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5산악회 60여 명의 회원들이 5월 17일 무박 2일 산행으로 남부군 이현상 사령관이 최후를 맞은 지리산 빗점골을 찾았다. [사진-통일뉴스 류경완 통신원] 

▲ 5.18 광주 망월동 구묘역에서. [사진-통일뉴스 류경완 통신원]

‘깊이 흐르는 빗점골과 망월동 꽃님들을 찾아서’

6.15한마음통일산악회(6.15산악회, 회장 권오헌) 5월 역사기행 ‘깊이 흐르는 빗점골과 망월동 꽃님들을 찾아서’가 진행됐다.

6.15산악회는 지난 5월 17일 밤 11시 서울역 앞에서 모여 버스와 승합차 두 대로 무박 2일의 지리산 빗점골 산행과 광주 망월동 순례를 출발했다.

양심수후원회와 범민련남측본부, 통일뉴스가 후원한 이날 행사는 세월호 정국과 빗점골의 상징성에 5.18광주민중항쟁 34주년 기념식이 겹쳐, 근래에 드문 60여 명의 대규모 인원이 참가했다.

차 안에서 준비한 술과 음식을 나누고 잠깐 눈을 붙이니 하동 쌍계사와 신흥동을 지나 버스종점인 지리산 밑자락 의신부락에 닿았다. 새벽 4시, 스프를 끓여 간단히 허기를 채우고 바로 등산을 시작했다.

이현상 부대와 마지막까지 함께했던 기행 인솔자 김교영 선생(88세)과 연로한 몇 분은 차로 오르고, 새벽 미명에 가파른 포장로 3km를 걸으니 끝마을 삼정부락이다. 여기서부터는 산죽 숲을 헤치며 모두 걸어야 했다. 빗점골에 도착하니 여섯 시 반, 동이 트고 있었다.

▲ 새벽 4시 반, 어둠 속에 빨려가듯 의신부락에서 빗점골을 향해 산행을 시작하다. [사진-통일뉴스 류경완 통신원]

▲ 삼정의 마지막 이정표. 30분을 더 오르면 빗점골 계곡이다. [사진-통일뉴스 류경완 통신원]

빗점골. ‘빗점’은 머리빗을 만들던 목물제작소가 있어 생겨난 이름이다. 유량이 풍부하고 골이 깊으면서 사방으로 통해 천혜의 은신처였을 것이다. [사진-통일뉴스 류경완 통신원]

‘한국의 체 게바라’ 이현상.. 우리 현대사가 외면한 전설의 빨치산 대장

정전협정 조인 직후인 1953년 9월 18일, 좁혀오는 포위망 속 지리산 빗점골에서 이현상은 목에 여덟 발의 총탄을 맞고 굵은 생을 마감한다.

승리자들은 빨치산의 최후를 선전하기 위해 시신을 2주일여 서울 시내에 전시한 후 고향 금산으로 내려 보내지만 식구들은 온 집안을 풍비박산 낸 놈이라며 인수를 거부한다. 모친 역시 자기 아들은 죽지 않았다며, 호락호락 맞아 죽을 애가 아니니 꼭 집에 돌아올 거라며 고집을 부렸다.

할 수 없이 시신을 끌고 지리산으로 돌아온 토벌대장 차일혁은 (총 12년의 감옥 생활을 했던) 이현상의 일제하 항일운동 공로와 인간적 품격을 존중해 약식 장례식을 치러준다. 유격대원 스님에게 독경을 시키고 화장한 유골을 직접 자신의 철모에 엠1 소총으로 빻아 섬진강에 뿌린 후 세 발의 권총을 쏘아 경의를 표했다.

북은 1968년 평양 신미동에 조성한 애국열사릉에 이현상의 묘지를 1호로 만들고 근처에 막역한 동지 김삼룡과 이주하, 홍명희, 조소앙, 김규식, 조봉암, 여연구 등 5백여 명을 차례로 안치한다. (이후 이현상은 북의 제 1호 열사증과 조국통일상을 다시 받았다.)

