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그림은 전통재료와 기법으로 그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서양미술도구인 수채, 아크릴, 유화나 디지털 프로그램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은 전통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는데요.”

가끔 전시장에서 능글맞은 얼굴로 이런 도발적인 질문을 하는 사람을 만난다.
어떤 작가는 이렇게 대꾸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이 왜 서양 옷을 입고 다닙니까?”
대답이 가관이다.
“편해서요.”
질문자의 얼굴을 한참이나 쳐다본다. 대답을 해야 하나, 아니면 무시할 것인가를 놓고 짧은 생각에 잠긴다. 머리에는 숱한 이야기들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대부분은 짧게 얼버무리고 만다.
“그래도 우리그림이 맞습니다.”

질문의 수준이 너무 바닥이다.
이런 정도를 질문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대답을 해도 이해시킬 수 없다. 이건 질문이 아니라 심심해서 찔러보는 말이거나 혹은 관심을 끄는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어설픈 질문에 마땅한 대답을 하지 못하는 작가들도 있다.
복잡하게 설명하는 것이 아닌 한마디로 정리해서 알려주어야 한다.
“우리그림은 박물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 발전합니다. 예전에도 그랬구요, 앞으로 쭉 그럴 겁니다.”

미술은 사회적 산물이다. 사회를 제외하고 독자적으로 발전하는 경우는 없다.
미술이 발전하는 배경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가장 큰 원인은 사회의 변화이다. 사회가 변하면 미술도 변한다. 미술이 변하고 거기에 맞춰 사회가 변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가 변하는 것은 철학, 정치, 생산력, 생산관계 따위와 연관이 있다.
당대의 철학이 바뀌면 미학도 바뀌고 미학에 따라 미술도 바뀐다.
또한 과학의 발전에 따라 미술재료가 발전하면 표현방법이나 기법도 바뀐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천연수성물감을 사용했는데 천년의 세월을 견뎠다. 그렇다면 고분벽화에는 천연수성물감이라는 당대 최고의 기술력을 사용한 것이다.
서구의 미술도 대부분 수성물감이었다. 하지만 수성물감은 다루기 힘들고 색소를 접착시키기도 어려웠다. 이렇게 되면 표현기법에 한계가 생기고 장기보존이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물감을 벽이나 단단한 흙에 고정시키는 방법인 회칠기법이 발전한다. 이 회칠기법을 프레스코기법이라고 한다. 고구려 고분벽화나 르네상스의 미켈란젤로도 이 회칠기법을 사용해 벽화를 그렸다.
이 보다 더 발전한 물감은 유성물감이다. 기름에 물감을 녹여 사용하는 이 재료는 서구회화에 일대 혁명을 일으켰다. 만약 유성물감의 발전이 없었다면 서양화법은 중세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서구회화의 핵심인 르네상스회화는 유성물감과 떨어져서 설명할 수 없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렘브란트가 원근법과 명암법을 완벽하게 구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유성물감이란 최첨단 물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 홍명진/화조도/종이에 수채/45*73/2014.
수채화로 그림 화조도이다. 조형원리나 상징은 전통방식을 따랐지만 재료는 현대적인 수채화 물감을 사용했다. 미려한 색상과 차분한 색조로 현대인의 정서와 미감에 잘 맞는다. [자료사진 - 심규섭]

우리그림에서 색이 없는 흑백의 수묵화가 발전한 것은 주자성리학이라고 하는 학문적 가치를 구현하는데 있어 선비들의 덕목인 ‘엄격한 예법과 자발적 청빈’이 주요한 바탕이 된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미술의 3대 요소인 ‘형(形), 상(像), 색(色)’ 중에서 색을 버리고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미술로서의 치명적 결함을 드러낸다. 이것은 장기를 둘 때, 차포를 떼고 두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렇게 색을 버린 수묵화를 그린 것을 미술 조형적 원리로 분석하면 의외로 단순하다.
그것은 바로 채색물감이 비쌌기 때문이다. 구하기도 어려웠고 가격은 상상을 초월 할 만큼 비쌌다. 진하게 채색을 하는 그림은 국가미술기관인 도화서나 자비대령화원에서만 가능했다. 그것도 제작에 많은 돈이 들어가기 때문에 오봉도나 장생도의 경우 10년에 한번 정도만 재창작 했다. 심지어는 궁중모란도의 경우 돈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재활용하라는 명령을 내릴 정도였다.

