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장생도]는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그림이다.
또한 우리 선조들의 생명에 대한 존중과 꿈꾸던 이상세계가 집약되어 있는 인류보편적인 작품이다.
그럼에도 [십장생도]는 우리나라에서 그저 ‘장수를 바라는 그림’ 정도로 치부되고 있으며 한의원 보약 포장지를 장식하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약간은 비참하지만 현실을 솔직히 말하면 이렇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림을 좋아하지 않는다.
미술작품을 사지도 않고 집안이나 가게에 걸지도 않는다. 식당이나 술집의 벽면을 가장 많이 차지하는 것은 대형 티브와 메뉴판이다.
그래도 전라도 식당이나 술집에는 허접한 산수화 한 점 정도는 걸려있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고 있다.
그림을 투자목적 외에 감상용으로 사거나 걸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이 땅의 향기와 풍경과 사람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전에 프랑스 파리에 갔을 때의 경험이다.
영화를 배우러 온 젊은 우리나라 여성이 있었다. 유학을 하고 있긴 했지만 아르바이트를 하며 빠듯한 돈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사는 곳은 요즘으로 비교한다면 ‘고시텔’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런 집에 조각 작품이 장식되어 있었다. 약 30cm 정도 크기의 브론즈(청동) 조각품이었다. 궁금해서 가격을 물어보았다. 파리 시내에서 개인전을 하던 작가에게 우리 돈 약 70만 원 정도에 구입했다고 한다. 15년 전이니까 제법 큰돈이다.
작품을 구입한 연유를 물었다.
대답이 가관이다. 여기서는 으레 그렇단다. 파리 시민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2년 정도에 소품 한 점 정도는 사야 한단다.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예술작품 이야기를 하지 못하면 ‘왕따’가 될 가능성이 있단다.
나중에 이 대답의 의미를 알았다.
젊은 여성 영화학도는 프랑스 영화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파리의 시민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파리의 공기와 냄새와 풍경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있었고 무엇보다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자부심이 파리의 아름다움을 담은 작품을 구입하도록 한 것이다.
사회의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사람을 흔히 ‘지도층’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 ‘지도층’들은 조국에 대한 사랑, 민족과 전통에 대한 애정이 없다.
일반사람들은 이런 ‘지도층’들이 만들어 놓은 분위기를 따라간다.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침탈과 강대국에 의한 민족과 나라의 분단, 자주권의 상실 따위의 구조적인 문제이지만, 이들은 우리나라보다 미국이나 일본을 더 사랑한다. 미국의 가치와 문화, 언어를 좋아하고 따라하는데 여념이 없다. 우리말보다는 영어를 사용해서 미국의 한 주로 편입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는 무리들도 있다. 우리나라의 재벌들은 유독 미국의 미술작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
민족의 전통과 이 땅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자부심이 생기지 않는다.
이 땅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이 없는데 그것을 담은 미술작품에 관심을 가지겠는가.
현재 미술시장은 국가와 기업이 주도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는 국민의 세금으로 예산을 편성해 화가들의 작품을 구매해주고 있고 비엔날레 같은 거대한 기획전시는 기업이 후원한다.
그야말로 세금으로 화가를 먹여 살리는 관제미술이자 친재벌 미술에 다름 아니다.
이런 말을 하는데 어떤 사람은 작품이 너무 비싸서 구입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어불성설이고 비겁한 변명이다.
사랑과 자부심을 드러내는데 돈의 많고 적음이 웬 말인가. 사랑을 담았다면 길거리 머리핀에도 여성은 감동한다.
저렴한 판화(인쇄)작품도 있고, 몇 십 만원이면 구입할 수 있는 작품도 수두룩하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이런 작품을 선호하면 화가는 이에 맞추어 창작을 할 것이다.
예술은 이 땅에서 나는 모든 가치를 아름답게 담는다.
하지만 사람들이 이 땅의 가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예술은 황폐해진다.
분단의 슬픔은 휴전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미술세계에도 엄연히 존재한다.
조선의 화가들은 수묵산수화를 주로 그렸다.
수묵산수화의 수요자는 대부분 선비, 양반들이었다.
선비는 조선의 지식인이자 정치인이고 지배세력이었다.
선비들은 ‘엄격한 예법과 자발적 청빈’이라고 하는 주자성리학의 행동지침을 목숨처럼 지키고 따르고자 했다.
