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회화는 우리그림의 교과서와 같다.
또한 조선이라는 한 나라의 지배사상이 총화되어 담겨있다.
궁중회화는 엄격한 형식을 지켰고 사회적으로 검증된 조형기법이나 내용만 더디게 수용했다. 뛰어난 화가라도 궁중회화의 내용과 형식을 함부로 바꾸지 못했다. 또한 화가 개인의 정서를 투영할 수도 없었다.
단원 김홍도는 정조의 신임과 후원을 받았던 조선 최고의 화가였지만 기존의 궁중회화를 바꾸지 못했다. 다만 신선도(神仙圖)나 책가도(冊架圖)와 같이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 궁중회화에 추가했다.
궁중회화에는 개인의 정서가 아니라 사회공동체의 가치가 담겨있기 때문에 창작하거나 감상하는데 어려움이 따른다.
궁중회화는 감상의 대상이 되기 어렵지만 평가의 기준은 있다.
궁중회화의 평가기준은 조선의 핵심가치를 정확히 구현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조선의 핵심가치는 주자성리학을 통한 ‘태평성대’이다.
이러한 내용과 표현하는 조형기법에는 ‘확대원근법’, ‘상징명암법’ 따위가 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마치 시험을 보는 것처럼 딱딱하고 엄격하다.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이런 형식에 대해 잘 모를뿐더러 관심도 없다. 이것은 궁중회화를 담당했던 도화서 화원들에게나 적용될 뿐이다.
이에 반해 화가의 개인적인 그림은 엄격한 형식이 적용되지 않는다. 엄격한 형식보다는 내용의 해석이나 유행, 표현능력이 중요한 평가 기준이다.
이런 요소는 평가의 기준을 느슨하거나 애매하게 만든다. 그림을 감상하려면 개인의 정서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필요하다.
궁중회화가 일방적으로 보여주고 내용을 강요한다면 감상은 쌍방으로 소통하고 자율적으로 수용한다.
서로 공감하기 위해서는 공통의 이야기꺼리가 필요하다.
이러한 이야기꺼리는 일상의 삶 속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똑같은 그림이라도 사람에 따라 보고 느끼는 정서가 다르다. 하지만 다름의 폭도 사회가 인정하는 범위 내에 있어야 한다.
궁중회화를 개인적으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감상용으로 바꾸어야 한다.
딱딱하고 엄격한 궁중회화를 말랑말랑하게 만들고 여러 가지 이야기꺼리를 넣어야 한다.
완결된 형식을 여러 개로 쪼개기도 하고, 특정한 장면만 끄집어내기도 한다. 공동체의 가치에 반하지 않는 범위에서 개인적인 욕망이나 정서를 담은 요소를 추가하기도 한다.
이렇게 궁중회화를 감상용으로 바꾼 대표적인 궁궐 그림은 창덕궁 재건벽화인 [봉황도], [백학도], [조일선관도] 따위이다. 대중적인 그림으로는 [백록도], [송학도], [연화도], [해반도도], [책가도], [신선도], [화조도] 따위가 있다.
[책가도]나 [신선도]는 궁중회화의 영역에 속하지만 엄격한 형식이 만들어지기 전에 조선이 망했기 때문에 감상용 그림과 겹쳐있다.
궁중회화보다 화가들이 그린 개인적인 그림을 감상하는 것이 훨씬 편하다.
창덕궁의 [백학도]나 [봉황도] 따위는 궁궐을 장식하고 있지만 도화서라는 조직이 아닌 개인이 그린 것이다. 시대를 반영하는 개인의 관점과 독창적인 표현기법 따위가 그림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화가는 지배사상을 반영하여 미술작품으로 풀어낸다. 또한 지배사상을 작품으로 풀어내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내거나 정서를 자극하는 여러 조형기법을 사용한다.
일상적이면서 다양한 소재를 선택하고 감각을 자극하는 색상이나 형태, 묘사, 질감 따위를 결합하여 하나의 화면 속에 구현하는 것이다.
그림 속에서 화가의 삶이나 개인적인 취향을 엿볼 수 있고 작가의 이야기꺼리를 들을 수도 있다.
궁중회화가 교장 선생님의 훈시와 같다면 화가의 그림은 친구의 소곤거림처럼 친근하고 일상적이다.
이지은 작가의 [태평황해太平黃海]

이 작품은 궁중회화를 개인적으로 해석하고 표현한 그림이다.
이 작품은 궁중회화의 해학반도도(海鶴蟠桃圖)를 재해석했다.
‘해학반도도’는 바다가 넓지만 복숭아나무가 작게 그려져 있고, ‘해반도도’는 복숭아나무는 크게 표현되어 있는 반면, 바다는 상대적으로 좁게 그려져 있다.
그러니까 ‘해학반도도’에서 바다를, ‘해반도도’에서 복숭아나무를 결합해 새롭게 화면을 구성한 것이다. 물론 ‘해학반도도’와 ‘해반도도’는 비슷한 제목처럼 사촌 같은 그림이다. 그래서 이 두 그림을 결합해도 전혀 이질감이 들지 않는다.
