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회화, 수묵화, 민화는 모두 우리그림이다.
궁중회화는 생명력이 풍부한 이상세계를 담고 있고, 수묵화는 자발적 절제를 통한 풍류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으며, 민화는 강력한 원초적 욕망을 통해 생명을 정화하는 신명(神明)을 구현한다.
이러한 우리그림을 관통하는 핵심은 ‘생명사상’이다.
생명은 죽임의 반대말이다. 죽음이 아니라 죽임이다. 죽음은 생명의 일부분이다. 하지만 죽임은 타인이나 환경에 의한 것이다. 죽음은 생명의 순환을 통해 새로운 탄생을 맞이한다. 하지만 죽임은 생명의 존엄, 생명의 확산과 발전과 풍요를 가로막는 행위의 결과물이다.
생명은 절대선이고 죽임은 절대악이다. 생명은 선과 악을 구분하는 명쾌하고 절대적인 기준이다.
생명은 환희, 기쁨, 즐거움, 행복, 풍요, 진보, 성숙, 충만, 설렘, 호기심, 의욕, 사랑, 존경, 공감, 협력, 공동체 따위를 만들어낸다. 반면, 죽임은 고통, 슬픔, 질투, 퇴행, 굶주림, 상실, 고독, 절망, 부패, 전쟁, 도둑질, 사기, 약탈, 살인, 폭력 따위의 총화물이다.

우리그림은 생명을 담고 있기 때문에 죽임을 상징하는 부정적인 요소는 표현하지 않는다.
우리그림에는 오로지 생명의 긍정적인 요소로 가득하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우리그림의 특성을 비판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갈등, 비판, 고뇌 따위의 요소가 없기 때문이란다. 이런 생각에는 서구 철학인 인본주의 사상이 깔려있다. 인본주의는 생명과 죽음을 대립시킨다. 물론 죽음에는 죽임도 포함되어 있다. 생명과 죽음을 대립시키면 죽음은 두려움, 고통, 슬픔, 좌절, 상실, 절망을 주는 어떤 것이며 동시에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 된다.
하지만 죽음은 자연의 질서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자연의 질서와 싸우면 인간은 비참해진다. 죽음과의 싸움은 생명과 삶에 대한 애착을 부추겨 사회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더 많은 죽임이 일어나는 악순환을 만들어 내었다.

생명은 갈등하거나 고뇌하지 않는다. 또한 생명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허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생명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
조선 말기 부패한 관리와 양반들은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고 약탈했다. 백성들은 굶어죽고, 매 맞아 죽었으며 어쩌면 죽음보다 고통스런 삶을 살았다. 이에 동학혁명 같은 수많은 봉기와 저항이 일어났다. 죽음이 아니라 죽임에 대한 저항이다. 이것은 생명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당연한 행위이다. 생명과 삶을 긍정하기 때문에 죽임에 반대하는 것이다.
각성한 지식인과 백성들은 죽임의 세력을 비판하고 풍자했다. 때론 죽창과 낫을 들고 외세를 등에 업은 지배세력과 싸우다 기꺼이 죽음을 맞이했다.

죽임에 저항하고 싸운 것은 생명의 가치를 높이기 위함이다.
지식인들이 글로 죽임의 세태를 비판하고 풍자하며, 백성들이 온몸으로 저항하는 것이 모두 생명을 옹호하기 위함이다.
미술과 같은 예술은 바로 이러한 생명의 가치를 이상적으로 표현하는 역할을 한다. 약탈, 살인, 전쟁, 굶주림, 절망 따위의 죽임이 활개 치는 세상에서도 우리그림은 생명의 가치를 흔들림 없이 지키고 있었다.
이것이 우리그림의 가장 큰 장점이자 아름다움이며 세계적 보편성이다.

우리그림에는 풍자와 비판, 갈등, 비웃음 따위는 표현하지 않는다.
풍자(諷刺)는 사전적 의미로 일반적인 뜻은 남의 결점을 빗대어 공격하는 것을 말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정치적 현실과 세상 풍조, 기타 일반적으로 인간생활의 결함, 악폐(惡弊), 불합리, 우열(愚劣), 허위 등에 가해지는 기지 넘치는 비판적 또는 조소적(嘲笑的)인 발언을 뜻한다.(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사전)

▲ 위 좌측-김홍도/풍속화첩/벼타작/종이에 수묵.
위 우측-김홍도/취중송사도/비단에 담채/1778년/90.9*42.7/국립중앙박물관.
아래 좌우측-신윤복/풍속화/단오, 싸움/종이에 채색 [자료사진 - 심규섭]

