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는 민화를 속화(俗畵)라고 불렀다.
민화는 일본인 문예가의 허접하면서도 간교한 논리에서 나온 용어이고, 요즘 말로 다시 쓰면 ‘대중그림’이라고 부를 수 있다.
대중그림이 성행하기 위해서는 당대의 최고급 미술이 바탕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상부구조에 속한 정치, 경제와 관련된 미술적 변화가 아래로 흘러내리면서 대중미술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매스미디어와 같은 대중매체가 없고 백성들 간의 교류가 약했던 조선시대에 아래로부터 독립적인 미술이 발전했을 것이라는 쓸데없는 상상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민화의 시작과 끝은 언제쯤일까?
일반적으로 민화의 전성기를 대략 18세기에서 19세기로 잡는다. 이렇게 애매하게 시기를 잡다보니 짧게는 100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 길게는 200년 정도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모든 문화가 그렇듯이 시작점에 해당하는 사건이나 정치적 현상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또한 어느 변곡점을 중심으로 끝물을 타는 시기가 있다.

민화의 출발 시기는 정조의 재임기간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정조의 재임기간은 24년이다. 연대는 1776~1800년도이다.
이 시기의 정치적 상황은 정조의 개혁정치와 맞물려있다. 좀 더 쉽게는 전쟁을 치렀던 청나라와 일본과의 관계가 복원되었고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받아드리고자 하는 실학사상, 북학파가 득세하기도 한다. 또한 1791년에는 육의전을 제외한 금난전권을 철폐하여 시장경제가 활성화 될 수 있는 제도가 만들어진다. 서얼차별을 없애고 도망간 노비를 추적하던 노비추쇄법과 국가 소속의 관노비를 폐지하였다.
이것은 단지 약자를 보호하려는 인도주의적 관점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서얼, 중인, 상인, 노비들의 사회적 진출 욕구를 반영한 결과로 이해해야 한다.
특히 정조는 비대하고 강력한 노론세력을 견제하고 자신의 개혁정치를 추진하기 위해 다양한 대중정치를 기획하고 실행한다. 80회 이상의 출궁을 통해 백성들과 직접 만나고 용주사의 재건을 통해 민심을 살핀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 잔치상을 차려준다는 명목의 화성행차는 대중정치의 최고점을 보여주는 행사였다. 정조의 대중정치와 대중미술의 발전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미술적인 사건으로 보면, 왕의 직속 내각인 규장각 소속의 [자비대령화원] 제도가 확대 개편된다. 도화서가 예조 소속으로 궁궐 밖에 있었는데 반해 [자비대령화원]은 궁궐 내부에 있었다.
국가미술기관인 도화서에서 뛰어난 화원을 선발했는데 ‘녹취재’ 시험문제에 시장에 내다 팔 수 있는 그림을 그리라는 주문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대부분의 ‘녹취재’ 시험문제는 규장각이나 왕이 직접 만들어 내렸다. 이런 방식을 통해 [자비대령화원]은 의정부나 예조관리의 간섭을 철저히 배제시키고 오로지 왕의 권한에 복속시켰다.
이는 정치기획을 담당했던 규장각 관리들과 밀접한 관계나 왕과의 교류를 통해 미술적 과제를 수행할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져 있었다는 의미이다.
김홍도가 사신행렬에 끼어 청나라와 일본을 갔다 온 시기는 대략 1785~90년도로 추정하는데 일본의 [우키요에]나 청나라의 [다보각경도]를 그려 정조에게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1790년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명복을 빈다는 이유로 불교사찰인 용주사를 재건하고 후불탱화를 그렸는데 서양화법이 들어간 이 그림을 김홍도, 이명기가 주도한다.
1791년에는 정조가 [책가도]에 대해 신하에게 질문과 답을 하는 기록이 나온다.
또한 김홍도가 6m에 가까운 대작 [군선도群仙圖]를 그린 시기가 1777년이고 서왕모의 신화와 신선도가 포함된 [요지연도]가 가장 활발하게 창작되던 시기도 1770~1800년 무렵이다.
김홍도는 신선도의 대가였다. 이렇게 많고 다양한 신선도를 그릴 수 있는 배경에는 정조나 규장각의 든든한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홍도는 유학의 가치를 배운 화원이었다. 유학은 학문의 힘으로 인격적 완성을 이루고 세상을 통치하고자 했다. 당연히 일체의 종교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김홍도의 신선도에는 도교의 핵심인 신선뿐만 아니라 불교의 보살이나 수도승도 등장한다. 이런 그림은 선비들의 강력한 반발을 일으킬 수 있었다. 반면 민가에 퍼져있던 불교나 도교사상에 합리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불교나 도교가 어느 정도 합리성을 가진다는 것은 곧바로 기존의 질서에 반발하는 세력을 내편으로 만드는 정치적 효과가 있다.

