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모(臨摹)는 서화 모사의 한 방법이다. ‘임臨’은 원작을 대조하는 것을 가리키고, ‘모摹’는 투명한 종이를 사용하여 윤곽을 본뜨는 것을 말한다. 넓게는 원작을 보면서 그 필법에 따라 충실히 베끼는 것을 의미한다. 임모의 목적은 앞 시대 사람들의 창작규율, 필묵기교 따위의 경험을 배우는 고전연구에 있다. 형체만이 아닌 화의(畵意)를 베끼는 것이 요체(要體)가 된다. 한편 투명한 종이를 위에 대고 베끼는 것을 ‘탑화(搨畵)’라고도 한다. 탑화는 당나라 시대(唐代)에 성행하여 궁중에도 수장(守藏)되었다고 한다. 임모는 그림을 익히는 제1단계로 중요시 되었다. (세계미술용어사전)
위의 개념을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 임모는 앞 세대의 창작방법, 기법 따위를 배우고 익히는 연구행위이다.
둘째, 껍데기만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화의, 즉 철학과 미학을 배워야 한다.
셋째, 미술교육의 첫 단계로 자리 잡았다.
넷째, 탑화, 베낀 그림은 국가에서 보관할 만큼 소중했다.

우-황현 초상 임모/안보영/디지털회화/2014.
고종의 어진을 그린 조선말기의 화가 채용신이 그린 황현 초상그림을 안보영 작가가 디지털회화로 임모했다. 이 그림은 복원이 아니라 그림공부를 위해 모방한 것이다. 이를 통해 선대의 인물화를 배우고 나아가 현대적 가치를 만들어 내는데 그 목적이 있다. [자료사진 - 심규섭]
창작의 핵심은 ‘복제와 융합’이다.
복제는 완성된 어떤 가치를 따라 배우고 익히는 것을 말하고, 융합은 완성된 가치에 당대의 흐름이나 정서를 투영하거나 결합하여 새로운 것을 만드는 일이다.
임모와 사촌관계의 말에는 복제, 복사, 모방이 있다.
우리그림에서는 본(本), 혹은 본그림이라고 한다.

우-여선/안보영/디지털회화/2014.
김홍도가 그린 5m에 육박하는 대작인 군선도의 앞부분이다. 원래 이 그림은 수묵담채화인데 채색화로 바꾸어 변주했다. 그러니까 인물의 동작이나 느낌은 그대로 따라하는 대신 얼굴표정이나 머리모야 따위를 살짝 바꿨다. 무엇보다 디지털회화 방식으로 진한 채색을 했다는 차이가 있다. 기본 형태에 충실하되 현대적인 느낌이 나도록 변주한 것이다. [자료사진 - 심규섭]
임모라는 개념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임모, 복제, 복사, 모방이라는 단어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야 한다.
흔히 모방은 창작과 반대이거나 심지어는 적(敵)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속담처럼 창작의 주요한 바탕이다.
미술지망생들의 그림공부는 대부분 모방과 복제라는 형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서양화법을 배우기 위해 그리스로마 시대의 조각품을 복제한 석고상을 그리는 것도 모방이다. 이것은 단순히 석고상의 형태만을 따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작품 속에 내포되어 있는 미학이나 서양철학을 배우는 것이다. 또한 서양화법의 조형원리 안에는 서양철학의 핵심내용이 담겨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중국, 일본과 같은 동양에서는 복제와 모방을 아주 좋게 여긴다. 중국에서 모방은 나쁜 것이 아니라 미덕이다. 좋은 작품이나 물건, 가치가 있다면 빠르게 모방하고 복제하여 확산시킨다. 우리가 중국의 자동차나 전자제품을 짝퉁이라며 놀리고 있을 때 중국은 복제와 모방을 통해 우리나라 산업을 빠르게 따라잡거나 능가하고 있다.
사실 중국의 짝퉁물건을 비웃었던 우리나라는 일본과 미국, 유럽의 물건과 가치를 모방하고 베꼈다. 일본도 명치유신을 통해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모두 서양식으로 바꾸자.’고 하면서 모방과 복제의 극치를 보여줬다.
그럼에도 복제나 모방을 나쁜 것으로 보는 것은 ‘우매한 인간’, ‘창조하지 못하는 인간’을 만들려는 나쁜 의도가 숨어있다고 의심된다.
임모를 하려면 완성된 작품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물건이나 가치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어떤 작품이 완성되었는지, 혹은 명작인지를 아는 일은 쉽지 않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역사와 전통이 심하게 왜곡되거나 뒤틀어져 있는 상황에서는 좋고 완성된 가치를 찾는 일은 정말 어렵다.
일본제국주의는 치밀하고 교묘한 논리를 통해 조선시대를 아주 나쁘게 인식시키는데 성공했다. 일제 강점기의 교육을 받았거나 그 영향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조선시대를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최근에는 조선은 한반도에 없고 중국대륙에 있었다는 ‘대륙조선설’ 같은 허망한 논리에 빠지는 사람도 많다. 마치 우리민족에게 대단한 자긍심을 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조선시대를 부정하는 것이다. 고려의 적통을 이어받은 조선을 부정하면 고려를 부정하게 되고, 통일신라의 적통을 이어받은 고려를 부정하면 삼국시대나 그 이전의 역사를 모두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우리의 역사는 마치 임모처럼 이전 나라의 전통을 복제하고 수용하면서 발전했기 때문이다. 조선은 그야말로 수천 년 동안 한반도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던 모든 나라의 총합이다.
조선을 나쁘게 여기면 역사와 전통의 맥은 끊긴다. 무엇보다 완성된 가치가 사라져 버린다.
대중그림인 민화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최고의 화가들에 의해 완성된 궁중회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만들어지는 그림은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민화가 떠돌이 환쟁이들의 독립적인 그림이라고 말하는 것은 예술이나 사회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그림의 완성된 작품은 궁중회화에 있다. 조선시대 화가들의 그림은 궁중회화로 통합되었고 또한 궁중회화는 당대 화가들의 임모와 모방의 대상이 되었다. 이렇게 우리그림은 임모의 과정을 통해 앞 세대의 가치가 다음 세대로 연결되면서 발전해 왔다.
본그림은 임모의 가장 구체적인 방법이다.
임모가 명작을 여러 방식으로 베껴 그리는 일이라면 본그림은 그림의 원형을 아예 만들어 놓고 두루두루 유통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확실히 완성된 그림의 핵심 미술조형정보를 담은 본그림을 만들고, 이 본을 임모하는 방법이다.
어찌 보면 본그림은 임모의 완성된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본그림은 완성된 작품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7~8할 정도의 미술정보가 들어가 있다. 이런 본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우리그림을 거의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궁중화원 정도의 수준이라야 한다.
본그림에는 선대의 창작방법과 조형기법, 철학과 미학이 고스란히 들어가 있다.
하나의 본이 만들어지면 이 본그림을 바탕으로 수많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본그림을 이용해 작품을 완성할 수 있는 사람은 다시 자기만의 본그림을 만든다. 이런 방식으로 확장하면서 변주된다. 본그림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움직인다. 본그림이 하나씩 만들어질 때마다 당대의 수많은 화가들의 정서나 기법이 녹아들면서 발전하는 것이다.
본그림만 있으면 그림을 배울 수 있다. 또한 본그림에 간단한 채색을 하는 것만으로도 좋은 그림을 완성할 수 있다.

