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음으로 북측의 대규모 대표단이 남측에 와서 치른 2002년 8.15민족공동행사에 참석한 조명애. [자료사진 - 민족21]

2002년 8월 14일 오전 10시 46분 고려항공 TU154편을 이용해 서울에서 개최된 8.15남북공동행사 북측 대표단이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분단 57년 만에 서울에서 개최된 8.15남북공동행사에 북측 대표들이 처음으로 참가하게 된 것이다.

남북이 함께 한 첫 8.15에서 남측 언론과 네티즌들에게 크게 화제가 된 ‘북녘의 스타’가 탄생했다. 조선국립민족예술단 ‘무용배우’ 조명애가 그 주인공이었다. 북측대표단 기수단의 일원으로, 문화공연에서 무용수로 나온 그녀는 대회기간 내내 ‘남녘 팬’들의 시선을 몰고 다녔다. 그는 가냘픈 외모와 화사한 웃음으로 수많은 팬클럽을 탄생시켜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다음 카페 ‘조명애 팬클럽’ 가입자수는 1만 7천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

2002년 첫 서울 방문

남쪽 땅을 처음 밟은 조명애는 평양으로 돌아간 후 다음과 같은 소감을 밝혔다. “서울의 비행장에 내린 순간 통일이 된 그런 감정을 느꼈단 말입니다. 6.15공동선언 받들고 우리 민족끼리 반드시 통일을 이룩하자는 그런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었습니다.”

조명애는 말수가 적고, 수줍음을 많이 타는 여성이었다. 그와 인터뷰를 한 기자는 “질문을 하면 짧게 한 마디 대답하고 이내 고개를 숙이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을 보였다”라고 했다.

조명애는 인민학교(현재의 소학교) 시절부터 무용을 했다. 평양의 학생소년궁전에서 무용소조(동아리)에서 활동하던 그녀는 뛰어난 재능이 인정되어 평양에서 해마다 진행되는 학생소년들의 ‘설맞이 공연’에도 출연했다.

중학교를 마치고 곧바로 평양음악무용대학에 진학했다. 1999년 대학을 마친 후 국립민족예술단에 입단했다. 국립민족예술단은 민족의 전통 예술에 중점을 둔 창작공연으로 주로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중에서도 장고춤이 유명하다.

평범한 노동자의 딸

▲ 역사상 처음으로 2002년 10월 평양 단군릉에서 개최된 개천절 남북공동행사에서 조명애가 부채춤을 선보이고 있다. [자료사진 - 민족21]
조명애는 자기 가족들에 대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노동자, 사무원의 가정”이라고 소개했다. 그의 아버지, 어머니는 해방 전 부모를 잃고 고아로 자랐다고 한다. 아버지는 해방 후 나라에서 운영하는 학원에서 배웠고, 어머니는 옆집에 돌봐 주는 사람이 있어 양딸로 자랐다고 한다.

“공연이 예정돼 있을 때는 오전에 기초훈련을 하고 오후에는 작품별 안삼불(앙상불)을 합니다. 공연준비가 없을 때는 항상 소품 창작에 힘을 기울입니다. 작품 창작이 없을 때는 개별훈련을 하지요. 물론 학습도 합니다. 춤을 출 때 제일 힘든 게 기교동작입니다. 노력하는데 잘 안 된단 말입니다. 토요일에 퇴근하면서 동료들과 약속을 한단 말입니다. 무리를 짓고 놀러 나갑니다. 그런데 혼자 지내는 일도 많지요.”

국립민족예술단의 북측 관계자는 2003년 <조선신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예상외로 솔직한 대답을 하기도 했다. “사실 우리는 그(조명애)가 고와서 예술단에 받아 들였다. 조선 녀성의 기본인 계란형의 얼굴이 큰 매력이었다.”

그러나 외모보다도 그가 예술단의 중견 단원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꾸준한 연습의 결과였다. 국립민족예술단에 입단한 후 초기에 힘들어하던 조명애는 3년의 숙련과정을 거쳐 실력이 급성장했다고 한다.

