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Daum영화]

여기 바다가 있다. 시퍼런 물결 넘실대며 회오리치는 바다가 있다.

그 이름이 명량이든 진도 해역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안개 자욱한 망망대해, 물살은 걷잡을 수 없이 요동치고, 귀곡성(鬼哭聲)처럼 울어대는 바닷바람 소리만 가득한 바다가 있다. 저 바다를 어찌할 것인가. 이제 눈물 없이는 떠올릴 수 없는 우리의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 임금은 의주로 도망가고 전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백성들의 도륙당한 시신은 산야에 가득한데, 미칠 듯 울어대는 저 바다를 어찌할 것인가.

이순신이 바다를 향해 말한다. 목이 잠겨서 말한다. 저 숱한 원혼들을 어찌할 것인고. 나라가 지켜 주지 못한 백성이 코가 잘리고 귀가 잘리고 목이 잘리어 구천을 떠돌고 있다. 우리 아이들은 기울어진 배 안에서 무섭다고, 살고 싶다고 했다.

저 침몰하는 조선의 진도 바닷가에서 애타게 이순신의 대장선을 바라보는 백성들의 시름 가득한 눈길이 진도 팽목항에서 노란 리본을 묶으며 세월호가 가라앉은 바다를 향해 자식의 이름을 부르는 애달픈 부모의 눈길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 [사진-Daum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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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100일이 지났다. 사고 이후 ‘바다’는 더 이상 보통명사가 아니게 되었다. 우리가 기억하는 바다에는 늘 비스듬히 기운 배가 떠 있다. 그런데 세월호 침몰 장소 맹골수도와 명량해협이 같은 진도 유역이라는 사실을 영화를 보고 알았다.

맹골수도는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맹골도와 거차도 사이에 있는 물길이다. 명량해협은 전라남도 해남군과 진도군 사이에 있는 좁은 해역으로, 물길이 암초에 부딪혀 튕겨 나오는 소리가 요란하여 바다가 우는 것 같다고 해서 울돌목이라고도 불린다.

맹골수도는 명량해협보다 수심도 깊고 암초도 없지만, 우리나라에서 명량해협 다음으로 조류가 세고 물살이 빠른 곳이라고 한다.

거기 바다 밑에 아직도 10구의 시신이 더 잠겨 있다. 그리고 유족들은, 가족들을 지켜 주지도 않았고 사고 이후 책임지지도 않는 나라의,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있는 광화문 광장에서 진상 조사 특별법을 요구하며 이 뙤약볕 아래 농성을 계속하고 있다. 제 몸 하나 추스르기에도 벅찰 유가족이 말이다.

두 번의 왜란을 겪으며 남은 것은 두려움과 패배 의식뿐이었던 당시의 조선처럼 세월호 침몰 이후 우리 사회는 바다보다 깊은 슬픔과 무력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 [사진-Daum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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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해전을 앞두고 이순신의 아들 회가 이 승산 없는 싸움에서 손을 떼기를 청할 때, 이순신은 말한다. “의리다.” 삼도수군통제사로 혁혁한 전과를 올리며 풍전등화 같은 조선의 운명을 구한 아비가 오히려 모진 고초를 당하고 백의종군의 굴욕까지 감내해야 했음에 임금에 대한 원망이 깊었을 아들의 마음을 헤아리며 이순신은 담담하게 말한다. “장수 된 자의 의리는 충을 좇아야 하고, 충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 임금을 위해서가 아니라 백성을 위해서라고,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진지한 가치든지 정색하고 거론하면 그 무게를 감당하고 책임져야 할 것이 두려워서인지 희화화시켜 버리는 게 근래의 풍조이지만, 모름지기 의리란 본래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 도리’라는 뜻이다. 이순신은 그 자신 성치 않은 몸으로, 임금이 끝내 그를 용납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면서, 모두 불가하다고 수군을 포기하라고 하는 마당에, 백성에 대한 의리를 생각한다. 의리를 위한 죽음을 생각한다.

