한 분재도 제외된다.
움직이지 않는 사물, 인공적인 사물을 그릴 때는 쓰임새를 최대한 표현한다. 벼루와 먹이란 사물을 살아있게 만드는 것은 고유의 쓰임새가 가장 활발할 때이다.
이것은 백물도가 죽은 사물을 그리는 서양정물화가 아니라 생명의 풍요로움, 혹은 생명의 가치를 높이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6)조형적 해학이 들어가 있다.
조형적 해학은 그림 속에 맑고 순수한 웃음과 즐거움을 주는 조형적 장치이다.
우리그림은 사물 자체의 조형성에는 주안점을 두지 않는다. 조형적 해학은 사물 자체에 집중하는 것을 막아주면서 동시에 시각적 즐거움과 상상의 즐거움을 가져다준다.
조형적 해학에는 상황적 해학, 성적 해학, 구도적 해학이 있다.
전복과 같은 조개, 가지, 수세미, 연적, 복숭아열매, 잉어 따위는 자체의 상징도 있지만 성적 해학을 만들어낸다. 또한 다람쥐가 도토리에 욕심을 부리는 장면이나 새가 연과를 쪼아 먹는 장면, 벼루에 먹을 세운 모습, 가마솥의 바닥이 붉게 달궈져 있는 느낌을 내는 따위는 상황적 해학에 속한다.
구도적 해학은 사물의 특성이나 쓰임새를 최대한 드러내는 방법에서 나온다.
똑바로 서지 못하는 배추나 무를 세워서 그리는 경우, 불수감을 거꾸로 세워서 그리는 경우, 배추이파리에 무당벌레를 넣는 경우, 밤이나 석류가 벌어져 알갱이가 보이는 경우, 수박의 윗부분을 잘라서 붉은 속과 씨가 보이게 하는 경우, 괴석에 복숭아나무나 매화나무가 자라는 경우 따위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 모든 것은 우리그림의 조형원리인 확대원근법에 잘 맞는다.

▲ 최지솔/백물도/디지털회화/2015. [자료사진 - 심규섭]

7)사물과 사물의 연관성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각 사물은 독립성을 유지하며 자체 상징을 가진다. 작은 사물이라도 큰 상징을 위해 희생하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 물론 바늘과 실, 난초와 화분, 벼루와 먹, 책과 안경, 가마솥과 벼처럼 짝을 이루는 사물끼리의 결합은 상관없다.

8)각 사물의 특성에 맞는 사실성과 질감을 표현한다.
사물의 쓰임새와 상징성을 강조하다보면 형태나 질감이 극단적으로 간결하고 단순하게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사물이 가진 복잡한 형태를 꼼꼼하게 표현하고 미려한 채색으로 질감을 드러낸다. 향로나 골동품 같은 청동기의 부식된 녹을 그려 질감을 표현하고 그릇이나 책 포장의 문양의 세밀하게 그리는 일은 사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화가의 조형적 능력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그림은 백물도로 시작해 십장생도로 완성된다.
모두가 생명의 존엄과 가치를 담고 있는 인류보편적인 그림이며 동시에 확대원근법의 조형원리에 따라 개인의 개성과 독립성을 인정하면서도 공동체를 이루는 미래사회의 가치를 표현하고 있다.
이런 우리그림에 무한한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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