▲ 민화의 바탕이 된 그림은 궁중회화이다. 선비들의 정서를 담은 수묵화는 색이 없고 장식성이 떨어지며 무엇보다 정형화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이에 반해 궁중회화는 진채이면서도 오랜 세월을 통해 단순화되고 추상화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장식성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이런 궁중회화의 특성은 화려하고 장식성이 강하며 여러 상징을 요구하는 민화와 잘 맞았다. 또한 청나라를 통해 들어온 책가도나 요지연도는 중산층의 입맛에 잘 녹았고 김홍도는 도교와 불교의 결합을 통해 고급미술의 영역을 넓혀주었다. [자료사진 - 심규섭]

김홍도의 군선도는 이전의 신선도나 요지연도와는 큰 차별을 보인다.
그것은 바로 배경을 과감하게 없앤 것이다. 해상군선도의 경우에도 바다만 그리고 나머지 배경은 생략된다. 이러한 창작기법은 김홍도의 풍속화에 잘 나타나있다. 인물만 표현하고 배경을 생략할 수 있었던 것은 김홍도 자신의 탁월한 화면구성능력의 결과이겠지만 어진이나 공신의 초상과 같은 궁중회화와의 간격을 만들어서 인물화가 대중화하는데 기여한 측면이 있다.
또한 배경을 생략하면 그림은 단조로워지면서 동시에 쉽게 그릴 수 있으며 주제를 명쾌하게 전달할 수 있는 직관성이 높아진다. 민화의 직관성은 선명하고 화려한 색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배경의 과감한 생략도 큰 몫을 한다.
특히 청나라에서 들어온 [책가도]나 [요지연도]를 비롯한 [호렵도] 따위는 원래 궁중회화가 아니었기 때문에 돈 많은 중인이나 양반들을 중심으로 민가에서 쉽게 수용할 수 있었다.

궁중회화나 화가들의 그림이 대중들에게 수용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첫째는 미술작품의 필요성이다.
미술작품은 철학적 가치를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만든 것이다. 또한 이런 상징적 내용을 담은 그림은 숭배의 대상이 되고 주술성을 가진다. 궁궐과 양반들이 향유하던 고급미술의 수용을 통해 신분상승이나 존재의 가치를 높이고자 하는 욕구가 사회적으로 넘쳐나고 있었다. 이것은 기존의 양반세력에 비해 신분이 낮거나 불이익을 당한 세력일수록 강했을 것이다. 또한 무역이나 상업, 전문직종을 통해 부를 쌓은 중인들이나 양민들은 재물을 통해 원초적인 욕망을 구현하고자 했다. 장수, 부귀, 다산, 부부금슬, 형제우애, 벽사 따위에 대한 욕망에 불을 지르는 사회적 환경이 형성되고 있었다.
이것은 부동산, 주식투자 따위로 졸부가 된 현대인에게도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돈을 벌면 집과 자동차를 사고 그 집을 백과사전과 유명하다는 미술작품으로 채운다. 명품으로 치장하고 한 번도 보지 않았던 오페라를 관람하고 전시장을 얼쩡거린다. 물질적 가치를 통해 정신적 가치를 얻으려는 자연스런 행위이다. 이렇게 정신적 가치를 높임으로 해서 자신의 수준을 양반이나 귀족 반열에 올려놓고 싶은 것이다.

둘째는 구매력이다.
대만정벌문제로 청나라와 일본은 사이가 좋지 않아 교류가 끊어졌다. 이 때문에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서 중개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나라에서는 중개무역을 장려하기 위해 국가자금을 빌려줄 정도였다. 이것은 비록 영조시기이긴 하지만 중개무역, 조공무역, 인삼무역을 통해 얻은 막대한 이익이 사회 곳곳에 퍼졌고 상인이나 역관, 의관 따위의 많은 사람들이 부자가 되었다. 부자가 망해도 삼대를 간다는 말이 있듯이 중개무역이 끝난 이후에도 부유한 상인집안의 자녀들은 기생들과 놀기에 바빴다.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에는 이렇게 흥청거리는 사회분위기가 잘 표현되어 있다. 이들은 재부를 이용해 자신의 신분이나 가치를 높이고자 유명한 화원들과 교류하면서 그림을 사 모았다. 그러니까 일부 양반계층에 한정되었던 미술시장이 급속히 팽창한 것이다.

