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장생도에는 해, 구름, 바다, 산, 바위, 소나무, 복숭아나무, 대나무, 영지, 사슴, 학, 거북 따위의 요소가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하늘을 추가할 수도 있고, 산과 바위를 하나로 합칠 수도 있다.
각각의 요소는 모두 나름의 상징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상징들은 십장생도의 내용을 규정하고 형식을 완성시키는 역할을 한다.
각각은 십장생도를 이루는 독립적인 요소이다. 상대적으로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것이 아니며 한 요소가 다른 요소에게 종속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장생도의 여러 요소 중에서 존재감이 큰 것이 있는 반면 존재감이 적은 경우도 있다.
이것은 사물의 생태적 특성과 넓고 큰 화면을 짜임새 있게 구성하는 문제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소나무가 화면의 중심 부분을 차지하게 되면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커진다. 마찬가지로 복숭아나무가 화면의 중심을 차지하면 소나무는 들어갈 자리가 없어지면서 화면에서 빠지는 경우도 있다. 반면 소나무가 중심 부분을 차지하더라도 복숭아나무는 구석 부분에 그려진다.
이 말은 복숭아나무가 소나무보다 덜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소나무의 중요성이 그만큼 크다는 말이다.
장생도에는 소나무, 복숭아나무, 대나무가 나온다.
소나무의 존재감은 아주 높은데 반해 존재감이 떨어지는 나무는 대나무이다.
대나무는 거의 모든 장생도에 그려져 있다. 아직까지 대나무가 없는 장생도는 보지 못했을 정도이다. 그러나 대나무는 관심을 가지고 봐야 그 모습이 온전히 포착된다.
대나무가 가지고 있는 상징은 장생도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대나무는 나무도 아니고 풀도 아닌 조금 애매한 식물이다. 하지만 곧게 자라는 특성, 항상 푸름을 유지하는 특성 때문에 ‘절개와 지조’라는 상징을 얻었다.
‘지조와 절개’는 선비의 행동지침이다. 바로 ‘유학적 이상세계’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실천을 말하는 것이다.
장생도에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지만 ‘생명력이 풍부한 이상세계’는 사람이 이루는 것이다. 그 혜택도 모두 사람이 받는다. 이를 다른 말로 ‘홍익인간’이라고 부른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주체는 신(神)이나 영험한 동물이 아닌 인간이다.
이렇게 장생도의 각 요소에는 인간의 꿈과 실천이 투영되어 있다.

십장생도에서 그 존재가 조금 애매한 요소가 있다.
그것은 바로 복숭아나무이다.
복숭아나무는 정체가 모호하다.
복숭아나무의 정체를 의심하는 바탕에는 장생도를 도교적 관점에서 볼 것인가, 유학적 관점에서 볼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이 있다.
유학, 유교, 도교는 정확히 구분해야 한다. 그 개념의 차이가 전혀 다른 결과를 내올 수 있기 때문이다. 유학은 체계를 갖춘 학문이기 때문에 종교가 될 수 없다. 그럼에도 유교라고 부르는 것은 도교가 유학을 끌어 들였기 때문이다. 유학에서 제사형식만을 특화시켜 종교화시킨 것이다. 도교는 원초적 욕망이기 때문에 논리나 합리성, 혹은 체계가 없다. 그래서 논리와 합리성과 체계를 갖춘 고등 학문인 불교, 선교, 기독교, 유학-노장사상, 심지어는 공자까지도- 따위를 끌어당겨 외형을 갖춘다는 특성이 있다.
이것은 정조의 개혁정치가 실패하면서 급격히 유학적 가치가 훼손되어 힘을 잃었기 때문에 나타난 말기적 현상이다.

도교, 즉 ‘부귀영화, 불로장생’이라고 하는 원초적 욕망의 구현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복숭아나무는 다른 어떤 요소보다도 중요해진다. 복숭아나무에 달려있는 복숭아는 한 번 먹으로 1,000년을 산다는 불로장생의 대표적 상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이라면 장생도는 그야말로 도교적 길상화가 되고 만다. 동시에 조선의 미술이 총화 되어 있는 궁중회화는 고작 왕이나 왕족의 부귀영화와 장수를 기원하는 그림으로 전락해 버린다.

