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예술은 당대의 지배철학을 반영한다.
그리스로마 문명의 핵심철학은 인본주의(휴머니즘)이다. 그래서 인간의 모습을 닮은 수많은 신을 조각 작품으로 남겼다.
중세 유럽의 지배철학은 기독교였다. 그래서 예수와 성모마리아와 관련된 수많은 예술작품들이 창작되었다. 불교를 정치철학으로 삼았던 통일신라나 고려는 수많은 사찰과 불상, 탱화 따위의 예술품을 남겼으며, 주자성리학을 지배철학으로 삼았던 조선에는 학문과 선비의 실천 강령을 담은 수묵화와 유학적 이상을 담은 궁중회화가 발전했다.
사회주의 혁명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유럽의 예술은 비판적인 성격이 강하다.
그러나 자신들의 전통사상을 비판하는 것은 용납하지 못한다. 몇 년 전에 중국의 한 작가는 추락한 늙은 천사를 조각품으로 만들어 출품했다가 철거당했다.
흔히 ‘앤디 워홀’이 대표적인 작가로 알려져 있는 미국의 팝아트는 소비와 대중문화라는 미국의 철학을 반영한 것이다. 미국의 후미진 골목 담벼락이나 낡은 지하철에 그려진 낙서 그림(그래피티 Graffit)은 소외된 흑인이나 소수민족, 젊은이들의 반항을 담은 것이다.
수많은 귀신들과 결합한 도교와 선종불교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일본은 귀신들을 캐릭터로 만든 만화와 절제미가 있는 상품으로 유명하다.
또한 북한의 조선화나 선전화에서 투쟁이나 사상적 내용이 많은 것은 미국과 대적하는 북한의 정치철학을 반영한 결과이다.

당대의 철학은 지배계층의 사상이면서 역사와 문화, 전통에 의해 규정을 당한다. 또한 대중의 삶에 긍정적으로 작용해야만 보편성을 획득한다. 흔히 역사 속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독재자가 나라를 망치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껍데기일 뿐이다. 실상은 당대의 철학이 한계에 봉착하여 통제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철학을 바탕으로 한 공동체의 질서가 무너지고 보신주의나 가문, 가족주의, 이기주의로 퇴행해서 난장판이 되어 버린다. 철학을 잃은 사회공동체는 털 없는 원숭이 집단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 오랜 역사의 교훈이다.

미학(美學)은 아름다움을 다루는 학문이다.
아름다움을 다루는 학문인 ‘미학’이 철학의 범주에 속하고, 예술이 정치, 사상, 종교 따위와 함께 ‘상부구조’에 들어가 있는 것은 지배철학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감정의 단계를 넘어서 행동과 실천을 만들어낸다.
어떤 여성에게 ‘아름답다’고 하면 관심이 있고 사귀고자하는 행동이 깔려있다.
부자에게 돈은 아름다운 존재이고 정치인에게 권력은 아름다운 것이다.
아름다움은 ‘좋고, 필요하며, 추구해야 할’ 어떤 대상이다.
부처의 모습을 아름답게 표현하면 본받고 숭배해야 할 대상이 되고, 고급 스포츠카가 아름다우면 돈을 벌어 구매해야 할 대상이 된다.
유럽 중세 종교화의 아름다움은 ‘숭고미’이다.
모더니즘의 아름다움은 ‘실험정신미, 세련미, 장식미’이다.
조선시대 수묵화의 아름다움은 ‘절제미’이다.
최근에는 ‘폭력미’, ‘속도미’, ‘섹시미’, ‘웅장미’, ‘화려미’, ‘공포미(스릴)’ 심지어는 ‘재미’도 있다. 

