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월오봉도]나 [해학반도도]에 표현된 바다색은 황색, 짙은 갈색, 짙은 녹색이 주류를 이룬다. [자료사진 - 심규섭]

[일월오봉도]를 보면서 가장 의아했던 부분이 바로 바다의 표현이었다.
보통, 그림에서 바다나 물은 파란색으로 표현하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일월오봉도]의 바다는 누가 보아도 황색에 가깝다. 그래서 처음에는 땅의 표현, 즉 구릉이 아닐까 의심도 해 보았다. 그러나 파도가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의심은 접었다. 어떤 사람들은 땅에서 물줄기가 솟아오르는 표현이라고 주장하지만 억지에 가깝다.
바다를 표현한 수 십 점의 작품을 두루 살펴보니 바다의 색은 제각각이다. 황색에 가깝게 표현한 그림이 있는가하면, 짙은 갈색, 엷은 갈색, 짙거나 엷은 먹색, 엷은 청색, 먹과 녹색을 섞은 색, 회색 따위처럼 천차만별이다.
이렇게 다양한 색상으로 바다를 표현한 것은 특정한 바다색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화가가 특정 사물을 그릴 때 사용하는 색은 작가의 주관적 경험과 사회적 합의를 따른다.
주관적 경험은 직접 보거나 사생을 통해 얻지만 똑같은 사물이라도 화가의 가치관이나 감성에 따라 인식되는 색은 조금씩 차이가 난다. 특히 그림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내용이나 상징에 따라 실제 인식한 색과는 무관하게 표현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사회적 합의에 따른 색의 결정은 다수의 사람들이나 사회의 구성원이 특정 사물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대부분의 화가들은 이러한 사회적 결정을 무시할 수 없다.
우리그림에서 태양을 표현하는 색은 붉은 색이나 하얀색이다. 과학적으로 보자면 사람이 태양이 붉다는 것을 인지하기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대낮의 태양은 거의 볼 수 없으며 붉은 빛의 아침, 저녁의 해는 태양의 색이 아니라 대기의 색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태양을 붉거나 하얗다고 합의했기 때문에 화가도 이에 따르는 것이다.

수묵화의 경우에는 사물의 색이 별 의미가 없다. 색을 엷게 바르는 담채화도 마찬가지이다.
색을 사용하지 않으면 사물의 색은 감상자의 몫으로 남겨진다. 수묵산수화에서 산과 들, 바다, 하늘 따위는 모두 흑백으로 표현되어 있다. 색상 정보가 없지만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의 정서나 가치관에 따라 봄이나 겨울과 같이 전혀 다른 색상의 느낌을 가진다.
하지만 진채를 사용하는 궁중회화는 경우는 전혀 다르다.
궁중회화는 개인의 정서나 취향이 아니라 국가나 도화서의 가치나 합의에 따라 창작해야 한다. 각각의 사물을 표현하는 방법도 엄격한 형식이 있으며 사용하는 색상도 정해져 있다. 이러한 조형적 형식은 오랜 세월을 거쳐 형성된 것이라 특별한 능력을 가진 개인이라도 함부로 바꾸지 못한다.
대표적인 색의 표현방법은 ‘청록산수’기법이다. 궁중회화에서 표현하는 산이나 바위는 대부분 ‘청록산수’기법을 반복적으로 사용해 그린다. ‘청록산수’기법은 그야말로 청색과 녹색을 이용하는 채색방법이다. 실제 산이나 바위에는 청색과 녹색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갈색, 회색 같은 다양한 색이 존재한다. 하지만 다른 색을 배제하고 오로지 청색과 녹색만을 이용하여 채색하는 방법을 고수했다.
산과 바위뿐만 아니라 하늘, 태양, 구름, 소나무, 대나무, 영지 따위도 대부분 일정한 색을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표현한다. 이것은 각 사물을 표현하는 색이 정해져 있다는 말이다.
여기에 반해 바다의 표현은 제각각이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형적인 원리에서는 답을 찾을 수가 없다.
궁중회화가 하루아침에 정립된 것도 아닌데 바다색을 결정하지 못한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일월오봉도]의 바다는 굳이 황색이 아니어도 조형적으로 문제가 없다. 오히려 황색 바다는 상식에도 벗어나고 조형성도 흩트리게 한다.
어떤 사람은 [일월오봉도]에 표현된 황색바다는 오방색의 원리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다른 [일월오봉도]에의 바다는 청색이나 녹색에 가까운 색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음양오행론에 따른 오방색의 표현은 조형이론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이것은 ‘하나는 맞고, 하나는 틀리는’ 허접한 논리이다.