▲ 해반도도(海蟠桃圖)/비단에 채색/1920년대.
바다와 복숭아나무 그림이란 뜻이다. 이 그림은 장생도를 변주한 것이다. 그림 속의 복숭아나무는 여러 장생도에 그려진 것과 비슷하다. 반도(蟠桃)는 신선세계의 영험한 복숭아란 말이다. 제목으로만 보면 도교적인 냄새가 물씬 풍긴다. 그러나 원래 그림에 제목이 붙어있었던 것은 아니고 후대 사람들이 장생도와 구분하기 위해 지어낸 것이다.
이상세계는 선비라도 함부로 말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었다. 자칫 역적으로 몰려 죽을 수도 있는 무서운 개념이다. 대신에 선비들은 ‘선경(仙境)’이나 ‘신선이 사는 곳’ 따위로 에둘러 표현했다. [자료사진 - 심규섭]]

조선 초기 안견의 [몽유도원도]에는 복숭아나무가 나온다. 도연명의 [도화원기]의 소설을 차용한 것이지만 복숭아나무는 이상세계의 상징이었다. 복숭아나무에 대한 특별한 사건이나 상징이 없다는 것이 중요하다. 복숭아나무는 그저 일상의 주변에 항상 있었던 친근하고 소박한 과실나무에 불과하다. ‘특별한, 놀라운, 신기한’이란 수식어가 붙으면 논리성과 합리성이 사라진다.
안평대군이나 조선의 선비들이 [몽유도원도]를 통해서 꿈꾸던 이상세계는 ‘부귀영화, 불로장생’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도화원기]나 [몽유도원도]에 나타나는 복숭아나무는 열매가 아니라 꽃이 중심이다.
꽃은 생명이 활짝 핀 상태이면서 생명의 탄생이라는 상징을 가진다.
복숭아꽃에는 [도화원기]에서 나타나듯 전쟁과 약탈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 협동과 청빈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의 이상세계가 투영되어 있다.
이것은 중국이나 조선의 선비들이 추구했던 학문적 이상과도 일치하고 숱한 시(詩)와 그림을 통해 드러난 미학적 가치와도 통한다.
이런 의미로 보자면 장생도에 복숭아나무가 들어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소나무 대신 복숭아나무가 들어가 있는 장생도도 있고 복숭아나무를 중심으로 그린 ‘해반도도 海蟠桃圖’라는 그림이 가능한 것도 복숭아나무가 이상세계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시점으로 보자면, [몽유도원도]는 먼 거리 풍경이다. 최소한 100m 이상 떨어져서 보는 풍경인데 복숭아나무의 열매나 꽃이 정확히 관찰되는 거리는 아니다. 그래서 대략적인 꽃나무로 표현하고 있다. 도원(桃園)이라는 제목이 없다면 무슨 꽃나무인지 가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에 반해 장생도의 복숭아나무는 대략 10m 전후의 거리감을 가지고 있다. 학이나 사슴, 각종 풀의 세밀한 표현이 가능한 것은 거리가 가깝기 때문이다.
이 정도의 거리면 꽃이나 열매가 조그맣게 볼일 수 있다. 물론 장생도에서는 복숭아 열매를 과장하여 상대적으로 크게 표현한다.

