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부가 판문점 남측지역 '자유의 집'에 '판문점 갤러리'를 1일 개관했다.

'판문점 갤러리'는 자유의 집 4층에 마련된 사진전시관으로 △판문점 조감도, 디지털방명록, 주요인사 방문기념 사진, △판문점 남북회담 정사진, 동사진, 회담사료, △정전협정과 판문점 역사 등을 담은 사진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된 사진들은 통일부, 국가기록원, 대한접십자사, 군사정전위원회, 중립국감독위원회, 현대아산, 체코문화원 등으로 부터 총 192점을 기증받았으며, 특히 회귀본이 많아 사료적 가치가 높다는 것이 통일부의 설명이다.

다음은 통일부가 제공한 '판문점 갤러리'에 전시된 주요 사진들이다.

'박정희 대통령, 북측 박성철 제2부수상 접견'(1972년 5월 31일)

▲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발표 전, 박정희 대통령이 북측 박성철 제2부수상을 청와대에서 만났다. [사진제공-통일부]

1972년 5월 남북은 서울과 평양에서 비밀리에 정치회담을 가졌다. 5월 2일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방북, 김일성 주석과 김영주 당 조직지도부장을 만났다. 뒤이어 29일 북측 박성철 제2부수상이 방남, 31일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다.

그 결과 남북은 7.4공동성명을 발표했으며, 남북조절위원회가 설치된 이후 박정희 대통령과 박성철 제2부수상은 같은 해 12월 서울에서 두 번째 만남을 가졌다.

'남북 통신선'(1985년 11월 19일)

▲1985년 11월 19일 판문점 지역의 남북 통신선 작업 모습. [사진제공-통일부]

남북은 1971년 9월 20일 적십자 1차예비회담을 통해 판문점 남측 자유의 집과 북측 판문각에 각각 연락사무소를 개설하고 직통전화 2회선 가설에 합의, 22일 처음 설치.개통했다.

이후 1972년 4월 29일 서울-평양을 잇는 직통전화가 비밀리에 개통됐고, 남북간에는 적십자 중앙기관 2회선, 남북 적십자회담용 통신망 18회선, 판문점 연락사무소간 2회선, 남북조절위 1회선 등 총 23회 통신선을 유지했으며, 꾸준히 증설돼 33회선에 이른다.

이밖에도 군 통신선은 서해지구 4회선, 서해상 우발충돌 방지용 2회선, 판문점 채널 5회선, 동해지구 2회선 등이 있다. 이 사진은 1985년 11월 남북 통신선 정비작업 장면을 담았다. 

'팀스피리트 한.미 연합군사연습에 대항한 북한 경비병의 철모'(1993년 3월 13일)

▲ 1993년 '팀스피리트 한.미 연합군사연습'에 대항하기 위해 북측은 준전시상태를 발동했다. 이에 판문점 북측 경비병들도 철모를 쓰기 시작했다. [사진제공-통일부]

1993년 3월 한.미는 팀스피리트 연합군사연습을 실시했다. 이에 북측은 2월 '최고사령관 명령 33호'를 발동, 전군에 준전시상태준비를 지시했으며, 이어 '최고사령관 명령 34호'를 내려 준전시상태를 전군.민으로 확대했다.

그리고 3월 11일 비무장지대 항의방송, 12일 전차 10대와 1백여 명의 인민군이 비무장지대 북방한계선 북쪽 지역에서 무력시위 전개 등으로 대응했다.

이어 13일 오전부터 판문점지역 북측 경비병들이 철모를 쓰기 시작했다.

'北 '조선인민군 판문점대표부' 설치 항의를 위한 군사정전위 제510차 비서장회의'(1994년 6월 6일)

▲ 북측이 '판문점 대표부'를 설치한다고 통보한 데 대해 유엔군사령부는 정전위원회 비서장회의를 열고 항의하려 했으나 북측의 불참으로 열리지 못했다. [사진제공-통일부]

1994년 유엔군사령부는 북측이 군사정전위 대체기구로 '조선인민군 판문점대표부'를 새로 설치했다고 통보한 데 대해 정전위원회 비서장회의를 열기로 했다.

