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모란은 서양의 장미와 비슷하게 대중적으로 사랑받던 꽃이었다.
지금은 각종 서양 꽃에 밀려 모란을 아예 모르는 젊은 사람들도 많지만 중국에서는 여전히 인기가 많다. 그래서 중국의 여러 지역에서 모란꽃 축제를 벌이고, 모란만 그리는 화가도 수천 명이 넘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모란은 ‘꽃 중의 꽃’, 모든 꽃을 대표하는 꽃으로 인격의 완성체인 ‘군자’의 상징, 혹은 아름다운 여성을 상징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징이 결합하여 모란은 풍요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모란은 크고 화려해서 사람들의 시선을 단번에 끌어당긴다. 모란의 상징인 ‘풍요’는 물질적 풍부함을 뜻하는데 시각의 즐거움이 곧 물질적 풍요로 연결되는 것은 흥미롭다.
사실 물질적 풍요는 시각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결국 육체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하루에 세끼 이상 먹지 못하며 생노병사를 이길 수도 없다.
풍요의 증거는 외부로 드러나면서 시각화된다. 크고 화려한 집, 좋은 물건, 풍성하게 차린 음식, 장신구 따위는 눈을 통해서만 인지되고 수용된다.
이것은 요즘도 마찬가지이다. 명품이나 고급 승용차, 넓은 집 따위는 풍요의 상징이다.
시각은 한 번에 많은 정보를 수용하고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반대로 가장 속이기 쉬운 감각기관이다. 그래서 사기꾼들은 상대방의 시각을 속이는 능력이 탁월하다.
사람들은 고급 외제 승용차를 타고 다니면 돈이 많고 풍요로운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중소기업 사장과 편하게 한 대화이다.
“고급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 중에는 조폭도 많다더군요. 그래도 사업하시는 분들 중에는 고급차를 모는 사람들이 많지요?”
“우리 업계에서 고급자동차 몰고 골프 치러 다니면 무능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제 경험으로는 고급자동차를 모는 사람의 70% 정도가 사기꾼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한 말이겠지만 현 시대의 단면이 씁쓸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풍요는 원래 생존을 해결하고 여가나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을 만큼의 물질적 재부를 의미한다. 생존에는 반드시 물질적 재부가 필요하지만 여가나 문화생활은 정신적 가치를 만들거나 향유하는 일이다. 이런 문화생활을 통해 창의적인 사고를 이끌어내고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얘기는 현실에서 잘 통하지 않는다. 풍요는 쓰임새를 넘어선 잉여가치가 되었고 허영과 사치라는 말과 동일시된다. 허영과 사치를 하지 않으면 풍요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진하고 선명한 채색으로 그려진 모란그림을 선호하지 않았던 이유도 허영과 사치라는 풍요를 경계했기 때문이다.

 

▲ 이미영/풍요1,2/수채/각100*65/2014. [자료사진 - 심규섭]

위 그림은 모란을 중심으로 나비 몇 마리를 그려넣은 전형적인 모란그림이다.
어떤 사람들은 모란과 나비의 결합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모란이 부귀를 뜻하고 나비가 80세를 뜻하기에, 이 둘을 결합하면 ‘80세까지만 부귀를 누리며 살아라’가 되어 제한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작가가 이 정도의 뜻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럼에도 나비를 모란과 결합시킨 것은 조형적인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정적인 모란에 움직임이 있는 나비를 넣어 변화를 주는 것, 평면적 화면에 이동이 자유로운 나비를 넣어 공간을 깊게 하는 것은 그야말로 화폭의 조화를 추구하는 작가의 자연스런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그림의 소재는 모란과 나비인데 제목을 ‘풍요’라고 지은 것은 우리그림의 전통에 따르고 있다는 말이다. 실제 작가는 우리그림을 바탕으로 창작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림만 봐서는 서양화인 우리그림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 재료는 수채화 물감을 사용했고 화폭도 한지가 아닌 면(棉)이다. 배경도 ‘소금녹이기 기법’을 사용해서 공간을 만들었다. 결국 서양화 미술재료로 서양화 기법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그림에는 원근과 명암이 없다. 화면은 평면적이고 상징명암(물감의 농담을 이용해 사물의 입체감을 드러내는 방법)을 사용해 꽃이나 이파리를 표현했다.
그러니까 조형원리와 소재는 우리그림 방식을 사용하고 미술재료와 기법은 서양화법을 사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좀 심하게 비유하면 우리그림의 조형원리와 상징, 소재를 유화로 그린 것과 비슷하다. 이것을 우리그림이라고 불러야 하나 아니면 서양화라고 해야 할까?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우리그림이 맞다.
사실 화가 입장에서는 수채화 물감이든, 전통 채색화 물감이든 간에 사용하는 기법의 원리는 동일하게 수용한다. 그러나 전통 채색화 물감과 궁합이 맞는 화지와 붓이 있고 기법은 그 재료의 특성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한지와 먹을 사용하면 이런 느낌의 작품은 결코 나오지 않는다.
창조의 핵심은 ‘모방과 융합’이다. 원본의 가치에 충실하면서 현대적인 흐름을 반영한 것이 ‘융합’인데 이것이 작가의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21세기에 살면서 18세기 정서와 방법을 고수하는 것은 전통의 복원이지 재창조는 아니다. 화가는 전통을 복원하는 전문가가 아니라 그야말로 당대의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사람이다.
수채화 물감은 전통 채색화 물감에 비해 진보한 물감이다. 사용하기에 편하면서 가격도 싸다. 또한 대중적인 물감이라 감성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그림의 제목이 ‘풍요’이다. 이것은 옛말로 하면 ‘부귀(富貴)’일 것이다.
하지만 이 그림은 화려하면서도 화려하지가 않다. 활짝 핀 모란과 시들지 않은 이파리를 그리고 있기에 화려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모란은 단아하고 은은하게 표현되어 있다. 의도적으로 원색을 피하고 채도를 낮추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전체적인 모란의 느낌은 역동적인 움직임이 느껴진다. 바람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움직이는 그런 느낌이다.
이것은 민화풍의 화려한 모란그림에서 벗어나기 위한 작가의 의도가 강하게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화려하기만 한 모란그림에는 천박한 허영과 사치가 진득하게 배여 있다.
풍요는 모든 사회나 인간이라면 당연히 추구해야 할 원초적 가치이다. 하지만 풍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허영과 사치는 경계해야 한다. 허영과 사치는 공동체의 가치를 무너뜨리고 풍요가 주는 정신적 가치마저 없애버리기 때문이다.
풍요에서 허영과 사치를 절제하면 존경과 명예를 얻을 수 있다.
모란그림에서 화려함을 버리면 품격을 얻는다.
타의에 의해 통제 당하는 것보다 스스로 움직여 얻는다면 더욱 값지다.
모란의 작지만 역동적인 움직임을 이렇게 감상하는 것도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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