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원 김홍도(1745~1806?)는 조선 후기를 풍미한 조선 최고의 화원 중에 한명이다. 죽은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대략 1806년쯤이라고 추정한다.
김홍도는 ‘이를 갈 무렵’인 7~8세 쯤 표암 강세황으로부터 그림을 배웠다고 한다. 이 기록은 강세황의 [단원기檀園記]에 따른 것이다.
정확한 출생지는 알 수 없지만 어린 시절을 안산의 단원에서 보낸 것은 확실하다. 김홍도의 호인 단원(檀園)은 박달나무숲이란 뜻인데 안산의 단원이란 지명에서 따왔을 것이라고 조심스레 추측하는 학자도 있다. 또 다른 호인 단구(丹邱), 서호(西湖)도 모두 안산이란 지명과 관련이 있다.
김홍도는 산수, 인물, 화조, 영모, 풍속, 신선, 불화와 같은 거의 모든 갈래에 능통했지만 특히 신선도와 풍속화에 경지를 이루었다.
그의 스승인 강세황은 김홍도가 여러 갈래에 능했지만 특히 신선도로 세상을 평정했다고 평가했다.
확실히 김홍도는 신선도의 대가이다. 신선과 관련한 수많은 그림을 남겼고 근 6m에 이르는 대작 [군선도]와 채색화인 [해상군선도] 따위를 창작했다.
김홍도의 신선도는 예전의 신선도와 큰 차별을 가진다. 장식화 수준의 신선도를 감상용 그림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김홍도는 배경을 과감히 없애고 인물 중심의 신선도를 완성했다. 그림 속의 신선의 모습은 선묘나 발묵, 필치 따위의 회화적인 붓질을 통해 생동감이 넘치는데 배경을 없애면서 인물이 화면을 가득 채울 만큼 커졌기에 가능한 표현이었다.

▲ 김홍도/봉래선경/23.2*30.3/수묵담채/연도미상.
실내가 아닌 실외의 풍경을 그린 것이다. 작은 폭포가 있고 울타리 안쪽으로 넓은 상이 놓여있다. 상 위에는 고풍스런 도자기가 있고 그 안에는 산호로 보이는 것과 종이가 꽂혀있다. 그 앞에는 파초와 괴석이 있고 학이 노닐고 있는 풍경이다. 봉래는 신선들이 산다는 신령스런 산이다. 그 풍경을 그렸는데 괴석과 파초, 책상 따위는 선비의 상징을 넣었다. 이것은 선비와 신선을 동일시 여겼다는 의미이다. [자료사진 - 심규섭]

김홍도의 몇몇 그림에는 학(鶴)이 등장한다.
김홍도가 학을 그린 것은 신선도와 무관하지 않다. 학은 바로 신선의 세계를 뜻하기 때문이다. 전설로 전해지는 신선들의 모습을 그린 신선도는 이상적인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신선을 그리지 않고 학만 그려도 신선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학은 그야말로 모든 신선의 총합인 것이다.
예로부터 학은 신선의 상징이었다. 북송 때 시인인 임포는 매화와 학을 사랑해 ‘매처학자(梅妻鶴子)’ 즉, 매화를 아내로, 학을 자식으로 삼은 사람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매화는 지조와 절개의 상징이고 학은 신선의 상징이다. 이 둘을 결합하면 지조와 절개를 지키면서 신선처럼 살고자 하는 것이다.
실제 김홍도가 그린 [취후간화도醉後看花圖]에도 학이 등장한다. 혹자는 이 고사인물도의 주인공이 임포라고 추정한다.

