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재료의 세 가지 요소는 물감, 붓, 화지(畵紙)이다.
이 세 가지 요소 중에서 한 가지만 없어도 그림을 그릴 수 없다.
또한 이 세 가지 요소는 서로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물감이 바뀌면 붓과 화지도 따라 바뀌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화지에 따라 사용하는 물감과 붓이 다르다.
유성물감은 튼튼한 광목이나 나무판 화지가 잘 어울리고 사용하는 붓도 질기고 강해야 한다.
수성물감은 적절한 두께를 가진 흡수성이 좋은 화지에 부드러운 붓이 제격이다. 광목천에 수성물감을 사용하면 칠해지지가 않는다. 또한 구겨지는 얇은 종이에 유성물감을 칠하면 물감이 마르는 과정에서 부서지거나 떨어져 나간다.
그래서 화가들은 물감과 붓과 화지를 놓고 최적의 조합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미술에서 기법이나 기술은 모두 미술재료의 선택과 사용능력에 의해 결정된다.
또한 물감, 붓, 화지라는 미술도구의 발전은 곧 미술적 표현능력을 높이고 확대하는 일과 직결된다.
화지(畵紙)는 그림을 그리는 종이를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종이’는 글을 쓸 수 있는 바탕 물건이다. 그러니까 돌에다 글을 쓰면 돌이 곧 종이가 되는 것이다. 옛날에는 돌, 회반죽, 동물의 가죽(양피), 닥나무나 파피루스와 같은 식물, 대나무를 가공한 죽간 따위를 종이로 사용했다.
종이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글자가 잘 써지고 보존성이 높으며 가독성이 좋게끔 발전을 거듭해 왔다.
종이가 시대의 흐름을 탄다는 것은 대략 이런 것이다.
날카로운 펜으로 글자를 쓰는 문화권의 종이는 두껍고 질겨야 한다. 부드럽고 얇은 종이는 구멍이나 나거나 찢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먹을 사용해 글씨를 쓰는 문화권에서의 종이는 붓질이 잘 나가며 적절한 흡수력의 종이를 사용해야 한다. 또한 흡수력이 너무 좋으면 먹이 번지고, 너무 없으면 글자를 쓸 수 없다.
또한 볼펜과 같은 유성붓과 잉크와 같은 수성붓에 따라 사용하는 종이도 달라진다.
요즘은 색연필이나 색볼펜 따위의 다양한 색상의 붓이 발전했지만 예전에는 색을 구하기도 어려웠고 비쌌다. 그래서 가장 단순한 검정붓과 흰색 종이가 많이 사용되었다. 흰색과 검은색은 명도 차이가 가장 크게 나서 명시성(明視性)과 가독성이 높다.
그래서 천연원료를 가공한 종이는 하얀색을 내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
우리 선조들은 닥나무와 같은 천연재료에 잿물을 이용해 탈색을 했다. 탈색을 하면 하얀색의 종이를 얻을 수 있다.
미술용 종이, 즉 화지는 글을 쓰는 종이와는 조금 다르다.
많은 붓질과 다양한 색이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더욱 튼튼하고 발색이 좋으며 쉽게 부식되지 않고 탈색을 방지하며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면(카툰)을 이용한 종이의 개발이 이루어졌다. 면은 쉽게 탈색시켜 흰색을 얻을 수 있고 질기고 강하다. 이런 면섬유를 다양한 방법으로 가공하여 미술용 종이를 만들어 낸다.
닥종이를 이용하는 경우 얇은 종이는 미술용으로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여러 장을 겹쳐 붙인 일배지, 이배지 오배지 따위를 사용한다.

미술용 화지에 색을 사용하는 것은 근본적인 문제를 발생시킨다.
미술용으로 사용하는 화지는 기본적으로 빈 공간이다. 새로운 시공간을 창조하는 화면은 그야말로 세상이 창조되기 전의 상태, 즉 무(無)의 상태이어야 한다.
그런데 서양화법의 바탕화면은 흰색이다.
수채화, 유화의 기본 화지는 모두 하얀색으로 만들어져 있다.
엄밀히 말하면 흰색의 화면은 빈 공간이 아니라 흰색 물감이 칠해져 있는 상태이다.