우-여선도/안보영/디지털회화/2014.
먼저는 임모를 통해 그대로 베끼는 작업을 한다. 그 후 원본그림에 충실하면서 변주하는 방식으로 발전하고 최종적으로는 새로운 작품을 창작한다. 이 그림은 김홍도의 선동취적도를 바탕으로 해서 새롭게 창작한 것이다. 세로그림인 원작을 가로로 넓혀 공간을 늘였다. 또한 남자아이는 여자아이로 바꾸고 한복과 파도문양을 추가해 신성함을 주었다. 뒤의 사슴은 크고 아름다운 꽃사슴으로 바꾸고 전체 분위기는 밝고 화사하게 만들었다.
복제와 모방은 단순히 선대의 것을 베끼는데 있지 않고 현대적으로 창조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료사진 - 심규섭]
우리그림에는 지적재산권이나 특허가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궁중회화에는 서명이나 낙관이 없다. 도화서나 차비대령화원제도는 모두 국가에서 운영했기 때문에 공공성을 가지고 있다. 민화는 형식에서는 궁중회화를, 내용에서는 수묵화를 차용했다.
형식은 본그림을 통해 특별한 권리가 없이도 소통할 수 있다. 상징과 같은 내용은 그야말로 해석일 뿐이기에 트집 잡을 일이 없다.
많고 다양한 본을 가지고 있는 화가는 그만큼 다양한 그림을 그릴 수 있고 그만큼 뛰어난 능력을 가진 화가라는 것을 증명하는 수단이 된다.
우리그림은 공공성을 가진 그림이자 모방과 복제라는 본그림을 통해 무한 변주할 수 있는 현대적인 장점을 가지고 있다.
창조를 할 수 있는 사람, 사회, 국가가 인류에 유익한 가치를 만들고 세상의 주역이 된다.
무엇보다 모방과 복제를 할 수 있는 완성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커다란 축복이다.
서양이 그리스로마문명이라는 완성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창조와 혁신을 통한 세계적인 문화를 창조할 수 있었다.
우리민족에게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진 완성본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그림에는 완성된 궁중회화가 있다.
궁중회화의 완성본과 임모, 즉 모방과 복제가 만나 민화라는 세계적인 대중미술문화를 만들어내는 위력을 보여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