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은 교과서로 공부를 한다.
어떤 학생은 공부가 가장 쉽다고 말하고 어떤 학생은 어렵다고 한다.
하지만 원칙적으로 교과서로 공부하는 것은 어렵다.
교과서에는 원리나 결론만 나와 있다.
원래 교과서는 복잡하고 자질구레한 내용이 아니라 방대한 내용을 압축하여 상징화시킨 지식과 가치를 담고 있다. 학생들이 배우는 수 십 권 정도의 교과서를 꼼꼼하게 풀어내면 백과사전이 될 것이다.
교과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방대한 참고서와 실력있는 선생이 필요하다.
독학은 불가능하지만 시험을 위한 암기는 가능하다.
또한 한 시대를 유행하는 지식이나 가치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검증된 것만 담는다. 그래서 교과서는 상당히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교과서에는 새로운 지식은 없다. 모두 과거의 지식이다. 하지만 과거의 지식을 잘 배우고 난 후 당대의 정서나 가치를 결합시키면 창조를 할 수 있다.
창의나 창조의 원리는 기발한 발상이 아니라 ‘복제와 융합’이다.
복제는 과거의 지식이나 가치를 따라 배우는 것이다. 또한 융합은 과거의 지식을 바탕으로 시대의 흐름과 개인의 정서를 결합하는 것이다.

궁중회화는 우리그림의 교과서이다.
궁중회화는 엄격한 형식한 정해진 창작원리에 따라 그려졌다. 그래서 단순하고 명쾌하다.
세상의 사물은 제각각이지만 이것을 하나로 합치면 가장 단순한 모양이 된다. 다양한 모양의 동식물과 기암괴석이 존재하는 생태계도 결국은 지구라는 둥근 모양으로 통합되어 있다.
궁중회화에는 우리그림의 방대한 지식과 내용이 가장 단순하고 상징적인 형태로 담겨 있다.
안견, 정선, 김홍도와 같은 천재적인 화가뿐만 아니라 이름을 알리지 못한 숱한 화가들의 수많은 창작물들이 녹아있다.
궁중회화를 대표하는 그림으로는 장생도, 궁중모란도, 책가도, 신선도, 화조도, 문자도 따위가 있다.
조선 말기 궁중회화의 일부만 녹여내었는데도 세상에서 유래를 찾기 어려울 만큼 독특하고 풍부한 민화의 세계가 만들어졌다. 민화는 궁중회화를 복제하고 서로 다른 그림을 결합하였으며 시대의 흐름이나 정서를 반영한 것이다.

궁중회화는 우리그림을 배우고자 하는 화가지망생이라면 반드시 공부해야하는 교과서이다.
어떤 사람은 정선이나 김홍도 같은 천재적 화가의 작품세계를 따라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천재적인 화가의 총화는 궁중회화로 귀결된다. 조선시대에는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만들어낸 화가들이 많았다. 그렇다고 모두가 궁중회화에 녹아든 것은 아니었다.
나비를 잘 그렸던 화가, 고양이를 잘 그렸던 화가, 풍속화를 잘 그렸던 화가, 매난국죽(梅蘭菊竹)과 같은 사군자그림을 잘 그렸던 화가, 닭이나 소를 잘 그렸던 화가들이 있었지만 이들의 작품세계는 궁중회화에 채택되지 않았다.
이들의 그림 중에는 궁중을 장식하고 있는 그림도 있다.
하지만 궁중을 장식하고 있다고 모두가 궁중회화는 아니다. 궁중회화와 궁중 감상화는 구분되어야 한다. 궁중에서는 당시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을 사 모았다. 중국이나 일본에서 선물받은 그림도 있었다. 이런 그림은 궁궐을 잠깐 장식하다가 도화서 화원들의 연구용으로 넘어갔다. 좋은 부분은 수용했지만 필요가 없는 그림은 배제되었다. 그 선택은 도화서 화원의 몫이라기보다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결정하는 것이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핵심가치와 관계를 맺지 못하는 그림은 주변으로 밀려나는 것이다.
궁중회화에서 안견의 이상과 정선의 현실과 김홍도의 대중성을 찾아야 한다.
궁중회화에서 김홍도의 작품세계를 찾는 것은 가장 확실하면서도 풍부하다.

▲ 심규섭/복숭아나무와 사슴/디지털회화/2014.
이 그림의 제목은 ‘복숭아나무와 사슴’이다.
제목에는 별 뜻이 없다. 작품의 내용과 제목을 일치시키는 우리그림의 전통을 따랐을 뿐이다.
이 작품의 원형은 [십장생도]이다.
[십장생도]에 나오는 복숭아나무와 사슴만 끄집어내어 현대적으로 변주했다. 사슴은 나무처럼 생긴 뿔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늘과 사람을 연결하는 매개자의 상징이다. 복숭아나무는 도교의 영향으로 불로장수의 의미가 되었지만 원래는 무릉도원도에 나오는 복숭아꽃과 같이 이상세계를 뜻한다. 이상세계인가, 불로장생인가 하는 문제는 감상자의 처지에 따라 달리 수용될 수도 있다.
장생도가 이상세계의 내용을 담고 있기에 몽환적인 분위기로 만들었다. 배경은 단색으로 처리했지만 소금번지기 기법을 이용해 밑도 끝도 없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현실도 아니고 꿈도 아닌 그 사이의 미묘한 간격을 만들기 위해 여러 기법을 사용했다. [자료사진 - 심규섭]