박정희에 의해 역사에서 끌려나와 성웅으로 포장된 채 위풍당당하게 광장에 군림하던 그가, 박정희 시대 국가주의의 상징이던 그가 이렇게 고뇌하는 이순신이 되어 백성의, 국민의 곁으로 돌아왔다.​

▲ [사진-Daum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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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수도를 버리고 의주로 몸을 피했듯 그 역시 전멸한 수군과 바다에 대한 책임을 버리고 육군에 합류하여 살 길을 도모할 수 있었다. 나라가 패망해도, 식민지가 되어도, 그래도 굴욕은 잠시일 뿐 지배층들은 어떤 식으로든 목숨을 부지할 길을 찾을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은 어찌할 것인가. 어디로 피할 것인가. 결국 왜적의 칼끝에 목숨을 내맡긴 신세, 물러설 곳도 갈 곳도 없다. 조선 천지를 뒤흔드는 피비린내와 아비규환의 아우성을 생각하며 이순신은 임금에게 글을 올린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사옵니다.”

그렇게 그는 명량에 선다. 유일한 희망이었던 마지막 한 척의 거북선도 불타 버렸다. 더구나 한때 연전연승을 자랑하던 조선의 수군은 두려움에 한 번 발목을 잡히고서는 통제 불능의 오합지졸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 무엇이 저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것인가? 엄한 군율로 다그칠 것인가, 아니면 너그러움으로 다독여야 할 것인가. 두려움이 용기가 되지 않는 한, 침몰하는 조선의 운명은 건질 수 없다.

이순신은 탈영한 병사의 목을 친다. 그럼으로써 원칙을 저버린 온정주의와 모든 비겁과 회의와 변명을 베고자 했을 것이다. 그리고 한 순간의 연민과 타협이 불러올 더 많은 죽음과 패배를 생각했을 것이다. 지도자에게 필요한 것은 한때 흘리는 몇 방울의 눈물과 감정적인 수사(修辭)가 아니라, 전의를 상실한 병사들과 공포에 젖은 백성을 구조할 실제적 방안과 구체적 행동이다.

파죽지세로 밀어닥치는 왜적 앞에 임금은 백성을 버리고 제 살 길만 도모하는 상황에서, 선장은 배를 버리고 청와대는 컨트롤 타워가 아니라고 발뺌을 하는 상황에서, 절체절명의 골든타임에 해경은 윗선 보고에 매달리고 대통령은 행적이 확인 안 되는 상황에서, 이순신은 스스로 돌아갈 근거지를 불살라 버리고 퇴로 없는 싸움에 나선다. 330척과 12척의 싸움, 그 막막함과 질긴 두려움 한가운데 자신을 세운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으로 백성을 살리는 도화선이 되고자 한다.​

▲ [사진-Daum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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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극이 아무리 철저한 고증에 입각하고 사료에 충실한다 하더라도 역사적 사실의 틈새로 허구를 직조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 이 영화 역시 사실과 허구의 경계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가령 이런 부분이 그렇다. 드디어 330척 왜의 대군이 새까맣게 바다를 덮고 출정한다. 그리고 명량의 좁은 길목으로 적선 133척이 진입해 온다. 이미 결연히 죽기로 작정한 이순신의 대장선은 선두에 서서 홀로 1진과 2진의 적선이 연이어 공격하는 것을 막아낸다. 이게 가능한가? 이것이야말로 이순신의 용맹성을 좀 과장한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당시의 전황을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실제로 이순신의 대장선은 홀로 선두에 서서 왜군에게 포위된 채 고군분투하면서도 물러서지 않았고, 이순신의 다그침에 김응함과 안위의 배가 대장선을 구하러 왔으며, 나머지 배들은 승기(勝氣)가 잡히는 걸 보면서 합류한 정황은 사실인 듯하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들이 곧장 명량으로 밀어닥치는데 다른 배들은 멀리 물러나 구경만 하고 있었다.”고 하며, 대장선을 따르라는 초요기를 올려도 다른 배들이 응하지 않아 이순신이 격노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실이 허구보다 놀랍다.

