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3년 10월 제주 '민족평화통일체육문화축전'에서 남측 이봉주 선수와 북측 함봉실 선수가 마라톤 출발선에 함께 섰다. [자료사진-통일뉴스]

북한이 오는 9월 열리는 제17차 인천 아시안게임 참가 의사를 밝혔다. 350명으로 구성된 선수단 외에도 350명의 응원단을 파견한다고 밝혀 규모 면으로 보면 사상 최대가 될 전망이다.

남북이 한 차례 실무접촉을 갖고 결렬, 장외공방을 이어가고 있지만, 북한이 이번 아시안게임을 남북관계 개선의 계기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불참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남북은 체육교류를 남북관계 개선의 마중물로 삼아왔다. 응원단 파견으로 남북 간 문화적 차이점을 이해하고 민족 동질성 회복을 위해 노력해 왔다. 지금까지 남북은 어떠한 체육교류를 해왔으며, 응원단을 파견해왔을까.

남북 당국 간 체육교류, 끊임없는 시도 : 1960년~1980년

남북 체육교류의 시발점은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5.16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군사정권은 이승만 정권보다 남북관계를 유연성 있게 가져가려고 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1964년 동경올림픽을 앞두고 북한의 요구로 1963년 로잔느 남북체육회담이 열렸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중재로 3차례 만났지만, 실질적 토의를 진행하지 못하고 결렬됐고, 남북은 체육을 체제경쟁의 상징적 의미로 받아들였다.

동서냉전 구도가 화해 분위기로 들어가던 1970년대 7.4남북공동성명 발표로 남북은 화해 분위기 속에서 1977년 남북탁구협회 대표회담을 열었다.

1979년 제35차 평양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단일팀 구성을 위한 회담으로 북측이 제의, 4차례의 체육회담을 가졌지만, 경기일정이 촉박해 결국 무산됐다.

1980년대 서울 아시안게임(1986년), 서울 올림픽대회(1988년) 유치는 남북 간 체제경쟁을 넘어 체육교류 가능성도 높아졌다.

1982년 전두환 정권의 '민족화합 민주통일방안' 발표로, 1982년 LA올림픽 단일팀 구성을 위해 정주영 대한체육회장과 북측 김유순 국가체육위원회 위원장이 만나 회의를 했다. 그러나 당시 동구권 국가들의 LA올림픽 불참 선언으로 결실을 보지 못했다.

이어 1985년 당시 사마란치 IOC 위원장의 중재로 서울올림픽과 관련한 로잔느 남북체육회담이 열렸다. 남북은 서울 올림픽 단일팀 구성 및 공동개최 등을 논의하기 위해 4차례 만났지만 결국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북한은 서울올림픽에 불참했다.

하지만 1988년 노태우 정부의 '7.7선언'은 남북 간 체육교류의 물꼬를 트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남북교류협력추진위원회' 발족(1989년),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기본 지침서'(1989년),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 및 남북협력기금법'(1990년), 남북기본합의서(1992년) 등은 남북 체육교류를 한 층 앞당기는 촉매제가 됐다.

▲남북은 태권도시범단을 서로 교환해왔다. 사진은 2003년 제주 '민족평화통일축전'에 참가한 남북 태권도 시범단 모습.  [자료사진-통일뉴스]

남북 당국 간 체육교류, 풍부한 성과 그리고 중단 : 1990년~현재

남한 정부의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적극적인 태도변화와 이를 위한 제도적.법적 장치 마련은 남북 간 체육교류의 성과를 가져왔다.

1990년 분단 이후 첫 남북 총리가 만난 남북고위급회담 이후 1990년 말부터 1991년까지 총 4차에 걸쳐 남북체육회담이 열렸다.

여기서 남북은 △남북 스포츠교류 및 바르셀로나 올림픽 단일팀 구성, △국제대회 남북단일팀 구성, △일본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단일팀 파견 및 포르투갈 리스본 세계청소년축구대회 단일팀 구성 방안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그리고 1991년 탁구단일팀 구성, 축구대회 단일팀 구성 등에 대해 각각 2차례 실무접촉과 총 6차례 연락관 접촉으로 두 대회 모두 단일팀을 구성하는 성과를 거뒀다.