▲ 심규섭/송학도/디지털회화/2014.
기존의 물감으로는 표현할 수 않는 기법을 사용했다. 디지털도구이니까 가능한 기법이다. 공간은 깊어졌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젊은이들의 정서에 잘 부합한다. [자료사진 - 심규섭]

18~19세기에 대중그림인 민화가 발전한다.
민화는 대부분 채색그림이다. 상대적으로 부유했던 양반이나 선비들이 색이 없는 수묵화를 그리고 있을 때 지전이나 표구사의 화공들은 화려한 색상의 물감을 사용한 그림을 시장에 내다 팔았다.
상식적으로 채색된 그림의 가격은 엄청나게 비쌌을 것이다. 하지만 대중적인 소통이 이루어졌다는 말은 채색한 그림의 가격이 그리 비싸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한다.
이렇게 민화가 대중화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싼 물감과 종이의 보급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량으로 생산된 수성물감이 청나라와 일본으로부터 수입되었다. 석채물감에 비해 질은 떨어지지만 색이 다양하고 진하며 무엇보다 값이 싸고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대부분의 궁중회화나 민화는 이런 물감으로 제작한 것이다.

옆길로 새는 이야기지만, 오봉도에는 소나무가 붉은 색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소나무를 어떤 사람은 ‘적송赤松’이라고 한다. ‘적송’은 춘양, 봉화지역에서 나는 크고 곧은 소나무로 표면은 붉은 색을 띈다. 이 소나무는 쓰임새가 많아 주로 큰 건물을 지을 때 사용한다고 한다. 당연히 궁궐을 지을 때도 가장 많이 사용한 목재가 적송이다.
하지만 오봉도에 왜 붉은 소나무를 그렸는지 알 수 없다. 그림 속의 소나무가 실제 적송과 비슷한 것은 색깔뿐이다. 소나무의 전체 모양은 적송과 같다고 단정할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은 오방색에 따른 것이라고 하는데 한마디로 근거 없다. 적송으로 궁궐을 지었기 때문에 오봉도에도 적송을 그렸다는 말은 그럴싸한 말이긴 하다. 하지만 미술 조형적인 근거가 없다. 오봉도에서 소나무의 색깔은 붉은 색이 아니어도 전혀 문제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붉은 색의 소나무는 조형성을 불안하게 하고 있다.
초창기 오봉도나 장생도와 같은 그림에서는 짙은 갈색 따위의 일반적인 나무색으로 표현하고 경우가 많다.
우리가 보는 오봉도는 대부분 18세기 말에 창작된 것이다. 이 무렵이면 값싼 물감이 대량으로 수입되었을 시기이다.
결론적으로 오봉도의 소나무는 원색의 물감이 풍부했기 때문에 붉은 색으로 칠한 것으로 추정한다. 일반적으로 갈색과 붉은 색은 비슷하기도 하고, 원색이 귀한 상태에서 굳이 혼색을 해서 탁한 갈색을 만들어 칠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 원색은 자극적이다. 선명한 붉은 색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시각적 효과를 낼 수 있다.

사람들이 말하는 우리 전통그림은 대부분 청나라나 일본에서 수입한 물감으로 채색했다. 19세기 초반에는 더욱 값이 싸고 화려한 색을 자랑하는 화학물감이 일본으로부터 수입된다. 이 당시 창작된 민화는 너무 많은 색을 사용해서 오히려 촌스러울 정도였다. 흔히 혁필그림이라고 하는 문자도에는 알록달록한 천연색으로 채웠을 정도이다.

그렇게 시대의 변화와 과학의 발전에 따라 우리그림도 진화해 왔다.
현재의 수채물감은 과거의 물감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급이다. 또한 ‘아르쉬’라는 상표의 면종이는 한지나 비단보다도 발색이나 보존성이 높다.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쉽게 민화를 창작할 수 있고 다양한 표현기법을 구사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시골할머니도 사용하는 디지털기기를 이용한 창작은 이 시대의 흐름과 잘 맞는다.
옛날 재료, 옛날 방법으로 우리그림을 그리는 시대는 지났다. 또한 그런 방법은 복원전문가의 몫이지 창작가의 역할은 아니다.
우리그림을 과거에 고정시키려는 행위는 우리그림을 사랑하지 않거나 발전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그림의 전통은 재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학과 조형기법에 있다. 물론 이런 미학과 조형기법도 현실에 맞게 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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