▲ 좌측-모나리자/레오나르도 다빈치/유화/77*53/1503~1505.
우측-생각하는 사람/오귀스트 로댕/200.7*130.2*140.3/1880.
‘모나리자’ 작품 속에는 인본주의 미술조형법이 완성되어 있다. 신의 눈이 아닌 인간의 눈으로 새로운 시공간을 창조한 것이다.
‘생각하는 사람’은 원래 ‘지옥의 문’이라는 거대 작품의 일부였다. 단테의 ‘신곡’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신곡의 기독교적인 장편 서사시인데 여러 장면 중에서 지옥편을 소재로 하여 지옥의 문을 만들었다. 인간의 비극적 운명과 삶을 함축하여 보여주는 작품이다. [자료사진 - 심규섭]

여러 아름다움 중에서 가장 으뜸인 것은 ‘인간미’이다.
하지만 ‘인간미’는 복합적이고 애매하다. ‘인간미’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희생, 헌신, 사랑, 좌절, 의심, 배려, 이해’ 따위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인간미’는 ‘인본주의’라는 철학의 아름다움이다.
아무튼 예술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철학을 시청각을 통한 가상체험을 하도록 한다. 이러한 가상체험은 지배철학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확산시키고 심화하는 역할을 한다.
가상체험을 현실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감동, 카타르시스’라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감동’의 상태를 통해 딱딱하고 어려운 철학을 온몸으로 수용하게 한다.
이렇게 지배철학을 단순히 지식이나 이론이 아니라 온몸으로 경험해야 사람들은 삶속에서 실천하고 행동한다. 아무리 좋은 철학도 사람의 정신적, 육체적 노동을 거치지 않고는 발전할 수가 없다.
온몸으로 느껴서 이해하고 행동으로 옮기게 하는 감동의 원천은 바로 아름다움이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감동의 상태에 빠지는지를 가장 잘 알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바로 예술가이다.
좋은 작품, 유명한 작품은 모두 당대의 철학을 ‘감동’하도록 표현한 것이다.
소설의 이야기, 음악의 멜로디, 미술의 형태나 색채 따위는 모두 신체적 감각을 자극하는 요소들이다. 예술적 능력은 ‘감동’을 이끌어내는 능력과 비례한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 가장 뛰어난 명작으로 추앙받는 그림은 [모나리자]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단순히 정갈한 여인을 그린 그림이 아니다.
[모나리자]에는 르네상스의 인본주의사상이 총화 되어 있는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그림이다.
이전의 그림이 신의 관점(전지적 관점)이었다면 [모나리자]에는 인간의 관점이 들어가 있다. 신의 관점에 비해 초라했던 인간의 관점을 원근법과 명암법을 결합하여 신의 반열까지 올려놓았다. 인간의 시점으로 새로운 시공간을 창조한 것이다.
예술과 철학의 관계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모나리자]를 그저 깊은 종교적 믿음을 가진 고귀한 부인을 그린 것이라고 알고 있다. 이렇게 되면 [모나리자]의 미학은 ‘숭고미’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관점으로 창조한 세상이라는 내용으로 보면 [모나리자]의 미학은 ‘인간미’가 된다.

그리스로마문명의 철학은 인본주의이다.
이것을 인간중심, 사람중심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단순한 것이다. 유럽의 인본주의는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스로마시대에는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라는 독립된 세계로 나누었다. 하지만 인간이 범접하지 못하는 신의 세계에 인간의 감정을 투영했다. 반대로 인간은 스스로의 정치, 경제, 문화적 행동에 신의 이름을 끌어다 사용함으로써 존재의 가치를 높일 수 있었다. 인간적 욕망의 구현을 합리화하기 위해 신의 노여움, 질투, 사랑, 분노 따위를 이용한 것이다.
신들은 거대 조각상이나 제사를 통해 숭배를 받았고 인간은 신의 의지라는 명분을 얻는 그런 관계였다.
신과의 동등한 관계를 얻었지만 신처럼 죽지도 않고 막강한 능력을 가지지 못한 인간은 생노병사의 고통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 운명을 개척해 보려고 발버둥치지만 결국 비참하게 몰락하는 현실 앞에서 인간은 신보다도 더욱 비참해졌다. 그래서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의 아름다움을 ‘비극미’라고 주장했다.

