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우리그림에는 서양의 정물화와 같은 갈래가 없냐고 질문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질문에 서양의 정물화와 똑같은 그림은 없지만 여러 사물을 그린 ‘소과도’, ‘책거리그림’, ‘기명도’ 따위가 있다고 대답한다.
정작 돌아오는 대답이 가관이다.
“그런 그림을 정물화라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는데요.”

우리그림에서 소과도(蔬果圖)는 채소와 과일 따위를 그린 그림이다. 소과도라고 해서 반드시 채소나 과일만 그리는 것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도자기나 꽃이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
채소와 과일을 중심으로 그린 그림이 언제부터 시작되었고 어떻게 독립된 그림으로 정착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런 사물들은 아무래도 구하기기 쉽고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선묘연습이나 소묘능력을 키우기 위해 습작용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지금도 서양의 정물화나 동양화 입시학원에서 널리 통용된다.
조선 말기 별 상징이 없던 사물에 부귀, 장수, 출세, 화목 따위의 원초적 욕망을 담은 상징이 붙으면서 소과도가 독립된 그림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 심규섭/배추 백물도/디지털회화/2015.
배추, 복숭아, 감, 가지, 괴석, 밤, 책상, 찔레열매를 그렸다. 각각의 사물은 특별한 연관성이 없다. 하지만 이런 사물이 모여 생명의 풍성함을 드러낸다. 굳이 사물의 상징을 말하자면, 배추는 김치의 주요 재료인데 풍성한 우리음식의 상징으로 사용했다. 복숭아열매, 밤송이는 장수를 뜻하고, 괴석은 선비의 지조와 절개의 뜻이면서 동시에 부귀의 상징이다. 가지는 남성정력의 상징이고 감은 풍요의 뜻이다. 찔레열매는 별 뜻이 없지만 붉은 열매이기 때문에 벽사나 장수, 부귀라는 여러 의미로 읽힌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화면 연출을 위한 용도로 사용했다.
배추는 원래 땅에서 자라는 모습으로 서있고, 밤은 밤송이 안에 들어가 있다. 복숭아열매, 이파리와 꽃은 모두 같은 시간대에 존재한다. 이것을 조형적 해학이라고 부르는데 우리그림이 가진 조형적 특징이다. [자료사진 - 심규섭]

기명도(器皿圖)는 도자기나 청동기와 같은 골동품을 중심으로 그린 그림이다.
기명도는 책가도(冊架圖)에서 나왔다고 추정한다. 책가도는 중국에서 시작된 다보각경도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다보각경도는 책보다는 각종 보물을 중심으로 그려졌다. 당시 청나라에서는 고증학이 유행했는데 당, 송, 명나라의 유물이나 책자 따위를 수집하는 것도 함께 유행한다. 조선의 책가도는 처음에는 책만 그렸지만 점차 책과 관련한 문방구가 결합하고, 여기에 골동품이나 시계나 안경 같은 서양문물이 더해진다. 또한 선비들의 상징이었던 국화, 대나무, 매화, 난초 따위가 더해지거나 진달래, 수선화, 복숭아열매, 수세미, 가지, 불수감, 수박, 참외와 같은 소과(蔬果)류가 결합하면서 그야말로 종합선물꾸러미가 된다.
이런 책가도에서 도자기와 골동품만 따로 분리하여 그린 것이 기명도이다.
이런 기명도에 모란이나 매화, 국화와 같은 꽃가지를 결합한 그림을 기명절지도(器皿折枝圖)라고 부른다.

책가도는 책거리그림으로 대중화된다. 책거리그림은 그야말로 책과 수많은 사물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그림이다. 책만 있으면 어떤 사물을 넣어도 책거리그림이 된다.

하지만 각각의 제목은 대략적인 구분일 뿐이다.
소과도, 기명도, 책거리그림은 서로의 경계를 쉽게 넘나든다. 소과도에 닭이나 나비가 등장하고, 책거리그림에 괴석, 꽃과 새가 들어간다. 또한 기명도에 꽃과 채소가 결합하기도 한다.
이 모든 그림을 하나로 합친 그림이 백물도(百物圖)이다.
백물도(百物圖)는 백가지 사물을 그린 그림이 아니라 모든 사물을 그린 그림을 뜻한다.
백물도의 소재는 한계가 없다. 사람이 만든 도자기나 그릇 같은 사물부터 채소나 과일, 수박, 가지 같은 식용물, 자연물인 꽃과 풀, 괴석, 닭, 새, 나비, 곤충 따위의 모든 것이 백물도의 소재가 된다.
작품의 크기도 손바닥만 한 것부터 10폭 병풍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백물도를 굳이 서양화 방식으로 말하자면 정물화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서양의 정물화와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서양의 정물화는 죽은 사물을 그린다. 정물화의 사물에는 상징이 붙어있지 않다. 화려한 꽃을 그려도 결국 죽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꿩이나 호랑이와 같은 맹수를 소재로 삼아도 박제된 것을 그린다. 결국 생명의 유한함에 따른 비극미가 핵심인 것이다.
또한 정물화에는 서양화법의 조형원리인 1인칭 원근투시법이 들어가 있다. 사물은 겹쳐지고 앞과 뒤, 주제와 부제, 중심과 부심이라는 구도의 원리가 작동한다.