셋째, 대중들의 입맛이나 정서에 맞는 그림이 있어야 한다.
민가에서 소통된 작품은 오봉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궁중회화가 포함되어 있다. 화가들의 수묵화보다는 색이 화려하고 장식성이 높은 채색화가 인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은 너무 비쌌기 때문에 유통에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화상(畵商)들은 화려하면서도 직관적이고 장식성이 높은 그림을 대량으로 복제하여 팔았다. 이 복제하는 역할을 지전이나 표구사에 소속된 화공들이 맡았다.
화상들은 중국과 일본에서 수입된 값싼 물감과 종이를 활용하고 동시에 미술수요층의 정서를 파악하여 변화하는 시장의 흐름에 적응해 나간 것이다.
특히 대중들은 하나의 작품에 다양한 상징이 결합한 그림을 선호했다. 이것은 한 점을 사는 가격으로 여러 점의 내용을 얻을 수 있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책 중심의 그림에 화려한 기명(器皿)이나 출세의 욕망을 담은 상징이 들어가고, 궁중모란도에 장수를 상징하는 바위가 들어갔다. 또한 가로그림 중심의 큰 그림을 작은 세로그림으로 바꾸기도 했다. 이것은 작품의 가격을 낮추어 판매량을 늘이려는 고도의 상술과 연관되어 있다.

▲ 민화가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정조의 정치개혁과 신분상승을 바라는 중산층이 만났기 때문이다. 또한 값싼 미술재료가 청나라와 일본을 통해 대량 수입된 것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민화의 시작에 궁중회화와 화가들이 있었고 궁중회화의 전통이 끊기면서 민화의 전성기도 막을 내린다. [자료사진 - 심규섭]

민화의 끝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민화는 궁중회화와 화가들의 작품을 통해 양분을 얻으면서 발전했다. 화공이나 떠돌이 환쟁이는 독창적인 작품을 창작할 능력이 없었다. 화공 중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으면 화가로 활동을 했다.
민화에 큰 타격을 주는 사건은 [자비대령화원] 제도와 [도화서]의 철폐이다.
[자비대령화원] 제도는 1881년에 없어졌고, [도화서]는 1884년 갑오경장 때 없어진다. 하지만 일시적으로는 오히려 미술시장이 풍부해지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직업을 잃은 화원들이 생계유지를 위해 민화시장에 적극적으로 뛰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직 화원들은 곧 노쇠해졌고 젊은 피는 수혈되지 않았다.
공식적으로는 1910년 조선이 일본에 합방되어 망했을 때 민화의 생명도 끝났다고 본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민화의 생명은 질겼다.
1920년 창덕궁 재건 당시에 그려진 [봉황도], [백학도], [조일선관도], [삼선관파도]이라는 벽화에는 궁중회화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도화서가 없어진지 30년이 넘었지만 궁중회화의 전통은 스승과 제자로 전수되는 형식으로 가늘게 이어지고 있었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고 난 후 일본제국주의는 무단통치에서 더욱 교묘해진 통치방식인 문화통치로 전환한다.
조선총독부가 주관하는 ‘조선미술전람회’가 1922년에 시작된 것이다. 서양화, 수묵화, 서예를 중심으로 하는 총독부 주도 공모전은 궁중회화의 맥을 완전히 끊어놓은 역할을 했다. 초창기에는 심사위원 중에서 조선인도 있었지만 1926년부터는 전원 일본인만으로 심사위원이 꾸려졌다. 이제 식민지 조선을 대표하는 그림은 ‘조선미술전람회’의 입상작품이 된 것이다.
이후 민화는 궁중회화의 전통성을 잃어버리고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상한 작품들로 대체되어 갔다.
그러니까 민화가 실질적으로 끝난 시기는 1920년도로 잡는 것이 적절하다.
약간 애매한 면이 없진 않지만 민화의 출발과 끝을 굳이 규정하자면 1780년에서 1920년이라고 본다. 약 140년 정도이다.
어쨌든 민화는 세계미술사에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독특하면서도 대단한 대중미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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