살을 에는 한라산과 지리산. 동계 대공세의 토끼몰이에 쫓기던 빨치산에겐 지옥의 저승사자였을 차일혁, 그도 서른여덟 젊은 나이에 금강에서 수영하다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눈앞에서 아비를 잃은 아들은 아버지가 너무 많은 사람을 죽여 혼을 빼앗겨버린 것 같다고 술회했다.

이현상의 모친 김행정은 1975년 걸인처럼 홀로 살아온 옛집 문간방에서 비참하고 한 많은 생을 마감하지만 죽은 후에도 평온을 찾지 못했다. 장례 며칠 후 그녀의 무덤이 파헤쳐지고 시신은 목과 사지가 잘려 사라진 끔찍한 모습으로 발견된다. 큰사람을 배출한 땅의 기운에 대한 두려움이 빚어낸 가혹한 역사의 보복이었다. (2012. 8. 21 <통일뉴스> 연재 ‘류경완의 모래내 일기’ 중에서)

죽은 자를 위한 예의와 회고

▲ 이현상이 변절자들로 구성된 토벌대의 매복에 걸린 너덜바위 지대. [사진-통일뉴스 류경완 통신원]

▲ 양심수후원회 권오헌 명예회장이 술잔을 올리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류경완 통신원]

▲ 먼저 간 열사들을 기리며 통일 기원 묵념을 올리는 회원들. [사진-통일뉴스 류경완 통신원]

1953년 9월 18일 최후를 맞은 이현상 부대와 전날 헤어진 김교영 선생(88세). 61년 전의 사령관에게 잔을 치는 선생의 눈은 내내 젖어 있었다. 현재 범민련서울연합 고문이며, 양심수후원회와 통일광장에서 활동하신다.

김교영 선생은 산상강연에서 당시 자신의 삶을 이렇게 회고했다.

“50년에 월남해서 64년 간 고향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전쟁 나고 의용군에 들어가 북민청 동지 30명이 진주까지 가니 세 명이 남아 있더군요. 경남 도민청 위원장으로 일하다 후퇴 시에 9월 28일 화개면으로 입산했어요. 대성골과 의신마을, 목통골 등을 근거지로 구국연대 연대장을 맡았고 52년 대성골 학살 때 살아남았지만 54년에 피체됐습니다. 여생을 통일의 길에 타의 모범으로 살겠습니다.”

▲ 빗점골 합수부. [사진-통일뉴스 류경완 통신원]

▲ 너덜바위 바로 밑 이현상이 사살되기 전의 마지막 은신처. [사진-통일뉴스 류경완 통신원]

▲ 이현상 최후 격전지 안내판. [사진-통일뉴스 류경완 통신원]

▲ 한 시간여 전적지를 둘러본 후 산중의 아침식사. [사진-통일뉴스 류경완 통신원]

▲ 지리산에서 1년여 활동하며 이현상과 여섯 번 만났던 소년 빨치산 출신 김영승 선생. [사진-통일뉴스 류경완 통신원]

김영승 선생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52년 1월 동계대공세 때 이현상의 대부대도 대성골에서 큰 타격을 받았어요. 토끼몰이로 대성골에 몰린 유격대와 민간인 1,500~2,000명이 학살을 당했습니다. 치열한 전투에 휘발유와 네이팜탄을 쏟아 부어 능선은 초토화되고 4월에 눈이 녹으며 시신들이 드러났어요. 20년 후에도 해골이 발견되었지요.”

“53년 9월 17일 이현상 사령관과 헤어졌어요. 다음 날 빗점골에서 울리는 총소리를 들었습니다. 산을 내려가다 너덜바위에서 매복에 걸린 12명의 이현상 부대는 한 명만이 생존했지요. 경남에서 일본을 통해 북으로 넘어가려다 희생된 듯합니다. 비보는 삽시간에 산중에 퍼졌고 자수를 권유하는 삐라가 온 산에 뿌려졌어요.”