가끔 김홍도, 신윤복의 풍속화에 양반이나 지배계층을 풍자하는 내용이 담겨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김홍도의 풍속화는 정조의 명령에 의해 그려졌고 신윤복의 풍속화는 풍요로운 선비들의 생활을 그린 것이다. 김홍도나 신윤복과 같은 궁중화원은 그 당시 지배계층의 언저리에 있었던 사람들이다. 중인신분이었던 화원들이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형성하여 기존 세력과 대립한 것도 아니었는데 누가 누굴 풍자하는 형식으로 공격했다는 말인지 모르겠다.
풍자는 일종의 비판이다. 그래서 풍자를 하려면 갈등구조가 있어야 한다. 김홍도나 신윤복의 풍속화에서는 어떠한 갈등구조도 보이지 않는다. 이를테면, 김홍도의 [벼타작]이나 [취중송사도], 신윤복의 [단오]라는 그림에서 거들먹거리는 양반이나 땡중을 풍자하는 내용이 있다고 하는데 그림 속의 양반이나 중은 농민이나 목욕하는 여성들과 어떠한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냥 각자 자신의 일을 할 뿐이다.
이것은 풍자나 갈등, 혹은 비판이 아니라 해학(諧謔)이다.
해학(諧謔)은 정답고 긍정적인 웃음을 뜻한다.
김홍도의 [벼타작]에서 즐겁게 일하는 농민과는 달리 심드렁하게 누워 담뱃대를 빨고 있는 양반의 모습은 우스꽝스럽다. 또한 [취중송사도]에서 술에 취해 쓰러지면서 관리에게 민원을 넣은 양반의 모습이나 주변 아전들이 낄낄거리는 모습은 누가 봐도 웃음이 절로 나온다. 신윤복의 [단오]에서 여자들이 목욕하는 장면을 숨어서 보고 있는 젊은 중들의 장난기어린 표정에서도 정겨운 웃음이 나온다. 술 취한 양반들이 싸우고 있는데, 웃옷을 벗는 양반의 모습, 긴 곰방대를 물고 한심스럽게 바라보는 기생의 모습, 부셔진 갓을 챙기는 친구의 모습 따위는 심각한 것이 아니라 그냥 우습다.

해학은 생명사상을 담고 있는 우리그림만이 가질 수 있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생명은 밝고 아름다우며 즐겁고 기쁘다. 풍자와 비판이 부정의 산물이라면 해학의 생명에 대한 긍정의 산물이다.
실제 궁중회화나 수묵화, 민화에는 다양한 형식의 해학이 표현되어 있다.
해학을 표현하는 방법에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상황적 해학이다.
상황적 해학은 그림 속의 작은 사건이나 상황을 통해 표현하는 방법이다.
주로 김홍도, 신윤복, 김득신의 풍속화에 단골로 등장한다. 특히 김홍도의 [군선도]에는 작은 사건을 통해 심각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재미있는 표정이나 행동이 표현되어 있다.
궁중회화인 [십장생도]에도 상황적 해학이 표현되어 있다. 이를테면, 사슴이 영지를 먹고 있는 장면이나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시는 장면 따위가 그것이다. 또한 [백동자도]에는 아이들이 놀이를 하는 모습에서 넘어지거나 토라져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웃음을 표현하고 있다. [까치호랑이그림]에는 자기 꼬리를 밟고 있는 호랑이의 모습에 웃음이 터지고, 장닭과 암탉, 병아리를 함께 그린 [계관도]에는 음식을 물어다주는 어미닭 주변으로 몰려드는 병아리의 다양한 모습이 재미있게 그려져 있고, 김홍도의 [묘접도]에는 고개를 틀어 나비를 보는 고양이의 모습이 재미나게 표현되어 있다.

▲ 상황이 만들어내는 해학을 표현하고 있는 그림들이다. [자료사진 - 심규섭]

둘째, 조형적 해학이다.
조형적 해학은 확대원근법의 조형원리에 따라 사물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웃음이다. 이것은 특히 책가도와 책거리, 문자도, 소과도, 기명도, 까치호랑이그림 따위에 상시적으로 나타난다. 우리그림은 확대원근법의 조형원리에 의해 3차원의 현실을 뛰어 넘어 4차원적인 표현이 가능하다. 이를테면, 책상다리를 사람다리처럼 그리거나 작은 사물을 거대하게 그리며, 큰 사물을 손바닥만 하게 표현할 수 있다.
바닥에 고정되어 있어야 할 사물이 공중에 떠있게 표현하고, 하나의 공간에 사계절의 모든 꽃을 표현하기도 한다.
[오봉도]에 표현되어 있는 두 개의 태양도 우리그림이기 때문에 가능한 표현이다. 하나의 하늘에 아침 해와 낮 해가 동시에 떠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시간을 겹칠 수 있는 조형원리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다.
과장, 왜곡, 확대, 축소, 공간의 뒤틀림, 시간의 결합이라는 조형원리에 맞춰 표현되어 있는 우리그림은 시각적 아름다움과 더불어 무한한 상상의 즐거움, 조형적 웃음을 선사한다.