그럼에도 흰색 화지를 사용하는 것은 흰색을 텅 빈 공간이라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흰색을 빈 공간으로 인식하는 것은 철학적, 문화적 이유 때문일 것이다.
서양에서는 그림에 태양을 그리지 않는다. 대신 태양에서 나오는 빛을 이용해 사물의 형태와 실재감을 창조한다.
만약 사람이 대낮의 태양을 눈으로 본다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사람은 태양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다. 강렬한 태양빛은 인간의 시력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인간의 시력을 넘어서면 아무 것도 보지 못하게 된다. 즉, 강한 빛에 의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를 현실적인 색으로 표현하면 하얀색이 된다. 아무 것도 없는 상태, 빈 공간과 하얀색을 동일하게 여기게 되는 것이다.
서양화법은 유화물감에 의해 완성된다.
유화에서는 하얀색 화지 위에 그림을 그리는데 하얀색 물체를 그릴 때도 그 부분을 남겨놓지 않고 반드시 하얀색 물감을 칠한다. 그냥 두면 아무 것도 칠하지 않는 빈 공간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채색화에서 빈공간은 남겨 놓지 않는다. 빈 공간이 있다는 것은 그림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얀색 화지는 채색기법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서양화법에서 하얀색은 빈 공간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명도가 가장 높은 상태이기도 하다. 명암법은 ‘가장 밝음’과 ‘가장 어둠’이라는 양 극단의 명도를 기준으로 만들어진다. 일단 가장 밝은 명도가 바탕에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사물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어둡게 칠해야 한다. 또한 물감을 계속 겹쳐 칠하다보면 화면은 무겁고 둔탁해진다. 그러니까 무겁고 어두운 화면은 하얀색 바탕을 사용하기 때문에 나타난 자연스런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하얀색의 바탕화면을 사용하면 여러 장점이 있다.
일단 빛의 강약에 따른 명암법을 표현하기에 편리하다. 또한 선명한 색상을 얻을 수 있으며 사물의 재질감을 표현하는데 유리하다.
그렇다면 우리그림의 바탕색은 뭘까?
일단 수묵화의 경우는 하얀색을 바탕으로 한다. 하얀색 화지는 그야말로 빈 공간이다. 이것을 여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검은 먹을 사용하는 수묵화의 경우는 바탕색이 하얀 화지를 사용하면 먹의 농담이나 미묘한 붓질이 더욱 잘 드러난다. 담채화도 마찬가지이다.
가끔 누런색의 화지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저 탈색을 제대로 하지 않은 화지를 사용했거나 하얀색 한지가 나중에 변색된 것이다.
하지만 채색화의 경우는 달라진다.
진한 물감을 쓰는 덧칠을 하는 진채화는 주로 도화서나 차비대령화원에서 창작되었다. 진채는 한지를 여러 겹 붙인 화지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비단을 화지로 사용했다. 비단은 한지에 비해 물감의 접착력이 좋고 균질한 화면을 얻을 수 있으며 내구성이 좋아 보관에도 유리하다.
아무튼 비단의 원단은 무색에 가까운데 미술용 아교와 명반을 섞어 바탕을 칠해도 여전히 무색이다.
하지만 궁중회화의 대부분은 엷은 황색으로 바탕이 칠해져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짙은 황색으로 채워져 있는 경우도 있다.
십장생도, 일부 오봉도의 하늘, 해반도도의 하늘, 궁중모란도, 궁중화조도의 배경, 어진과 같은 인물화의 배경, 곽분양행락도의 배경, 요지연도의 배경, 백수백복도의 배경은 모두 엷은 황색이다. 또한 비단에 수묵담채로 그린 산수화에서도 배경은 모두 황색으로 칠해져 있다.
이런 전통은 조선이 망한 1920년대 창덕궁 재건벽화의 [백학도], [봉황도], [삼선관파도], [조일선관도]의 배경색으로 이어진다. 심지어는 서양화법으로 그려진 [총석정절경도], [금강산만물초승경도]의 하늘에도 황색이 칠해져 있다.
우리그림에서 배경이나 하늘은 그야말로 빈 공간이다. 그 빈 공간의 색이 곧 바탕색인 것이다.
결국 우리그림의 바탕색은 황색이라고 해도 과하지 않다.