정작 북에서는 잘 몰라

처음 서울에 와서 문화예술공연에 참가해 남쪽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을 때만해도 조명애가 남쪽에서 그렇게 ‘유명세’를 탈줄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응원단으로 오지 않았던 조명애는 그해 10월 3일 평양 단군릉에서 열린 개천절 남북공동행사의 개막공연에 모습을 드러냈다. 2년 뒤인 2004년 6월 26일부터 29일까지 강원도 고성군 온정리 김정숙휴양소에서 열린 남북농민통일대회에 북측 문예단의 일원으로 참가해 부채춤을 선보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북측 관계자들도 조명애를 잘 모를 때였다. 2003년 9월 방북했을 때 북측 민족화해협의회 관계자에게 조명애에 대해 묻자 “조명애가 누구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조명애가 본격적으로 얼굴을 알리게 된 계기는 북한의 대표적 기업인 조선부강회사의 홈페이지에 광고모델로 등장하면서부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2004년 7월 경 해외에도 알려진 ‘금당-2 주사약’을 생산하는 조선부강회사의 광고에 등장한 것이다.

▲ 조명애가 광고 모델로 나오는 미래코스팜의 ‘머드팩 화장품’. [자료사진 - 민족21]

▲ 2005년 휴대폰 광고를 함께 찍은 이효리와 조명애. [사진 - 제일기획]
그리고 다음해 조명애는 분단이후 남쪽에서 최초로 광고 모델로 데뷔한 북한 예술인이라는 이정표를 남기게 된다. 그녀는 가수 이효리와 함께 ‘하나의 울림’이라는 주제로 총 3편으로 제작된 휴대전화 광고를 찍어 남쪽에서 다시 화제의 인물로 떠올랐다. 당시 이효리는 조명애에 대해 “아이스크림도 함께 먹고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면서 오래된 친구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조명애가 남쪽의 광고에 나오기까지 숱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아직까지 그 과정을 소상하게 밝힐 수 없지만 2004년 하반기부터 2005년 중반기까지 10개월 간 남북대화가 중단된 가운데 성사된 이 광고는 남과 북의 관행상 쉽지 않은 곡절을 겪어야 했다.

북녘 여성으로 첫 남쪽 TV, 화장품 광고 모델

첫 광고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조명애는 국내 화장품 광고 모델로 등장했다. 북한의 대표적 청정지역인 평안남도 온천군에서 류황감탕(유황 성분의 진흙뻘)을 수입해 화장품용 머드로 가공 판매하는 미래코스팜의 ‘머드팩 화장품 모델’로 선정된 것이다.

2년 뒤 조명애는 남북합작드라마인 ‘사육신’에 출연해 북한 여성으로서는 이례적으로 국내에서 ‘스타급’ 반열에 올랐다. 북측의 인민배우들이 주연급으로 출연한 이 드라마에서 조명애는 김종서 장군의 손녀딸 ‘솔매’역을 맡았다.

▲ 남북합작 드라마 <사육신>에서 김종서 장군의 딸 ‘솔매’역으로 출연한 조명애. [자료사진 - 민족21]
원래 ‘솔매’는 역사서에 나오지 않는 가공의 인물. 그러나 <사육신>에 ‘(남측에서) 아는 얼굴이 하나라도 나와야 한다’는 KBS의 끈질긴 설득이 받아들여져 마침내 조명애의 ‘솔매’가 탄생됐다. 다행히 무용으로 기본기가 다져진 조명애는 말을 태우자마자 달리고, 수많은 격투장면도 대역 없이 소화해 북측의 감독도 상당히 흡족해 했다고 한다. 사실 남쪽 기준으로 보면 연기가 어색하기는 했다.

드라마 <사육신>을 끝으로 조명애는 남쪽의 관심에서 사라졌다. 결혼을 했을지도 모른다.
민족예술단 무용배우들은 대체로 스물 다섯, 여섯 나이에 시집을 간다. 물론 대다수는 결혼을 해도 무용배우를 계속한다. 무용배우의 일상이 훈련과 공연의 연속이기 때문에 결혼상대 역시 직업상 만나게 되는 사람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녀도 이제 서른을 넘었다.

그런데 최근 일부 언론과 인터넷에 다시 그녀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 인천 아시안게임에 북측 응원단 참가가 관심의 초점이 되면서부터다. 2009년 한 탈북자는 <자유북한방송>에 기고한 글에서 2008년 6월 마지막으로 조명애를 봤을 때 “위장병 때문에 고생해 병약하고 시름겨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며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 곳곳에 완연한 병색이 돌고 있었다”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약 사먹을 돈이 있으면 왜 저러고 있을까...하는 생각이 뇌리를 쳤다”라고 밝혔다.