작품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황색의 넓은 바다이다.
흔히 바다를 파란색이라고 인식해 온 사람들에게 황색의 바다는 부담스럽거나 불편해 볼 일수도 있다. 하지만 징그럽게 생긴 번데기나 새우를 몸에 좋은 음식이라고 여기면 보기에도 좋듯이 황색의 바다가 풍요를 상징한다면 긍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황색의 넓은 바다는 우리의 서쪽 바다, 즉 ‘황해(黃海)’를 표현한 것이다.
황해는 우리나라와 중국이 공유하는 바다인데 중국문화에 관심이 많은 작가의 정서가 반영된 결과이다.
넓은 황해를 중심으로 오른쪽에 복숭아나무를 배치했다. 한번 먹으면 천년을 산다는 천도복숭아가 주렁주렁 달려있는 이 복숭아나무를 반도(蟠桃)라고 부른다. 복숭아나무는 ‘무릉도원, 이상세계’의 상징이기도 하고 일반 사람들에게는 ‘불로장생, 신선세계’로 수용된다.
황해와 복숭아나무의 결합이 이 작품의 핵심 주제이다.
황해는 황하의 황톳물이 유입되어 해양생물이 다양하고 풍부하다. 다시 말하면 먹고 사는 자원이 풍부하다는 것이다. 또한 복숭아나무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의 구현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 둘을 결합하여 일반적으로 풀어내면,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오래 오래 살고 싶다’가 된다.
넓은 황해와 복숭아나무를 중심으로 오른쪽 아래에는 장생도의 일부를 그렸다. 사슴이 노닐고 있는 땅에는 모란꽃이 피어있다. 위치로 본다면 사슴과 모란꽃이 피어있는 땅은 한반도의 표현이다. 우측 상단의 먼 산을 중국대륙으로 봐도 무방하다. 반대편에 있을 법한 중국대륙을 우측 상단에 배치한 것은 조형적 이유 때문이다. 화면에서 우측 하단의 반대방향은 좌측 상단이 되는데, 좌측 상단에 산을 그리면 공간이 막혀버린다. 넓은 바다가 아니라 마치 답답한 호수처럼 보일 수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고 동시에 한반도가 대륙과 떨어지지 않고 연결되어 있다는 표현이다.
바다의 중간에는 섬이 그려져 있다. 섬 위에는 학이 앉아 있거나 날고 있다.
섬은 자칫 단조롭게 보일 수 있는 바다에 변화를 주고 있다. 또한 날고 있는 학은 그림에 역동성을 만들어내는 주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하늘을 적절히 채워 빈 공간의 부담을 줄였다.
학을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매개자나 높은 관직의 상징으로 보지 않아도 된다. 그냥 하얗고 큰 새라고 봐도 문제없다. 한반도와 중국대륙을 자유롭게 왕래하며 날아다니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도 될 것이다.
이 작품은 누런 바다 때문에 전반적으로 채도가 낮다.
하지만 칙칙하거나 탁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그것은 하얀색의 학, 조금 무겁게 표현된 바위가 명도대비를 일으키면서 선명도를 높였기 때문이다. 또한 붉은 색의 복숭아열매, 영지 따위가 부족한 채도를 보완하고 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묵직하면서도 약간 덥게 느껴진다. 기온으로 친다면 섭씨 20도가 약간 넘는 5월 말이나 6월 초의 날씨일 것이다.
분명 상쾌한 분위기는 아니다. 작품을 오래 보고 있으면 몸이 후끈 달아오르면서 땀이 날 것 같다.
이 작품은 매화그림의 쓸쓸함도, 장생도의 평화로움도 아닌 흥분과 열정의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그림의 중심을 복숭아나무로 접근하면 부귀영화, 원초적 욕망의 구현이 주는 흥분과 열정의 분위기로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황해를 중심으로 보면 정치, 경제적으로 수용될 여지도 많다.
남북관계에서 황해는 흔히 NLL문제를 안은 열점지역이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와 같다. 황해의 평화는 남북의 통일이고, 황해의 싸움은 남북의 공멸로 이어진다.
중국과 공유한 황해는 경제와 교역의 중심이다.
중국과의 교역은 이미 우리 경제의 목숨 줄이나 다를 바 없이 커지고 깊어졌다. 땅이 작고 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는 수출입을 중심으로 굴러가는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다.
중국과의 교역은 대부분 황해를 통해 이루어진다. 중국의 핵심 상업도시는 모두 황해 연안에 붙어있고, 우리나라도 인천 송도에 자유무역지대를 만들고 있다.
중국과 한반도는 유학문화권으로 공통점을 많이 가지고 있다. 남북관계가 좋아지고 한반도와 중국, 일본, 러시아를 경제, 정치, 문화적으로 연결하면 평화와 경제발전이라는 황해르네상스 시대를 열 수도 있다.
하나의 그림을 보면서 주절주절 떠들 수 있는 것은 감상을 하기 때문이다.
감상은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니라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림 속에 나오는 상징을 알거나 표현기법 따위를 아는 것도 감상하는데 도움이 된다.
무엇보다 우리그림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가장 좋은 감상태도이자 방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