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환 (시민평화포럼 공동대표)


남북관계가 많이 꼬여 있다. 을지프리덤가디언 한미합동군사훈련이 끝나고 추석이나 인천아시안게임이 시작되기 전에 남북관계의 변화가 올 것이라는 우리 정부 일각의 기대는 이미 무산된 것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이런 기대에 대해 북한은 “《을지 프리덤 가디언》 … 전쟁불장난으로 북남관계를 파국에 몰아넣고도 아무 일 없은듯이 군사연습이 끝나면 대화가 이루어질수 있는것처럼 떠들고있는것이야말로 철면피의 극치”라고 비난하고 스스로 파견을 공언한 인천아시안게임 북한응원단 파견마저 취소해버렸다.

지난 13일에도 북한은 우리 정부의 8월 남북고위급회담 제안에 대해 근 한 달간의 침묵을 깨고 “현실은 남조선당국자들의 이러한 《관계개선》표명이 민족을 우롱하고 세상을 기만하기 위한 한갖 위선적인 행위에 불과하다”며 강한 불신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남과 북 양 당국의 지향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남북관계가 꼬이고 정체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 남북관계 개선에 접근하는 양 당국의 입장이 너무나 판이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북한은 남북관계 개선은 원하지만 현재의 남측 당국 태도에 신뢰를 보내기 어렵다는 입장이고, 우리 정부는 한미군사훈련이니 삐라니 하는 것 이전에 남측 당국의 관계 개선 의지를 믿고 제안한 대화에 호응하라는 입장이라 보인다.

어느 입장이 옳고 그른가는 여기서 따질 문제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접근방식의 차이를 넘어 남북관계의 실질적 개선을 이끌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최근 필자가 만난 북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하나같이 꼭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북한은 남북관계 개선을 원하며 그를 위해 주동적으로 몇 가지 조치를 취했지만, 박근혜 정부가 대결적 태도를 버리지 않고 오히려 그런 선의를 이용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우리 정부가 남북고위급회담을 제안하면서 그 날짜를 한미합동군사훈련이 진행 중인 8월 19일로 지정한 것은 결국 대화를 하려면 남측의 대북 한미군사훈련을 사실상 북한이 인정하라는 뜻이고 이건 꼼수 정도가 아니라 북한을 모욕주려는 것이 분명하다는 주장이었다. 즉 남측 당국은 대화를 대결수단에 악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북측의 응원단 파견 취소와 관련해서는 남측 당국이 북의 응원단 파견을 부담스러워 하는 것이 분명하고, 북 응원단의 남측 대중공연이나 아시안게임 폐막일인 10.4선언 7주년에 기념행사를 하는 문제 등에서 남측 당국이 부정적 태도를 보일 경우 응원단 파견으로 인해 오히려 당국관계가 더 악화될 수도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고 설명하였다. 남북관계를 개선하자는 취지에서 결정된 응원단 파견이 오히려 남북 당국관계를 더 갈등으로 몰아가게 되는 것은 피해야 한다는 뜻이라 보인다.

북한 사람들의 이러한 주장은 상당히 타당하다. 또 박근혜정부에 대한 불신에도 불구하고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입장이나 더 이상의 당국관계 악화를 바라지 않는 점도 분명히 드러난다.

하지만 일련의 과정에서 쌓인 대남불신으로 인해 대화에 지나치게 소극적인 태도로 변화하였다. “남조선당국자들의 뼈속까지 슴밴 동족대결본색부터 완전히 들어내는것이 북남관계개선의 제1차적요구로 될 것이다”는 식의 주장은 지난 이명박정부가 ‘북한 핵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남북관계 개선이 어렵다’고 주장하던 것과 내포한 실정은 다를지 모르지만 논리적으로는 거의 판박이이다.

지난 2월의 고위급 접촉 이후 누적되고 있는 북한의 대남불신을 완화시키고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끌어들여 남북관계 개선의 실마리를 푸는 것은 기본적으로 우리 정부의 역할에 달려 있다.

물론 한미합동군사훈련 중지를 대화의 전제로 주장한 8월 29일자 조평통 대변인 성명에 비해 삐라 살포 중지 등을 요구한 9월 13일자 북남고위급접촉 북측대표단 대변인 성명은 상대적으로 대화조건이 현실적이다. 그러나 이 9월 13일자 성명에서 북한이 말하는 것은 ‘삐라 중단’ 자체가 아니라 지난 2월의 고위급회담에서 합의했던 비방중상 중지 약속을 지키라는 의미이다.

비방중상 중단은 기본적으로 상호 체제인정으로 가는 초기 조치의 의미이고, 이는 단순한 폭력적 언사의 문제만이 아니라 외교적 언사로 포장되었다 하더라도 상대의 체제와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모두 비방중상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이에 대해서는 필자의 <통일뉴스> 5. 20일자 컬럼, ‘비방중상의 정치학’을 참조하라).

따라서 언론과 보수층에 대한 정부의 완벽한 통제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체제 하에서 이는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현실 가능한 하나의 접근은 우리 정부가 말하는 ‘신뢰프로세스’의 문제를 북이 주장하는 기존의 남북공동선언들에 대한 존중의 태도와 연결시키는 것이다.