그렇다면 바탕색이 서양화법처럼 하얀색이 아니라 황색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일단은 우리그림에서 하얀색은 빈 공간의 색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오방색]이라는 말이 있다. 음양오행설에 의해 규정된 방향을 가리키는 색이다. 하지만 궁중회화나 수묵담채화에 오방색의 원리에 따라 색을 배합하고 칠했다는 어떤 증거도 없다. 화가는 사물의 특성이나 채색기법의 원리에 따라 색을 사용할 뿐이다.
오방색에서 방향을 제거하면 다섯 가지의 색이 나온다. 이 다섯 가지의 색은 빨강, 파랑, 노랑, 하얀색, 검은색이다. 빨, 파, 노는 안료의 3원색이다. 이 3원색의 물감을 섞으면 수 백 가지의 색을 표현할 수 있다. 또한 흰색과 검은색은 명도를 드러낸다. 3원색에 흰색과 검은색을 섞으면 수 천 가지 이상의 색을 만들 수 있다. 이는 동서양이 다르지 않다. 그러니까 오방색은 그저 색의 기본을 말하고 있는 것뿐이다.
우리그림에서 하얀색은 빈 공간이 아니라 물감으로서의 하얀색으로만 인식한다.
배경색을 황색으로 규정한 것에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선비와 같은 지식인, 화가, 일반 백성까지도 수긍할만한 공통된 정서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오봉도의 하늘을 ‘가물가물’하게, 즉 검고 어둡게 칠한 연유에서 찾는 것이 빠르다. 태양을 표현한 하늘에 마치 밤하늘과 같이 어두운 색을 칠한 이유는 하늘을 규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하늘은 빈 공간인 셈이다. 하지만 모든 그림의 바탕색을 어두운 색으로 칠한다는 것은 표현상의 치명적인 약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천자문은 유학의 입문서이자 유학을 배우는 사람에게는 필독서이다.
천자문의 내용은 천문(天文), 박물(博物), 역사(歷史), 인물(人物), 인륜(人倫), 교육(敎育), 생활(生活) 등 각 방면을 포괄하여 사자성구(四字成句)로 중복되는 글자 없이 서술되어 있다.
‘천지현황(天地玄黃)’을 풀이하면 ‘하늘은 가물가물하고 땅은 누렇다.’이다. 물론 여기서 하늘과 땅은 우주만물을 드러내는 철학적인 개념이다. 현실적으로 사람의 눈에 보이는 하늘과 땅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땅이 누렇다’라는 개념도 실제 땅의 색깔이 누렇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땅은 여러 색을 가지고 있다. 붉은색 땅도 있고, 하얀색에 가까운 땅, 검은색에 가까운 땅도 있다.
그럼에도 ‘누렇다’라고 표현한 것은 뭇 생명이 존재하는 공간을 시각적으로 드러내기 위함이다. 누런색의 공간은 아무 것도 없는 빈 공간의 또 다른 표현인 것이다.
사람이나 사람과 관계를 맺지 않는 땅은 모두 ‘공터’이다. 그야말로 빈 공간이다. 사람이 살지 않는 땅도, 농사를 짓지 않는 땅도 빈 땅이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공간에 아름다운 뭔가가 만들어져 있는 경우는 신선이 사는 곳으로 보았으며, 반대로 음침한 뭔가가 만들어져 있으면 귀신의 세계로 인식했다.
화지의 바탕색은 아무것도 없는 시공간이다.
여기에 사물을 표현하고 채색을 통해 새로운 시공간을 창조하는 것이다. 새로운 시공간은 당대의 철학이 요구하는 시공간이다.
서양의 하얀색 바탕색은 빛과 연관되어 있고 우리그림의 바탕색은 동양적 우주관이 들어가 있다. 바탕색이 다르다는 것은 지배철학뿐만 아니라 표현방법도 달라진다.
우리그림 화법으로 꽃을 그리고 배경을 하얀색으로 표현하면 서양화법의 그림처럼 보인다. 반대로 서양화법에 충실한 그림에 황색 배경을 만들면 우리그림의 느낌이 날 정도로 바탕색이 미술작품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하다.
언젠가 동서양을 아우르는 새로운 철학이 나올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이런 새로운 철학을 담아내는 미술작품의 바탕색은 뭐가 될지도 사뭇 궁금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