▲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떠 있는 모습은 조형적 해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것은 심각한 표현이 아니라 재미있는 표현이다. 수박의 꼭지 부분이 살짝 열려있는 모습, 책상의 다리가 공중에 떠 있으며, 곰방대가 옆으로 비스듬하게 걸쳐있는 모습, 책상 위에 바위를 그리고 그 바위 안에 3층 높이의 건물을 그리며, 투명한 그릇 안에 잉어가 들어가 있고, 바위 위에 복숭아나무가 통째로 들어가는 것은 조형적 해학이다. 이런 그림을 보고 해맑은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이다. [자료사진 - 심규섭]

셋째, 성적 해학이다.
성행위는 생명탄생을 위한 아름다운 행동이다. 꽃이 화려하게 피는 것은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함이다. 화려하게 핀 꽃에 나비와 새가 날아드는 것은 자연의 성행위와 다르지 않다. 남녀의 사랑과 성행위는 구분되지 않는다. 다만 강제와 폭력, 소유를 동반한 성행위는 생명의 가치를 훼손하기 때문에 죄악이 된다.
성적인 행동이나 말은 사람들에게 활력을 준다. 아름다운 여성을 보는 남자의 눈이 커지고 호탕하게 웃는다. 멋있는 남자를 보는 여성은 화장을 고치고 살가운 웃음을 보낸다. 남녀가 다정하게 걷는 모습만 봐도 웃음이 절로 나온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음란하다고 치부하지만 사실은 질투가 나서 그러는 것이다.
[등용문]이란 그림에는 잉어가 거친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모습을 그린 대표적인 출세그림이다. 하지만 화가들은 물속에서 뛰어오르는 잉어의 모습을 마치 남성의 성기처럼 보이도록 해학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것을 보는 남성들은 해맑게 웃지 않을 수 없다.
근엄하다는 선비들의 사랑방을 장식한 [책가도]에는 여성의 가슴처럼 보이는 연적(硯滴)을 그려 넣었다. [해학반도도]의 복숭아열매는 거의 여성의 가슴이나 엉덩이처럼 보이도록 표현했다. [책거리]나 [소과도]에 표현되어 있는 가지나 수세미는 남성의 성기와 닮아있고 신윤복의 [단오]에 그려져 있는 나무는 여성의 성기를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최고의 화가였던 김홍도나 신윤복을 비롯한 많은 도화서 화원들은 숱한 춘화(春畵)를 그렸다. 춘화에는 남녀의 노골적인 성행위와 더불어 남녀의 사랑관계를 해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그림 안에는 어떤 비극이나 고통, 슬픔 따위는 없다. 보고 있으면 그저 배시시 웃음이 나올 뿐이다. 일본 춘화의 괴기스러움, 중국 춘화의 불필요한 화려함과는 차별되는 지점이다.

▲ 잉어를 남성의 성기와 닮게 그렸는데 아침이란 상황과 연결시키면 더욱 재미있다. 책가도나 책거리그림에는 가지나 수세미를 남성의 성기와 비슷하게 표현하고 복숭아 연적이나 열매는 여성의 가슴이나 엉덩이를 연상시킨다. 또한 숱한 춘화는 성적 아름다움과 재미를 준다. [자료사진 - 심규섭]

문제는 이것을 해학, 즉 밝은 웃음과 재미로 수용하는데 인색하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그림을 보고 터무니없다는 듯이 비웃기도 한다. 어린 아이들이 장난삼아 그린 것처럼 치부하는 것이다. 이것은 서양미술의 비극적 아름다움에 중독된 결과이다.
우리그림은 우리의 눈으로 봐야 한다. 우리그림이 핵심인 생명의 아름다움을 이해하지 못하면 감동의 울림이 전달되지 않는다.
특히 조형적 해학에 대해 무감각한 경우가 많다. 조형적 해학은 상황적 해학이나 성적 해학에 비해 직접적이거나 현실적이지 않다. 어떤 부분이 해학인지, 어디쯤에서 웃어야 할지 잘 모른다. 특히 이런 조형적 해학은 작품의 형식이나 내용과 결합되어 있어서 정확한 부분을 끄집어내기 어렵다. 그래서 그림을 좀 아는 사람이나 전문 감상자 수준이 되어야 감지된다.

우리그림은 심오하지만 결코 심각하지 않다. 웅장하지만 비극적이지 않다. 또한 화려하지만 허무하지 않다. 해학과 재미가 있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생명이 아름답고 즐거운 가치이듯이 우리그림도 아름답고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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