우리 정부는 우선 가까운 개천절에, 혹은 광복 70주년을 맞는 2015년 신년사 등을 통해 7.4공동성명, 6.15공동선언과 10.4선언 등을 존중한다는 뜻을 다시 한 번 확실히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

이에 대해 정부는 이미 기존 남북합의에 대한 존중의 뜻을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여전히 정부의 기존 남북합의 존중의 태도가 부족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오히려 기왕 여러 차례 밝힌 6.15와 10.4 등의 합의 존중의 입장을 다시 한 번 밝히는 것이야말로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또 ‘존중’과 ‘이행’은 다른 영역의 문제라는 점도 중요하다. 기존 남북합의에 대한 존중의 뜻을 권위 있는 형식을 통해 밝히는 것은 ‘신뢰조성’의 1차적 행위가 된다. 남북공동선언들의 세부적 이행은 남북이 마주 앉아 구체적으로 현실조건을 타산․협의하면서 풀어가야 할 그 다음의 문제이다.

북한은 여러 차례 남북공동선언들에 대한 존중의 뜻을 표명하는 것이 신뢰조성의 핵심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지난 13일자 성명에서도 “《신뢰조성》은 북남합의리행에 있으며 진정은 어떤 경우에도 합의를 준수하려는 성실한 자세에서 표현된다”고 쓰고 있다.

우리 정부는 신뢰조성과 이행단계를 구분하고, 우선 적절한 계기에 대통령이 직접 권위를 실어 남북공동선언들에 대한 존중의 뜻을 확실히 밝힘으로써 가장 힘든 ‘신뢰조성’의 1차적 단계를 넘고 이어서 남북관계를 대화 실현단계로 진전시켜나가야 한다(기우일지도 모르지만, 남북선언 존중의 뜻을 ‘핵-경제개발병진노선’ 포기 요구와 연계시키는 것은 가장 나쁜 선택이라는 점도 이 과정에서 고려해야 할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여러 차례 주장한 북한의 ‘핵개발-경제발전’ 병행 포기 주장은 그 진의야 어쨌건 북한의 입장에서 보면 비방중상의 영역에 속할 수 있다).

그리고 정부는 고위급회담에만 얽매일 것이 아니라, 그 밖의 다양한 접촉의 기회와 계기들을 적절히 활용하는 것도 필요하다. 예를 들어 인천 아시안게임에 참가한 북측 관계자들과의 접촉을 통해 인천에서 10.4선언 남북공동기념식 등을 조촐하게나마 함께 치르는 것도 추진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가 이런 정도의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다면 여자축구경기를 비롯하여 북한이 결승에 진출하는 주요 경기가 생길 때, 여기에 소수라도 북한 응원단이 짧은 일정으로 내려와 응원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또 정부는 모든 민간교류가 남측 정부에 부담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통일의 질을 형성하는 기초이며, 북한 변화의 가장 현실적 토대가 된다는 점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전쟁과 같은 물리적인 힘에 의한 통일이 아니고,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의 통일이 되기 위해서는 교류와 협력을 한 기간과 그 수준이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민간교류의 수준과 역사, 기간이 앞으로의 통일과정을 좌우할 것이다. 따라서 정부는 민간교류에 대한 정부 통제의 유혹에서 가급적 벗어나서 민간교류의 자율성을 확대해나가는 조치를 강화해나가야 한다.

정부 통제가 강화된 민간교류나 대북지원에 대해 북한측 인사들은 매우 부정적이다. 특히 북한은 대북지원사업을 정부가 대결정책의 수단이자 정권홍보용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보고 있으며, 그런 이유 때문에 현재로서는 대북지원사업 자체에 매우 소극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내년은 광복 70주년이자, 6.15선언 15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 해를 어떻게 맞느냐에 따라 향후 남북관계의 향방이 결정될 가능성이 높다. 정부는 서두르지 않고 차분하게, 그러나 내년 6월 15일 이전에 남북관계 개선의 계기가 되는 신뢰조성 조치들을 구체적으로 추진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토대 위에서 비로소 남북고위급회담 재추진이 가능하게 될 것이고 남북관계 개선의 실마리가 잡힐 수 있을 것이다.

 
이승환은 1958년 경북 포항에 태어나, 고려대 경제학과, 경남대 북한대학원(정치학 석사)을 거쳐 경남대 대학원 정치외교학 박사 과정을 수료하였다.

이승환은 통일맞이 정책위원장, 열린정책연구원 정치아카데미 소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시민평화포럼 공동대표이며, 또한 민화협 집행위원장,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다. 그는 지난 15년여에 걸쳐 남북 민간교류 활동을 전개해왔으며,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6.15남북공동행사 등을 진행해왔다.

그가 쓴 글로는 “문익환, 김일성 주석을 설득하다”(창작과비평, 통권 143호, 2009), “6월항쟁 20년, 남북 및 북미 관계의 변화와 통일담론”(창작과비평, 통권 137호, 2008), “2000년 이후 대북정책담론 연구”(북한대학원, 2008) 등이 있다.

개인 블로그 http://blog.naver.com/lsh2k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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