근거 없는 일부 언론의 흠집내기 기사

최근 일부 언론과 일부 탈북자는 기고문에서 이 증언을 그대로 인용해 ‘북한 응원단’ 흠집내기에 활용하고 있다. 조명애가 남쪽에서 광고 촬영을 하는 등 많이 알려져 있지만 북쪽에서는 약값도 없이 제대로 병 치료도 못하는 열악한 상황에 있다며 북측 응원단의 겉모습에 현혹돼서는 안 되고 북한의 실상을 똑바로 봐야 한다는 ‘경고성’ 기사다.

실제로 이 기사를 읽은 누리꾼들은 “조명애,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니”, “조명애, 국내에서 활동하면 인기 많았을 텐데” 등의 반응을 보였다.

조명애가 약값도 없이 병 치료를 제대로 못했다는 게 사실일까? 일단 아닐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조명애는 1990년대 중반 이른바 ‘고난의 행군’시절에 대학을 다녔다. 북녘 사람들 누구나 그랬던 것처럼 어려운 시절이었을 것이다. 국립민족예술단에 처음 들어갔을 때는 제대로 월급이 나오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여건이 많이 호전된 상황이다.

▲ 2003년 초 <조선신보> 기자를 만나 2002년 8월 남북공동행사에 문화공연단으로 참가했던 경험과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때 북측응원단으로 참여했던 소감을 이야기하고 기념촬영하고 있는 리유경.조명애.임춘실 국립민족예술단원들. [자료사진 - 민족21]
국립민족예술단은 2010년 5월 노동절을 맞아 개선문 광장에서 축하공연을 가졌고, 노동당 창건 65주년을 맞아 동평양대극장에서 음악무용종합공연을 개최하기도 했다. 지난해 1월에는 베이징(北京), 톈진(天津), 상하이(上海) 등 중국 주요 도시를 1개월 간 순회 공연을 벌였다.

전통적으로 북한에서 예술인은 높은 대우를 받아왔다. 그녀가 속해 있던 국립민족예술단은 최근 몇 년간 활발한 공연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조명애가 만약 아직도 예술단원으로 활동한다면 위장병 약값이 없어 치료받지 못하는 일은 없다고 봐야 한다.

2002년 처음 봤을 때부터 그녀는 몸이 약해 보였다. 실제로 2005년 광고 촬영과 2007년 드라마 <사육신> 출연 당시 그녀는 위장병과 ‘피부 트러블’로 고생을 했다. 그렇지만 위장병이 있다는 것과 돈이 없이 약도 못 먹었을 것이라는 추측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인천 아시안게임에 북측 응원단이 참가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면 솔직하게 오지 말라고 하면 될 것을 애꿎은 조명애를 끌어들여 북측 응원단에 대해 흠집내기를 하는 태도는 남북관계 개선에 바람직한 보도가 아니다. 감정에 치우친 출처불명의 반북성 기사는 사실 보도를 생명으로 하는 언론 본연의 임무와도 맞지 않다.

가뜩이나 1차 실무회담이 결렬되면서 북측 응원단의 인천 아시안게임 참가가 불투명한 상황이다. 실무회담이 결렬된 후 북측이 선수단은 참가하지만 응원단 참가는 보류했다는 설도 나오고 있다.

통일단체와 시민단체들로 구성된 ‘2014 인천아시아경기대회 남북공동응원단 추진본부’는 “아시아 평화와 민족의 화해를 일궈나갈 한반도 평화 서포터즈가 돼 달라”며 공동응원단을 모집하고, 북측 응원단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남과 북이 빠른 시일 안에 2차 실무회담을 열러 북측 응원단이 인천에 올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제2의 조명애’가 탄생한다면 남북관계 개선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2003년 조명애는 <조선신보>와 인터뷰에서 “순회공연을 하고 싶습니다. 북과 남이 대화를 해서 겨우 한 번씩 넘어갔다 오는 이런 정도가 아니고 말하자면 남쪽의 방방곡곡 쫙 돌아서 우리 예술의 위력을 과시하고 싶습니다”라는 포부를 밝혔다.

그녀의 소망처럼 북의 예술단들이 남쪽의 방방곡곡을 순회공연하고, 남쪽의 공연단체들이 북측 순회공연을 할 수 있는 날이 하루속히 오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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