여기서 유엔사측은 북측의 판문점대표부를 인정할 수 없으며, 정상적인 정정위 운영을 촉구할 예정이었으나 북측의 불참으로 회의는 열리지 못했다.

앞서 군사정전위원회는 1991년 3월 유엔군쪽 수석대표를 미군 장성에서 한국군 장성으로 바꾼 뒤 1992년 5월 제460차 회의부터 북측 대표가 참가하지 않아 공전되어 왔다.

또한, 경미한 정전협정 위반사항을 다루던 대령급 비서장회의도 1992년 9월 508차 회의를 끝으로 열리지 않았으며, 1994년 4월 북측은 군정위 철수를 통보했다.

이어 북측은 군정위를 대체해 '조선인민군 판문점 대표부' 설치를 통보했으나, 유엔사 측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김일성 친필비' 제막식' (1995년 8월 11일)

▲ '김일성 친필비'가 판문점 북측지역 통일각 인근에 세워졌다. [사진제공-통일부]

'김일성 1994. 7. 7.'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김일성 친필비'가 판문점 북측지역 통일각에 1995년 8월 11일 세워졌다.

'김일성 친필비'가 세워지던 당시는 해방 50주년으로, 판문점에서 '8.15민족통일대축전'이 열리기도 했다. '친필비' 제막과 함께 12일 '김일성 유훈관철대회', 13일 백두산 출정식 등이 열렸으며, 판문점에서 대대적인 행사가 진행됐다.

당시 남측에서 한총련 소속 정민주, 이혜정 학생 2명이 밀입북해 행사에 참가한 바 있다.

'김일성 친필비'는 김일성 주석이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이와 관련된 내용을 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급작스런 사망으로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지지 않았다.

북측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김일성 친필서명' 20돌을 맞아 남북관계 개선을 촉구했다.

'금강산.개성관광 남북 실무회담'(2010년 2월 8일)

▲ 남북은 2010년 2월 개성에서 금강산.개성관광 실무회담을 가졌지만 서로의 입장만 확인한 채 결렬됐다. [사진제공-통일부]

2008년 박왕자씨 피격사건으로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고 뒤이어 개성관광도 중단된 뒤 남북은 2010년 2월 8일 개성 남북경협협의사무소에서 '금강산.개성관광 남북 실무회담'이 열렸다.

실무회담에 남측에서는 김남식 교류협력국장(현 통일부 차관), 북측에서는 강용철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참사가 마주했지만 성과없이 결렬됐다.

'북한 주민 송환'(2013년 7월 5일)

▲ 2013년 7월 동해 상에서 구조된 북한 주민 3명이 판문점을 통해 송환됐다. [사진제공-통일부]

2013년 7월 5일 북한 주민 3명이 판문점을 통해 북측으로 돌아갔다. 이들은 7월 3일 동해 상에서 소형어선을 타고 조업을 하다 전복되며 조난, 인근 수역을 지나던 남측 민간 화물선에 의해 구조됐다.

이들 송환은 남북 개성공단 실무회담을 열기로 한 전날이어서 주목받았다. 지금도 구조된 북한 주민들은 판문점을 통해 송환되고 있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 북측의 고압선 설치'(1985년 8월 5일)

▲ 1985년 8월 북측이 '돌아오지 않는 다리'에 고압선을 설치, 접근을 차단했다. [사진제공-통일부]

남북 군사분계선을 가로지르는 다리인 '돌아오지 않는 다리'. 본래 이름은 '널문다리'였으나 1953년 포로송환이 이루어지면서 포로들이 한 번 건너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968년 푸에블로호 선원들이 이 다리를 건너왔으며, 1976년 미루나무 사건 발생 전까지 북측이 판문점으로 들어오는 용도로 사용됐다. 그 뒤 북측은 1985년 8월 '돌아오지 않는 다리'에 고압선을 설치해 접근을 막았다.

판문점의 북측 경비병 그리고 쌓인 눈을 치우는 군인들

▲ 판문각에서 남측을 주시하는 북측 경비병들. [사진제공-통일부]

▲2012년 12월 판문점에 쌓인 눈을 북한 군인들이 치우고 있다.  [사진제공-통일부]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