도교적 성향이 강한 신선도가 선비들에게 수용될 수 있었던 것은 신선의 삶과 선비의 삶을 일치시키고자 했던 흐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선도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신선은 권력과 부를 멀리하고 바람처럼 자유로운 삶을 사는 존재로 그려진다. 이런 신선의 모습은 ‘엄격한 예법과 자발적 청빈’을 추구했던 조선의 선비와 사상적으로 일치했다. 그러니까 선비가 추구했던 ‘유유자적悠悠自適’한 삶의 전형을 신선에 투사한 것이다.
학과 소나무, 붉은 해가 함께 그려진 [송학도松鶴圖]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송학도]가 출세와 장수를 뜻하는 그림이라고 해석하지만 내 견해는 조금 다르다.
학은 신선의 상징이고, 소나무는 변치 않는 지조와 절개를 뜻하며, 붉은 해는 시간의 영원성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보면 [송학도]는 ‘지조와 절개를 지키며 유유자적한 삶을 영원토록 추구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그야말로 선비의 그림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관복의 흉배에는 두 마리의 학이 그려져 있다. 전체적인 그림은 [해학반도도]를 압축해 놓은 형상이다. 여기서 학은 대부분 문관의 상징이라고 해석한다. 무관의 흉배에는 표범처럼 생긴 동물이 새겨져있다. 표범을 용맹스러움의 상징이라고 보면 전쟁을 수행하는 무관과 잘 어울린다. 하지만 문관 흉배의 학을 장수와 출세로 해석하면 신하인 자가 스스로 오래 살고 출세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꼴이 된다. 이것은 염치가 없는 행동이라 사회적 응징을 받는다. 조금 넓게 보면 [해학반도도]의 ‘학처럼 하늘의 뜻을 받아 태평성대를 만드는 사람’, 좁게는 ‘권력과 부귀라는 세속적 욕망을 절제하면서 태평성대를 이루기 위해 실천하는 자’로 해석하는 것이 더욱 자연스럽다.

어쨌든 선비는 신선이 되고자 했고, 백성들은 신선에게 복을 구하는 존재로 수용했다. 이것은 지배세력인 선비가 정신적, 물질적 가치를 만드는 사람이고 백성은 그런 선비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는 관계와 비슷하다.

▲ 김홍도/ 고사인물도 8폭 중 취후간화도/수묵담채/18세기.
‘술에 취한 후 꽃을 보다’라는 제목의 고사인물도이다. 고사인물도는 옛 기록에 나온 훌륭한 인물의 삶이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북송 때 임포라는 시인이라고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 임포는 매화와 학을 좋아해서 [매처학자梅妻鶴子]로 불리던 사람이었다. [자료사진 - 심규섭]

김홍도의 신선에 대한 내면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그림은 [단원도]이다.
[단원도]에서 ‘단원’은 김홍도의 집을 뜻한다. 이 그림은 1784년 안기 찰방 재직 시 몇 년 전 일을 추억해 그린 것이다. 그림의 배경은 3년 전인 1781년 봄, 그의 나이 37세 때 서울 성산동 자락으로 추정하는 곳에 마련한 자신의 초옥 전경이다. 이곳에서 강희언과 창재 선생 정란 등과의 모임을 회상해 그린 것으로 거문고를 연주하는 이가 바로 김홍도 자신이다.
뜨락에는 연이 자라는 연못이 있고, 오동나무, 소나무 그리고 대나무와 파초까지 심어져 있다. 담장 밖에는 옆으로 기운 버드나무도 있다. 앞마당에는 고고한 자태의 학이 유유히 노닐고 있다. 연못에 연꽃이 없는 것은 5월이란 계절 때문이다.

▲ 김홍도/단원도/78.5*135/종이에 수묵담채/1784.
김홍도의 집안 마당에 학이 노닐고 있다. 실제 김홍도가 학을 키웠는지 아니면 상상으로 그려 넣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어떤 기록에는 학을 잡아 키우는 방법 따위가 유행한 적이 있다고 한다. 동료 화가들과 술을 마치며 놀았던 기억을 그림으로 표현한 이 그림 속에 학이 등장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집안에 학이 있다는 것은 그 집이 곧 신선세계이고 집주인이 신선이라는 의미이다. 학은 신선과 선비를 뜻하는 이중상징을 가지고 있다. [자료사진 - 심규섭]