화가들은 이러한 선비들의 가치를 그림에 담다보니 화려한 채색을 멀리했고 치밀한 구도와 섬세한 표현, 웅장한 화면 따위를 경계했다. 화가의 남다른 재주는 ‘천기(賤技)’라 하여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선비들은 소박하면서도 운치가 있는 그림, 담백하면서도 화의(畵意)가 명쾌한 그림을 선호했다. 자연스럽게 그림은 서책의 크기와 비슷한 화첩 정도도 작아졌고, 즉흥적인 필력으로 그린 그림이 유행한다.
하지만 이런 그림이 조선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담았다하더라도, 화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조형성이 뒤떨어진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어떤 젊은 작가는 술자리에서 ‘뜻만 좋으면 모든 조형성이 무시되고 용서되는 그림’, ‘화가가 못 그리는 경쟁을 하는 것 같다’고 수묵화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사실 조선의 수묵화는 중국을 따라가지 못한다. 필력이나 선묘, 채색, 화면의 크기, 웅장함, 치밀한 소묘, 사실감은 단연 중국화가 독보적이다.
조선의 수묵화는 그저 조선의 선비를 위한, 선비에 의한 그림, 또한 늙은이들의 그림으로 치부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수묵화가 세계적인 인정을 받기란 요원하다. 열정이 맹렬한 젊은 작가들의 마음을 사로잡기도 어렵다.
하지만 우리에겐 ‘도화서(圖畵署)’와 궁중화원, 궁중회화가 있다.
도화서는 조선초기부터 1894년 폐지될 때까지 존속하면서 조선과 운명을 같이 했다. 도화서에는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 궁중화원의 자격으로 창작활동을 했다.
도화서 화원들이 창작한 미술작품에는 조선의 가치가 함축되어 있었고, 3m에 이르는 거대한 크기와, 화려한 채색과 치밀한 묘사를 통한 웅장한 화면이 연출되어 있다. 마치 수묵화에서 풀지 못했던 조형적 기량을 분풀이를 하듯 한꺼번에 쏟아부은 느낌이 들 정도이다.
중국에도 궁중화원이 있었지만 200년 단위로 왕조가 망하기를 반복했기 때문에 조선의 도화서만큼 집약되고 압축되지는 않는다. 중국의 수많은 사람 중에서 발굴된 뛰어난 천재라 하더라도 500년이란 세월의 총합에는 이기지 못한다.
우리그림의 진짜배기는 민화도 아니고 수묵화도 아닌 궁중회화이다.
조선의 가치가 총합되어 있는 왕실의 미술작품,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 모여 있었던 도화서 화원들이 창작한 미술작품, 오랜 세월동안 경험과 지식이 녹아있는 탄탄한 구도, 화려한 채색과 기법, 혀를 내두를 만큼 치밀한 묘사가 만들어 내는 웅장하고 거대한 화면의 미술작품은 세계 어디에 내어놓아도 손색이 없다.

우리에게 통일은 단순히 영토의 결합만을 뜻하지 않는다. 또한 한반도에 국한된 문제도 아니다. 우리민족의 통일은 세계적인 사변이다.
남북의 통일을 놓고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가 뒤엉켜있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미국 군사력의 60%가 집결되어 있고,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이 충돌하고, 이념과 사상이 총성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
그래서 남북의 통일은 단순히 흡수통일이나 적화통일 따위로 해결되지 않는다.
제국주의 문제, 세계 비핵화 문제, 제3세계 문제, 금융자본주의 문제, 신자유주의 문제 따위가 한꺼번에 해결되어야 하는 전 인류의 문제이다.
그래서 한반도의 통일은 전쟁과 침략과 약탈과 살육을 넘어 인류의 새로운 이상세계를 구현하는 시금석이 될 수도 있다.
인류가 추구하는 이상세계는 바로 [십장생도]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십장생도十長生圖]는 열 가지 장생하는 요소의 그림이라는 뜻이 아니라 완성된 이상세계라는 뜻이다.
한반도의 통일은 민족에 대한 사랑과 이 땅에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만들어 낼 것이다. 이 땅에서 나는 냄새는 향기롭고, 산천은 아름다울 것이며, 동포들에 대한 신뢰와 믿음은 깊을 것이다.
집집마다 우리의 산하와 정서를 담은 그림들이 걸릴 것이고, 세계인들은 평화와 생명의 존엄이 넘쳐나는 [십장생도]를 보겠다고 구름처럼 몰려들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