교과서를 공부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암기하는 것이다. 암기가 먼저고 이해가 나중이다. 암기를 통해 원리를 배우고 원리를 통해 이해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궁중회화를 공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있는 그대로 모사하거나 베껴 그리는 일이다. 물론 이 과정도 결코 쉽지 않다.
전체적인 맥락이 이해가 되면 점차 부분적으로 들어간다.
전체에서 부분으로 공부하는 것이 가장 좋지만 반대로 부분에서 전체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다. 이 두 가지 방법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현실적이다.
[십장생도]에는 열 서너 가지의 요소가 있다. 각 요소를 독립적인 소재로 그린 작품도 있고 서로 어울리는 요소를 결합한 작품도 있다.
이렇게 몇 가지만 끄집어내어 창작하는 것은 장생도가 너무 방대한 그림이기 때문이다. 탁월한 기량을 가진 작가라도 장생도를 통째로 그리는 일은 쉽지 않다. 그림이 너무 크기 때문에 장식할 공간도 없고 값도 비싸서 유통시키기도 어려웠다.
또한 부분을 떼어내어 그려도 장생도의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일부가 전체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화가라면 장생도의 부분을 변주하고 싶은 열정이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자신이 가진 기량을 마음껏 펼쳐 보이고 싶을 것이다.

아무튼 독립적인 요소가 작품의 소재로 사용되는 것에는 소나무, 학, 사슴, 대나무, 바위 따위가 있다.
해나 구름, 바다는 주로 배경으로 사용된다. 또한 거북은 반드시 물이나 바다와 결합되어 있지만 독립적인 소재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영지는 이상세계를 드러내는 요소로 독립적인 그림을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판소리나 오페라에 나오는 여러 노래 중에서 뛰어나면서도 인기가 많은 노래가 있다. 이것을 판소리에서는 ‘눈대목’이라고 하고 오페라에서는 ‘아리아’라고 한다. ‘춘향가’라는 판소리에서 대표적인 ‘눈대목’은 ‘사랑 사랑 내사랑이야’라고 시작하는 ‘사랑가’이다.
[십장생도]에서도 ‘눈대목’같은 부분이 있다.
소나무와 학을 결합한 [송학도松鶴圖], 복숭아나무와 사슴을 결합한 [백록도白鹿圖]가 여기에 해당한다.
장생도의 부분을 그린 [송학도]나 [백록도]는 선비들에게는 ‘입신출세(立身出世)’의 의미로 수용된다. 또한 일반 백성들에게는 ‘불로장생’의 의미로 수용된다. 수용하는 계층의 정서와 가치를 반영한 결과이다. 그렇다고 ‘생명력이 풍부한 이상세계’라는 내용을 가진 [십장생도]의 가치가 훼손되는 것이 아니다. 선비들의 ‘입신출세’는 이상세계를 구현하기 위한 적극적인 행위로 볼 수 있고, 백성들의 ‘불로장생’은 생명을 풍부하게 하는 욕망의 표현이다.

▲ 장생도/추재 관서/비단에 채색/143*67.7/국립중앙박물관.
우측은 세부그림.
위 그림은 독립적인 그림인지 아니면 장생도 병풍의 일부분인지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소나무, 복숭아나무와 사슴을 중심 소재로 한 독립적인 그림이어도 큰 문제는 없다. 이렇게 장생도의 일부 요소를 떼어내어 독립적인 작품으로 만드는 작업이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자료사진 - 심규섭]

민화에서는 [십장생도]의 다양한 요소를 [궁중모란도], [신선도], [책가도], [화조도] 따위와 자유롭게 결합한다. 엄격하게 그림을 배운 화가는 전통이나 형식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대중의 그림인 민화에서는 굳이 이런 엄격한 형식을 지킬 필요가 없다. 대중들이 원하는 것은 ‘불로장생’이라는 원초적인 욕망이었다. 원초적인 욕망에는 형식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장생도의 사슴 등에 궁중모란을 꽂아 놓고 아래에는 영지를 그렸다. 복숭아나무와 사슴의 결합을 넘어서 복숭아나무와 학을 결합해 그린다. 매화와 학을 결합하고 궁중모란과 개를 함께 그리기도 한다. 엄격한 미술교육을 받은 화가들은 이런 발상을 하기 어렵다.
이렇게 기발한 발상은 궁중회화를 가볍게 만들거나 풍자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민화는 모두 궁중회화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지배계층은 한상차림으로 밥을 먹고 대중들은 비빔밥을 즐겨 먹는다. 하지만 개별 음식이 발전했기 때문에 비빔밥도 가능한 것이다.
또한 이것은 궁중회화가 일부 지배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백성들이 함께 향유하는 보편적인 그림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궁중회화는 완결된 형식이기 때문에 미술교과서의 역할을 한다.
궁중회화에는 ‘생명력이 풍부한 이상세계’, ‘엄격한 예법과 자발적 청빈’이라는 보편적 철학과 미학이 있다. 확대원근법이라는 조형이론과 선묘나 채색기법 같은 실기방법이 있으며 본그림이라는 재생산구조를 가지고 있다.

우리 것만 좋다고 주장하면 국수주의자라는 비판을 받는다. 반대로 우리 것을 무시하고 남의 것만 좋다고 하는 사람은 사대주의자라고 욕을 먹는다.
어떤 입장을 취하던 간에 역사를 통해 증명되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 것을 바탕으로 외부의 문화를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궁중회화의 가치를 강하게 주장하는 것은 외부 미술에 비해 우리그림의 바탕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래 중심을 잡으려면 반대편으로 기울어야 한다.
자기 땅에 서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은 정치, 경제, 문화의 영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탕으로 세상을 수용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가장 근본적이고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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