이에 반해 우리의 백물도는 살아있는 사물을 그린다. 주제는 언제나 생명의 풍성함이다.
채소와 과일, 책과 문방구, 골동품, 꽃과 나무 따위의 소재는 모두 생명의 풍성함을 드러내는 소재일 뿐이다. 각각의 사물에는 인간의 원초적 생명과 관련된 상징이 붙어있다.
그래서 우리 백물도에는 비극, 슬픔, 죽음, 고뇌, 고독 따위의 부정적인 요소는 없다. 또한 우리그림의 조형원리인 확대원근법에 따라 사물은 각각의 독립성을 유지하고 여러 시점이 적용되어 4차원의 화면구성이 가능하다. 그래서 각각의 사물은 그 사물이 가지고 있는 최대한의 모습이 드러난다.

▲ 입시 동양화의 전형적인 그림이다.
입시 동양화는 미술대학을 진학해 한국화 전공을 하기 위한 지망생들의 연습작품을 말한다. 한지와 수묵을 이용해 선묘나 몰골기법, 담채화 방식을 사용한다. 미술도구나 기법은 전통적 방식을 따르지만 조형원리는 서양화법을 사용하는 이상한 그림이다. 사물이 가진 상징도 사용하지 않고 구도도 1인칭 원근투시법에 따른다. 단지 명암법만 들어가 있지 않을 뿐이다. 위 작품의 구도로 명암을 이용해 입체감을 주면 서양의 정물화와 전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자료사진 - 심규섭]

처음 백물도를 그려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것은 순전히 입시 동양화 때문이다.
입시 동양화는 한지와 먹을 이용해 구륵법, 몰골법 따위의 선묘방식에 담채방식으로 그린다. 하지만 구도는 서양화법을 따라간다. 그러니까 화법은 서양방식인데 그저 먹과 한지라는 미술도구를 사용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입시동양화 그림이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그림이면 우리의 조형화법을 사용해야 한다. 다시 말해, 유화나 아크릴물감을 사용하더라도 우리화법으로 그리면 우리그림이 된다. 하지만 우리옷의 주요 소재인 비단이나 광목으로  양복을 만들면 당연히 서양옷이 되지 우리옷이 되지는 않는다.
반대로 나일론으로 한복을 만들면 우리옷이 된다.
미술도구는 표현수단일 뿐이다. 형식과 내용 중에 형식이 언제나 우선한다. 제법 똘똘한 사람들은 대부분 형식이 우선하다는 사실을 안다.
형식은 내재되어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미술도구나 기법은 밖으로 드러나 있고 손에 잡힌다. 그래서 도구나 기법을 형식으로 착각하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도구나 기법은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다.
먹과 한지라는 미술도구로 담채방식으로 그린다하더라도 서양의 조형원리를 사용하면 한국화가 아니라 그냥 서양화이다. 전통적인 미술도구와 기법을 사용한다고 우리그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현상은 우리그림의 세계적 보편성이나 대중성, 표현 장점을 모르기 때문이다.
 
담채화는 흑백의 먹을 사용하여 그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채색기법이다. 또한 자발적 청빈을 추구한 선비들이 최소한의 색을 추구한 결과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대는 조선시대가 아니다. 또한 한국화를 전공하는 화가가 자발적 청빈, 지조와 절개라는 사상을 토대로 그림을 그린 것도 아니다.
수묵화나 담채화가 아니라 채색화가 정답이다. 채색화는 궁중회화로 완성되어 있고 민화에서 대중화에 성공한 채색기법이다.
또한 조형화법도 우리화법을 사용해야 한다. 생명미학을 담고 공동체의 원리가 담겨있는 확대원근법의 조형원리는 무궁무진한 상상력과 창작의 영역을 만들어낸다.
우리그림을 희망하는 미술지망생들이 제대로 된 미학과 화법을 배우고 익히는 것은 단순히 전통을 과거에 매달아두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작품과 작가들이 배출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처음 백물도라는 용어에 대해 이야기가 많았다. 무엇보다 처음 듣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보통은 소과도, 기명도, 책거리 따위로 부르는데 범위가 좁았다. 그래서 여러 번의 모임에서 다양한 의견들을 내왔다.
죽은 사물을 그리는 정물화에 반대해 '생(生)화','생물화', 만물을 그린다고 해서 '만물도', 풍류와 사물이 결합한 '풍물화', 신명과 사물이 결합한 '신물도' 따위가 거론되었다. 최종적으로 ‘만물도’가 좋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러던 중에 우연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백물도'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학예연구사들도 나름 연구하고 고민하여 용어를 사용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특별히 용어를 만들지 않고 그냥 '백물도'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낯설지만 계속 사용하다보면 익숙해질 것이다.
앞으로 다양한 백물도 창작을 통해 우리그림의 아름다움을 알려 나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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