어쨌든 장생도에 복숭아나무가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데 왜 복숭아열매를 과장해서 표현했을까하는 것이다.
17세기 전후로 그려진 장생도에도 복숭아열매는 크게 그려져 있다. 이것은 단순히 조선 말기의 도교적 영향 때문만은 아니라는 말이다.
16세기 중종 때 조광조는 개혁정치를 주도한다.
그 내용에는 유교적 미풍양속에 어긋나는 미신을 타파하고 불교나 도교와 관련된 종교행사를 폐지할 것을 주장이 담겨있다. 공납제의 폐단을 시정하고자 하였고 향약의 전국적 시행을 추진하였으며 소학교육을 장려하며, 유교적 가치관을 생활화하고 향촌자치와 성리학적 윤리를 강화하려 하였다.
특히 궁궐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일을 주관하는 관청인 소격서를 폐지하기도 한다.
이는 유학이 도교에 오염되는 것을 막고 유학적 가치를 높이고자했기 때문이다.
조광조의 개혁은 실패했지만 조광조는 유학의 영수였기 때문에 후대 선비들에 의해 추앙받았다. 일상생활에서의 도교적인 요소는 어느 정도 인정했지만 조선을 대표하는 궁중회화 속에 도교적 내용이 침투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는 말이다.
실제 장생도에 부귀영화를 뜻하는 모란이나 원추리 따위가 들어가는 것은 조선이 실질적으로 망한 후였다.

▲ 복사꽃과 매화를 뒤섞어 놓았다. 어느 것이 매화인지 복사꽃인지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물론 개화(開花) 시기는 매화가 빠르다. 장생도에는 시간개념이 무한히 확장되어 있어서 꽃 피는 시기를 통해 뭔가를 구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매화와 복사꽃은 독립적인 상징을 가지고 있으면서 겹치지 않는다. 복사꽃은 이상세계, 매화는 선비의 마음이다. 장생도에 매화가 들어가면 대나무의 상징과 겹친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조형성의 원리에 따라 대나무와 상징이 같고 복사꽃과 비슷한 매화는 철저히 배제되었을 것이다. [자료사진 - 심규섭]

복숭아나무와 가장 비슷하게 생긴 나무에는 살구나무나 배나무가 있다. 하지만 살구꽃이나 배꽃은 독립적인 상징이 없다. 살구꽃은 복숭아꽃의 사촌 정도로 보거나 아예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며 배꽃은 매화와 상징이 겹친다. 고려 말의 문신 이조년의 시 ‘이화에 월백하고梨花─月白’에서 이화(梨花)는 곧 배꽃을 뜻한다. 이 작품은 이조년이 충혜왕(忠惠王)의 실정을 비판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낙향한 뒤 자신의 충정심을 하소연한 내용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이화를 매화로 바꾸어도 큰 차이가 없다.

가장 비슷하면서도 다른 상징을 가진 나무는 바로 매화나무이다. 꽃의 모양이나 나무의 생김새도 비슷하다. 매화꽃에는 하얀색과 붉은색이 있는데 복사꽃의 연분홍이나 붉은색과 크게 다르지 않다. 꽃이 활짝 핀 상태에서 복숭아나무와 매화나무를 구분하는 일은 전문가가 아니라면 쉽지 않다.
만약 장생도에 복숭아나무를 그렸는데 매화나무와 혼동이 된다면 핵심적인 상징체계가 무너질 수도 있고 선비취향의 그림으로 규정될 수도 있다.
복숭아나무와 매화나무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점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두 나무의 가장 차이점은 바로 열매이다. 매화나무 열매, 즉 매실과 복숭아는 크기나 모양, 색에서 큰 차이가 있다.
커다란 복숭아 열매의 표현은 이 나무가 복숭아나무가 틀림없다는 것을 보증하는 상징이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며, 장생도의 복숭아열매의 강조는 매화나무와 구분하기 위한 장치로 해석하는 것이다.

매화는 선비의 ‘지조나 절개’의 상징이다.
그래서 매화를 그릴 때는 이파리가 없고 꽃도 많이 그리지 않는다. 스산하고 쓸쓸하고 외로운 느낌을 살린다. 찬바람이 남아있는 초봄의 분위기를 잘 살릴수록 좋은 그림이 된다.
이것도 복숭아나무와 차별성을 가진다. 의도했든 아니든 간에 사촌처럼 비슷한 두 나무는 서로의 상징을 지키기 위해 무진장 애를 쓴 흔적이 보인다.

물론 이것은 순전히 미술적, 조형적 상상이면서 잡스런 생각일 뿐이다.
그렇다하더라도 이런 상상은 우리그림에 대한 깊은 사랑에 몸이 달았기 때문이라는 것도 이해해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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