중세유럽의 신과 인간의 관계는 주인과 종(노예)의 관계였다. 노예는 무조건 복종, 헌신하고 원죄를 용서받아야 했다. 이러한 신과 인간의 관계는 곧바로 사회의 봉건영주와 농노의 관계, 남편과 부인의 관계, 힘을 가진 자와 없는 자의 관계 따위로 복제되어 퍼져나갔다.
이 당시 유럽 예술의 내용과 형식은 대부분 ‘종교적 권위와 인간의 초라함과 슬픔’이었다.
‘르네상스’는 그리스로마문명의 핵심 사상인 ‘인본주의’와 정치구조인 ‘왕과 시민 원로원’, 경제구조인 ‘시장경제와 약탈경제’을 복원, 부흥시킨 것이다.
‘인본주의’는 신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가치를 보다 높게 만드는 사상이다.
예수를 사람의 아들로 보는 관점이나 니체의 초인은 모두 신에 비해 절대적 열세에 있었던 인간의 존재를 높이고자 하는 인본주의 사상이었다.
근대 유럽의 전쟁은 모두 그리스로마 문명의 계승자를 가리는 싸움이었고 최종 승자는 미국이 되었다. 그리스로마 신화와 관련한 모든 영화는 미국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엄청난 자본과 기술력이 집약된 공상과학영화(SF)를 통해 신의 영역인 새로운 시공간을 창조하기도 한다.
풍부한 시장경제과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하는 약탈경제를 완성시키고 또한 대중문화와 무제한적인 소비를 통해 신의 능력을 넘어서고자 했다.
미국은 신을 ‘My Friend 친구’라고 부른다. 신을 친구 수준으로 끌어내린 것이기도 하고 인간을 신의 반열로 높인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친구인 신이 무엇을 추구하는 가치가 뭔지는 알 수 없다.
그리스로마의 신들은 선악개념이 없다. 신들은 인간과 같이 질투, 사랑, 복수, 연민 따위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의 선악개념도 부실하다. 유일신을 부정하는 것은 모두 악이 되었다.
미국적 가치를 부정하는 세력을 모두 ‘악의 축’이라고 단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인본주의’라는 사상과 떨어지지 않는다.
신에 대항하여 인간의 존재가치를 높이는 ‘인본주의’는 ‘개인주의’를 낳았다. 강력한 힘을 가진 개인의 상징은 흔히 ‘스타, 아이돌’이라고 부르는 대중 연예인이다.
‘슈퍼맨, 스파이더맨, 배트맨, 캡틴 아메리카, 아이언맨’ 따위의 영화와 만화적 영웅들은 모두 그리스로마의 신들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들은 모두 사랑, 헌신, 질투, 복수 따위의 인간적 감정, 즉 ‘인간미’를 가진 강력한 개인이다.

▲ 좌측-김홍도의 백매.
우측-까치호랑이(민화).
김홍도의 하얀 매화(백매)는 쓸쓸하고 허름한 그림이다. 그림에는 화려함이나 기교가 없다. 절제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림 속의 매화는 곧 선비의 마음이다.
민화는 신명의 그림이다. 자유로운 형식, 화려한 채색, 원초적 욕망의 구현과 같은 민화의 특징은 혼란 그 자체이지만 그림을 통해 정서적 환기 혹은 정화를 불러일으킨다. [자료사진 - 심규섭]