임준영의 희생과 그의 벙어리 아내와의 감동적인 사연도 완전한 허구는 아니다. 모두 역사 속에서 길어올린 인물들이며, 벙어리 아내는 왜적에게 혀가 잘린 정씨 여인에 대한 기록을 바탕으로 창조된 인물이라고 한다. 역사가 바뀌는 순간에 이순신과 같은 위대한 인물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그 바탕에는 역사의 발톱에 유린당한 무수한 백성들의 고통과 이름 없이 헌신한 수많은 백성들의 사연이 아로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 [사진-Daum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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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승리한다. 영화는 긴장감을 고조시키기 위해 처절한 백병전을 그려내지만, 실제 승리는 그보다 훨씬 압도적이었다. 이순신의 전함은 단 한 척도 격침되지 않았지만 왜군은 133척 중 31척이 격침되고 90여 척이 반파되어 달아났으며 8천여 명의 전사자가 나왔다. 조선군은 전사자 2명과 부상자 2명이 나왔다고도 하고, 순천감목관 김탁과 이순신의 종 계생이 전사하고 안위의 전함에서 격군 7, 8명이 물에 빠져 죽었다고도 기록되어 있다. 어쨌든 그 피해는 극히 미미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승리에 대해 명나라 장수가 이순신의 공을 높이 사 포상하자 선조는 이렇게 말했다. “통제사인 이순신이 사소한 왜적을 물리친 것은 마땅히 그가 해야 할 일이니 큰 공이라 할 수도 없는데, 대인이 은단을 내리고 표창하여 기특하게 여기시니 과인의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이듬해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끌고 이순신은 자신의 배에서 최후를 맞는다.​

▲ [사진-Daum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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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본래 대대로 문관 벼슬을 하던 양반 집안 출신이었다. 당연히 문과 응시를 준비했을 그가 뒤늦게 22세에 무예를 배우기 시작, 그 유명한 낙마 부상 투혼 일화를 남기면서 늦은 나이로 무과에 급제해서 무인의 길을 가게 되지만, 그에게는 늘 문사(文士)의 기질이 흘렀던 것으로 보인다.

변방을 호령하던 김종서가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 / 만리변성(萬里邊城)에 일장검(一長劍) 짚고 서서, / 긴 휘파람 큰 한 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하고 호방한 기개를 노래한 반면, 이순신은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戍樓)에 혼자 앉아, /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적에, / 어디서 일성호가(一聲胡笳)는 남의 애를 끊나니.” 하고 우국(憂國)의 시름을 묘사했다.
그는 매일 일기를 썼고 틈틈이 시가를 읊었으며 때로는 가야금을 타며 음악에 심취하기도 했다고 한다. 류성룡은 이순신에 대해 “순신은 말과 웃음이 적은 사람이었고, 그의 바르고 단정한 용모는 수업근신하는 선비와 같았으나, 내면으로는 담력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최민식의 깊은 눈빛과 웃음을 버린 영화의 묵직함이 관객을 불러들이는 동안, 표류하던 세월호 특별법은 수사권도 기소권도 없는 빈 껍데기가 되어 통과되었다. 이순신은 타협하지 않았다. 이 깊고 푸른 두려움과 무력감이 용기가 되려면 퇴로를 끊고 죽음으로 배수진을 쳐야 한다고 일갈했다.

이 시대의 울돌목 광화문 광장에서는 여전히 특별법 합의에 항의하는 유가족의 농성이 있고 진상 규명 대신 보상을 앞세워 유가족의 진심을 모욕하고 진실을 묻어버리려는 현실이 있는데, 저 울먹이는 바다를 숨죽이며 지켜 보다 우리가 갖지 못한 지도자의 모습에 감동하며 자리에서 일어선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수정-8.9 오전 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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