단일팀 구성 결과, 1991년 일본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는 여자 단체전 우승, 개인단식 우승, 남자개인단식 3위, 혼합단식 3위의 성과를 거뒀다. 그리고 남측의 현정화, 북측의 리분희는 세계적인 스타 반열에 올랐다.

뒤이어 개최된 포르투갈 리스본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는 8강 진출의 쾌거를 거뒀다.

▲ 2007년 5.1절을 맞아 경남 창원에서 열린  남북 노동자 통일축구대회 경기 직후 남북 노동자들의 유니폼을 나눠갖는 모습. [자료사진-통일뉴스]

그리고 이보다 앞서 1990년 10월 남북 축구국가대표팀이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통일축구대회'를 가져 남북이 1승 1패를 각각 나눠 가졌다.

하지만 남북 간 체육교류는 국제 정치 혼돈과 궤를 같이할 수밖에 없었다. 1991년의 성과는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불거진 북핵문제로 더는 이어지지 못했다.

중단된 남북 간 체육교류는 2000년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으로 재개됐다. 그러나 1990년대 단일팀 구성보다는 공동입장 등의 새로운 형태의 체육교류 합의가 전부였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단일기를 들고 공동입장 한 것을 시작으로,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2003년 아오모리 동계아시안게임, 2003년 대구 하계유니버시아드, 2004년 아테네 올림픽, 2005년 인천 아시아육상경기대회, 2005년 마카오 동아시아경기대회,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 2007년 장춘 동계아시안게임 등에서 공동입장으로 스포츠를 통한 평화의 이미지를 굳혔다.

물론, 남북은 단일팀 구성을 위해 체육회담을 가졌지만, 각각 선수선발 방식의 이견을 좁히지 못해 2000년 들어 단일팀 형태의 체육교류는 없었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5.24조치'로 인한 남북관계 경색국면은 남북 간 체육교류의 중단을 불러왔고, 국제경기대회에서의 공동입장 모습도 더는 볼 수 없게 됐다.

▲ 남측 김무교 탁구선수(오른쪽)와 북측 정성옥 마라톤 선수가 2003년 제주 '민족평화통일체육축전'에서 함께 성화를 점화했다. [자료사진-통일뉴스]

남북 민간 체육교류, 친선의 장

남북 당국 간 체육교류의 부침은 남북 민간 체육교류에도 영향을 줬다. 민간 체육교류는 친선경기 형태로 진행됐다.

대표적인 것은 남북 노동자 통일축구대회이다. 분단 이전인 1929년 시작된 서울-평양 간 경평축구대회는 당시 일제의 압박 속에서 열려 민족의 단합정신을 가져왔고, 1946년까지 이어져 왔지만 분단선을 넘지 못했다.

그런 경평축구의 부활을 예고한 것이 1990년 남북 축구대표팀 간 통일축구대회였다. 그리고 맥을 이은 것이 바로 남북 노동자 통일축구대회였다.

1999년 8월 평양에서 남측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과 북측 조선직업총동맹 간에 축구경기가 열렸다. 이후 2007년 5.1절을 맞아 경남 창원에서 남북노동자축구대회가 열렸다.

그리고 2002년 9월 서울에서 '유럽-코리아재단' 주선으로 남북통일축구대회, 2005년 8.15민족대축전 기념 남북 통일축구대회 등이 열렸다.

▲ 2005년 8.15민족대축전 맞이 남북 축구대표팀 친선경기. [자료사진-통일뉴스]

또한, 1999년 9월과 12월에 각각 평양과 서울에서 현대 통일농구 교환경기가 열렸고, 2000년 서울.평양.금강산 '금강산 자동차 경주대회', 2000년 평양 삼성통일탁구경기대회, 2001년 '금강산 자동차 질주경기대회' 2002년 평양.서울 남북태권도 시범행사, 2004년 남북권투대회, 2007년 청소년 및 유소년 팀 서울.평양 방문 축구 친선경기, 2007년 서울.춘천 남북태권도 시범행사 등 다양한 영역에서 체육교류가 진행됐다.

이러한 남북 체육교류는 체육과 관련한 다양한 민간행사가 열리는 데 이바지했다. 2000년 부산 전국체전에서는 금강산 옥류동 부대바위에서 성화가 채화됐고, 2003년 10월 제주에서 '민족평화통일체육문화축전'이 열렸다.