‘죽기 전에 이현상 대장에게 담배 한 개피 바치고 싶어’ 걷기 힘든 몸으로 남원에서 온 정원섭 선생(80세). 이날 같은 이유로 옛 사령관을 찾은 진주의 장기수 출신 송송학 선생(80세)은 거동이 불편해 결국 삼정마을에서 더 이상 오르지 못했다. [사진-통일뉴스 류경완 통신원]

지리산을 내려와 광주로 향하다

이 땅에서 이현상의 이름은 아직도 불온한 금기이다. 그가 염원하던 민족의 온전한 자주독립과 민중해방은 여전히 미완의 진행형이다. 역사의 복원을 꿈꾸며 지리산을 내려와 광주로 향했다.

“너희들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제 너희들은 집으로 돌아가라. 우리들이 지금까지 한 항쟁을 잊지 말고 후세에도 이어가길 바란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 (1980년 5월 26일 저녁, 학생들과 여자들을 돌려보내며 광주도청 사수 지도부 윤상원 열사의 마지막 발언)

▲ 광주 망월동 구묘역에서. [사진-통일뉴스 류경완 통신원]

▲ 6.15산악회 여성 회원들. [사진-통일뉴스 류경완 통신원]

<시> 이현상, 내 마음 속의 빗점골
이원규

내 마음 속의 지리산 빗점골
어느 모퉁이엔가 웅크리고 앉은 사람
성큼성큼 검은 산으로 들어간 산사람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흔들리며 일어서는 검은 산 지리산
그 아래 아카시아 뿌리 내린 돌무덤 속
하얀 발가락 마디마다 꿈꾸는 별
절망하거나 다시 절망할 때
혁명의 날개를 잃어 가 닿을 수 없는 독백들이
끝내 바둥거리다 곤두박질치는 지점마다
지고 또 피는 홀아비바람꽃들
고단한 분단 반세기의 표류 속에서 끝내
서러운 꿈 하나 낚아 올릴 수 없는 밤
별의 꼬리를 부여잡고 한없이 꿈틀대며 승천하는
내 남루한 기억 속의 빨치산

지금 여기는 어디쯤인가
언제나 혁명을 꿈꾸면서도
지순한 노예의 습성을 버리지 못하는 지금
눈물 속으로 다시 눈물이 고여 오고
허물을 벗겨 보면 다시 허물이 도사리는
지금 여기는 어디쯤인가
곳곳에 하나씩의 비밀 아지트를 남겨 두고
모두들 살해당한 지리산 빗점골
그곳에서 나는 무련, 그대를 만난다

도리어 새장 밖으로 갇혀 있는 세상을 위해
새장 속의 새는 결정적으로 날개를 버린다
무덤 밖으로 묻혀 있는 세상을 대신해
잠들지 못하는 주검의 두 눈에도
마침내 눈물이 흐른다

비틀거리는 나의 그림자를 밟으며 바짝 뒤따르는
음울한 바람의 눈초리
그대 21세기의 꿈은 새로워지는가
내가 생각하는 만큼의 하늘은
이내 무너져 내리고 내 회상의 지리산 빗점골
어느 모퉁이엔가 웅크리고 앉은 산사람이
더 깊이 고개 숙이는 늦가을 저녁 무렵

뜨거운 나의 이마를 떠나
끝없이 질주하는 한줄기 별빛
나는 정녕 나의 얼굴을 기억하는가
나는 정녕 나의 목소리를 들어보는가

여태 매듭 하나 풀지 못한 예지의 더듬이를 보듬고
여백으로 비워둔 내 오랜 잠의 속살
그 속으로 수많은 잔뿌리를 내리며
먼저 나무처럼 굳게 서는 법을 배우며
뒤늦게 빨치산 위령제를 올린다
그대 산사람의 타는 듯 메마른 입술 사이로
한국 현대사의 하루를 돌아보며
오늘도 내 심장의 자물쇠를 잠근다 열쇠를 버린다

산 너머 산이 있고
바람의 끝에서 다시 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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