조금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 보자.
알래스카에 사는 원주민들은 수 십 가지의 하얀색을 구분하는 능력이 있다고 한다. 하얀색을 다양하게 구분한다는 것은 각각의 색에 이름이나 표현 방법이 붙어있다는 말과 같다. 이렇게 수많은 하얀색을 구분하는 능력을 가진 것은 자연환경에 때문이다. 알래스카에는 잠깐 동안의 여름을 빼고는 엄청난 눈이 내린다. 눈은 생활환경이자 생존환경이 된 것이다. 이런 자연환경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미묘하게 바뀌는 눈의 양이나 모양에 따른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는 노련한 어부는 계절이나 조류의 변화에 따른 바다색을 감지한다고 한다. 이런 바다색의 구분을 통해 어떤 물고기가 어디쯤 있는지를 알아내어 고기잡이를 한다.
조선시대에는 지금처럼 쉽게 바다를 볼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3면이 바다에 둘러싸인 곳이라고는 하나 주업은 농사였지 어업이 아니었다. 또한 한양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가 있는 인천도 족히 50km가 넘는다.
다시 말하면 바다는 하늘이나 산, 소나무 따위처럼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요소가 아니었다. 따라서 바다색에 대한 관념은 약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바다색은 정말 다양하다. 바다색은 원래 무색에 가깝고 하늘의 색을 투영하여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계절에 따라 혹은 아침저녁으로, 날씨에 따라 바뀐다. 도화서 화원이 바다를 그리기 위해 바다를 관찰하더라도 대표할만한 하나의 색을 찾아내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오히려 관찰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미궁에 빠질 것이다.
어쨌든 다양한 바다색을 경험 한 후 하나의 색으로 통합하여 상징화 시키는 과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다.

현재 우리는 바다를 파란색이라고 여긴다. 물론 상징화된 색이다. 원래 무색이면서 주변 환경에 의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바다를 파란색이라고 여기는 데에는 은밀한 상징이 숨어있다. 맑은 날씨에 파란 하늘빛을 투영하여 짙은 파란색으로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인지하는 바다색은 짙은 파랑이 아니라 맑고 밝은 파랑색이다. 유럽이나 미국에서의 밝은 파랑은 파라다이스, 에덴동산, 원초성, 휴양지, 풍요 따위의 상징을 가지고 있다.
이 중에서 사람들이 대표적인 인식하는 것은 야자나무 아래 수영복을 입고 누워 우산이 꽂힌 칵테일을 마시며 바라보는 바다색일 것이다.
이것은 자본과 소비라는 시대의 요구를 반영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남는 의문은 왜 하필 황색의 바다였을까 하는 것이다.
조형적 원리가 아니라면 정치, 문화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편하다.
조선시대의 국내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은 한양이었지만 주변 국가 간의 관계, 즉 외교를 중심으로 본다면 당연히 중국이다.
그 당시 조선이 경험했던 중국의 나라는 명과 청이었다. 대륙과 해양을 연결하는 한반도에서 선진문물은 대부분 대륙에서 들어왔다. 대륙의 섬나라에서 해양세력으로 부상한 일본이 한반도에 준 것은 선진문명이 아니라 침략과 약탈, 전쟁뿐이었다. 일본은 대륙과 연결고리가 끊어지면 약탈을 했고, 연결되면 침략을 했다.
아무튼 중국을 통해 대륙문명을 수용하고자 했던 조선이 육상으로만 교역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육상으로 교역을 하는 것은 인원과 시간, 위험부담이 많이 따른다. 물론 해상교역의 경우에서 위험부담이 따르기는 마찬가지이지만 한 번에 많은 양의 물건과 사람을 실어 옮길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당연히 중국과의 해상교역은 황해를 통해 이루어졌다.
실제 한반도의 권력은 누가 황해를 점령하는가에 달려있다. 이미 기원 전 3000년 경부터 계절풍을 이용해 황해를 항해했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는 한강 어귀를 장악한 후 중국(당나라)과의 교류를 하고 나당연합군을 만들어 삼국통일을 이룬다. 이때 당나라 군대는 배를 이용해 황해를 건너와 신라군대와 합쳐 백제와 고구려를 공격했다. 왕건이 고려를 세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세력은 바로 황해의 해상권을 장악한 가문이었다.