그림 속의 풍경은 그야말로 현실 속의 신선세계이다. 학, 괴석, 오동나무, 소나무, 대나무 따위는 [십장생도]의 주요 소재이고 연못, 파초, 버드나무는 선비들의 유유자적한 삶의 상징이었다.
신선도가 이상적인 세계라면 김홍도의 집은 현실의 세계이다. 그런 현실세계에 학을 그려 넣음으로 해서 신선들이 사는 세계로 보이도록 한 것이다. 학이 신선의 세계를 드러내는 상징이라면 신선세계에 사는 사람은 당연히 신선이다. 그렇다면 그림 속의 신선은 이 집의 주인이자 거문고를 타는 김홍도 자신이다.
과연 김홍도는 신선이 되고자 한 것일까?
그림 속의 모든 장치는 김홍도가 신선세계에 살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내면은 복잡하다.
김홍도는 신선이 되고자 한 것은 엄밀히 말해 진짜 신선이 아니라 선비가 되고자 한 것이다. 파초, 버드나무는 전형적인 선비의 상징인데 여기에 김홍도는 거문고를 타는 모습까지 연출하면서 선비의 풍모를 보이고자 한다.
몰락한 무반집안을 출신배경으로 가진 김홍도는 화원이 되면서 중인계층이 된다. 중인은 선비라는 사회적 지위를 누릴 수 없었다. 궁중화원인 김홍도가 어진을 그린 공으로 받은 관직은 고작 종6품의 찰방인데, 찰방은 요즘과 비교하면 철도청 소속의 작은 역장에 불과하다.
그림 속에는 선비가 아닌 김홍도가 선비처럼 살고, 선비처럼 보이게 하려는 소리 없는 항의 혹은 강력한 의지가 느껴진다.
조선시대의 선비는 지배세력이었다. 하지만 중인계층의 화원인 김홍도는 지배세력이 될 수 없었다. 그림으로 최고의 경지에 올라도 여전히 현감이라는 말단관리 밖에는 되지 못했다.
이것은 의관, 역관, 상인, 전문기술자, 서얼, 실무행정가, 말단군인 따위의 중인계층들도 같은 처지에 있었다. 또한 주류세력에 밀려나 관직을 얻지 못한 힘없는 선비, 몰락한 양반들도 중인계층과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청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국제정세나 흐름을 알고 있었고 무역이나 장사를 통해 경제적 여유와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이들은 천주교로 대표하는 서구의 새로운 사상을 수용하고 상업, 과학 따위의 실학을 추구했던 진보적인 지식인이기도 했다.
정조는 이런 새로운 세력과 힘을 합쳐 정치개혁을 이루고자 했던 왕이다.
중인들은 무리를 지어 교류하면서 여항문화를 만들고 정조와 호흡을 맞추면서 정치적인 세력을 확장해 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기존 세력의 벽은 거대하고 단단했다.
정조가 갑작스레 죽으면서 개혁정치는 실패했고 대대적인 숙청작업이 시작되었다. 진보적인 선비들과 중인들은 체제전복이란 죄명으로 사형을 당하거나 살기 어려운 곳에 버려졌다.

김홍도의 학(鶴)그림은 정치적인 성격이 강하다.
학은 선비의 상징이자 지배 권력의 상징이다. 중인계층이 지배 권력의 상징인 학을 그림으로 그리고 감상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체제를 부정하는 모습으로 보일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김홍도는 전통과 현실을 그림 속에 절묘하게 결합시키면서 숙청의 화살을 피해갔다. 그래서 김홍도는 자신의 집을 그린 [단원도]보다 북송 때 시인인 임포가 등장하는 [취후간화도]를 먼저 그렸을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중인들은 김홍도의 학(鶴)그림을 감상하면서 새로운 세상에 대해 은밀한 교류를 했을 것이다.
탁월한 예술적 능력을 소유했던 김홍도는 정조와 만나면서 세상의 중심으로 들어간다. 그 과정에서 숱한 명작을 남겼다. 김홍도만큼 자신의 모습을 많이 그린 화가는 없다. 그만큼 정체성이 뚜렷했고 자신감이 충만했다.
김홍도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진정한 예술가이자 개혁가였다. 김홍도의 꿈은 개인의 꿈이 아니었다. 정조와 규장각 세력들의 꿈이고 동시에 중인들과 백성들의 꿈이었다. 이들은 자기희생과 헌신을 바탕으로 모든 세상 사람들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는 태평성대를 추구했다.
말년의 김홍도는 비참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든든한 후원세력이었던 정조는 이미 죽고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홍도의 삶은 찬란하고 아름다웠다.
세상을 온 몸에 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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