2005년 중국 베이징에서 '코리아 민족의 체육발전을 위한 학술토론회'를 여는 등 민족 체육발전을 위한 학술의 영역까지 확대됐다.

▲ 2003년 제주 '민족평화통일체육문화축전'에 참가한 북측 그네 선수. [자료사진-통일뉴스]

북 응원단 파견 그리고 공동응원

남북 간 체육교류의 역사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북한 응원단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잊지 못한다. 북한의 20대 초반 여성들로 구성됐다고 해서 '미녀 응원단'이라고도 어색하게 불리는 응원단은 남한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먼저, '미녀 응원단'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기로 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사용하지 않기를 바란다. '미녀 응원단'이 공식적인 표현도 아닐 뿐 아니라 '미녀'라는 단어가 가져오는 성적인 의미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녀와 미녀가 아닌 사람을 구분 짓는 반인권적인 용어라는 점에서 앞으로 '미녀 응원단'이 아닌 '북측 응원단'으로 불려야 한다.

▲ 2003년 하계 유니버시아드에 참가한 북측 응원단 중 취주악단이 공연을 펼치고 있다. [자료사진-통일뉴스]

북측은 남측에서 열린 국제경기대회에 총 3차례 응원단을 파견했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는 만수대예술단과 평양교예단 등에 소속된 280명의 응원단이 참가, 150명은 '인민보안성 산하 여성취주악단' 이었다. 이들 응원단은 '만경봉-92호'를 타고 원산을 출발, 부산 다대포항에 정박해 숙소로 사용했다.

2003년 대구 하계유니버시아드에는 유니버시아드대회는 '국제대학스포츠연맹(FISU)'이 주관하는 대회라는 점에서 대학생으로 구성된 응원단 200여 명과 '인민보안성 산하 여성취주악단' 100여 명 등 총 303명이 파견됐다.

이들은 북측 고려항공을 이용, 직항로를 이용해 김해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이들 응원단은 경북 칠곡군에 위치한 대구은행연수원에서 생활, 대형버스를 이용해 경기장으로 이동했다.

▲ 2005년 인천 아시아육상경기대회에 '청년학생협력단'으로 참가한 리설주. [자료사진-통일뉴스]

2005년 인천 아시아육상경기대회에는 응원단 자격이 아닌 '청년학생협력단' 자격으로 파견됐다.

124명으로 구성된 이들은 금성학원 소속 학생들로, 육상은 짧은 시간에 치러지는 경기라는 점을 감안, 응원단 파견에 북측이 난색을 보여, 대북 인도적 지원 민간단체인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와 협력사업의 일환으로 '청년학생협력단'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이들은 경기장에서 응원을 펼치기도 해 응원단으로 각인됐으며, 여기에는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부인이 된 리설주가 참가했다.

이들은 서해 직항로를 통해 항공편으로 입국, 인천 파라다이스 호텔을 숙소로 사용하며 대형버스를 이용해 경기장을 오갔다.

▲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응원단 숙소로 사용된 '만경봉-92호'. 부산 다대포항에 정박했다. [자료사진-통일뉴스]

남북 공동응원은 없었을까.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당시 남북은 체육교류 논의를 하면서 공동응원을 펼치기로 했으며, 태극기, 인공기, 단일기를 사용하며 공동응원을 펼쳤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공동응원 성사 가능성이 높았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의 성과로 베이징 대회에 남북응원단이 경의선 열차를 이용, 참가하기로 했지만,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 남북관계가 경색국면으로 치닫자 결실을 보지 못했다.

물론, 2008년 6월 서울에서 열린 남아공월드컵 지역예선전에서 남북이 경기를 펼쳤고, 여기에 관중석에서 단일기가 나부끼며 남북을 함께 응원했지만, 엄밀한 의미의 공동응원은 아니었다.

북한은 이번 인천 아시안게임에 350명의 선수단과 350명의 응원단을 파견하기로 했다. 응원단은 경의선 육로로 이동하고, 원산항에 정박 중인 '만경봉-92호'를 제주해협을 거쳐 인천항에 정박, 응원단 숙소로 사용한다고 밝혔다.

현재 남북은 한 차례 가진 실무회담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인천 아시안게임 개막까지 2달 남짓 시간이 남았다. 그 기간 남북이 성과를 거둘 수 있기에 북한 응원단의 열띤 응원을 다시 볼 수 있을 기대감을 잃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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