▲ 황하강에서 밀려드는 황톳물 때문에 황해라는 이름을 얻었다. 중국에서는 이렇게 황해의 황톳물이 섞이는 현상을 ‘황룡잠수’라고 부른다. [자료사진 - 심규섭]

우리나라에서는 서해라고 부르지만 공식적인 바다명은 황해(黃海.Yellow Sea)이다.
바다의 크기는 남북으로 약 1000km, 동서로 700km 정도이고 평균수심 44m의 대륙붕 지형을 형성하고 있다. 압록강에서 해남까지의 직선거리는 650km 정도이나 해안선을 따라 거리를 측정하면 약 4,700km에 이르는 넓은 생태환경이 만들어져있다.
황해는 그야말로 누런 바다라는 뜻이다. 실제 바다가 누렇지는 않지만 청색과 갈색이 섞여 짙은 녹색처럼 보이기도 하고 구름이 많은 날에는 짙은 황색처럼 보이기도 한다.
황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황하강의 황톳물이 바다에 스며들면서 생긴 것이다. 황하강에서 흘러드는 황톳물은 육지의 영양분을 듬뿍 담고 있다. 그래서 황해에는 100여종의 어종과 다양한 두족류, 갑각류, 해초류를 합치면 약 200여종의 다양한 해양생물이 살고 있어서 인간생활에는 보물창고나 다름없이 비옥한 바다이다.
황해는 조선에게는 정치, 경제, 외교의 바다이고, 풍부한 해양자원이 있는 생명의 바다였다.

도화서 화원들은 외교 사신행렬에 끼어 황해를 건넜을 것이다. 이들이 본 바다의 색깔은 맑은 날의 짙은 녹색과 흐린 날의 짙은 갈색이었다.
이들이 본 바다는 곧 세상 전부의 바다였고 그림에 반영되었다.
[장생도]나 [해학반도도], [요지연도], [일월오봉도]에 표현된 바다색은 대부분 짙은 녹색이나 짙은 갈색이다. 가끔 짙은 청색으로 보이는 바다도 짙은 녹색의 변형된 표현일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그림에 표현된 바다는 대부분 황해고 황해의 색이었다. 일본 우키요에에 표현된 거대한 파도도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그림 속의 파도는 격렬하지도 잔잔하지도 않다. 이것 또한 황해의 바다와 닮았다.
[장생도]는 ‘생명력이 풍부한 이상세계’를 담고 있다. [일월오봉도]는 이러한 세계를 구현하는 사람, 즉 왕을 상징하는 그림이다. 그림 속에는 생명력을 풍부하게 하는 각종 요소들로 채워져 있다. 한반도의 정치, 경제의 중심지이며 생존에 필요한 풍부한 자원이 있는 황해의 바다가 장생도에 들어가 있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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