불교의 나라였던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에는 신이 존재하지 않았다. 부처는 그저 ‘깨달은 자’였다. ‘관음보살, 문수보살, 미륵불’ 따위의 신격화된 수많은 보살은 인도의 힌두교의 영향과 도교의 결합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누구라도 깨달음을 얻으면 부처가 될 수 있었다.
핵심사상은 연기(緣起)나 무아(無我)이지만 주관성이 강하다. 오히려 ‘무소유’라는 실천개념이 핵심사상에 가깝다.
불교의 아름다움은 ‘숭고미’이다. ‘숭고미’는 인간의 사회적 욕망을 절제하여 자연의 질서에 맞추어 삶의 평안을 얻고자 하는 깨달음의 미학이다.
유학을 정치사상으로 삼은 조선은 불교와 도교를 배척했다.
따라서 신과 인간의 관계는 아예 없었다. 개념이 존재하지 않아 논쟁의 대상이 되어 본 적도 없다.
중국과 조선 유학의 핵심사상은 인격적 완성체인 ‘군자(君子)’이다.
‘인의예지신’은 인격적 완성체인 ‘군자’가 가지고 있어야 할 덕목이었다. 특히 주자성리학은 ‘엄격한 예법’을 통해 인격적 완성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인의지신’은 주관적이어서 체계를 갖추기 어렵지만 ‘예’는 실천적인 형식을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엄격한 예법’은 군자의 덕목이기도 하지만 곧바로 사회관계의 질서나 규범이었다.
‘엄격한 예법’은 관계의 미학이다.
인간이라면 반드시 지켜야할 도리인 삼강오륜에는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 따위가 있다.
물론 오륜의 친, 의, 별, 서, 신 혹은 충이나 효 따위의 구체적 개념이나 행동은 시대의 흐름이나 해석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하지만 이런 가치들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모두 ‘절제, 헌신, 희생’을 통과해야 한다. 선비들이 ‘자발적 청빈, 유유자적’과 같은 자기절제를 추구했던 것은 학문적 이상을 구현하기 위한 공부와 수양에 다름 아니었다.
조선의 선비와 화가들은 ‘청빈의 아름다움’, ‘유유자적하는 즐거움’을 담은 수많은 예술작품을 남겼다. 유유자적하다 못해 쓸쓸하고 처량한 그림을 아름답다고 칭송했다.
유유자적(悠悠自適)은 권력과 돈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일에 너그럽고 느긋한 태도를 취하며 욕심 부리지 않는 삶을 뜻한다. 유유자적의 아름다움은 청빈을 바탕으로 하고, 청빈한 삶은 유유자적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둘은 동어반복이다.
선비들은 이것을 ‘풍류미(風流美)’의 경지까지 올려놓는다.

선비는 모두 독립적인 존재이다. 공식 연회장면을 그린 그림에는 선비가 독상을 받고 있는 모습이 나온다. 한상에 여러 명이 앉는 방식이 아니라 독상을 준다는 것은 선비를 독립적인 존재로 본다는 말이다. 하지만 신과 대적하는 탁월한 개인, 영웅을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선비나 사람들을 독립적인 인격체로 규정한 것이지 공동체를 무시한 것이 아니었다. 실제 선비들은 노론, 소론, 남인, 서인 따위의 정당을 만들어 집단적인 정치를 했다. 또한 왕의 혈통을 무시하지도 않았지만 절대적 권력을 부여한 것도 아니었다. 왕이 권력을 전횡하거나 개혁을 할 때도 모두 선비세력인 정당을 바탕에 깔았다. 모든 선비 위에 군림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결국 독립적 개인을 바탕으로 정당을 만들고 공동체를 위한 정치를 한 것이다.

신에 대적하는 인간은 존재의 미약함, 슬픔을 바탕으로 한다. 그래서 서구의 ‘인본주의’는 ‘비극미’를 가지고 있다. 비극미는 혼돈과 슬픔의 아름다움이다.
미국식 ‘인본주의’는 존재의 비극을 과소비를 통한 쾌락과 인간의 감정을 가진 영웅으로 탈출하고자 했다.
조선 말기 정조의 개혁정치가 실패하면서 ‘한’의 미학이 생겨났다. ‘한’은 ‘엄격한 예법과 자발적 청빈’이라는 주자성리학의 핵심사상이 무너졌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한’ 또한 혼돈과 슬픔의 아름다움이다.
우리민족은 ‘한’이라는 혼돈과 슬픔을 극복하는 미학을 찾는다. 그것은 바로 ‘신명’이다.
‘신명(神明)’은 생명이자 생명의 정화이다.
지극한 혼돈과 슬픔의 상태에서 모든 생명과 만나서 교감하고 상호 교류하여 흐트러진 생명을 정화하는 것이다.
우리그림 속에는 ‘절제미’를 승화시킨 ‘풍류미’와 혼돈과 슬픔에 빠진 삶과 생명을 정화하는 ‘신명’의 아름다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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