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예술은 시대를 반영한다.
시대는 정치, 경제, 종교, 문화의 총체로 구현된다. 물론 이러한 시대의 총체는 사람의 날줄과 씨줄로 연결된 촘촘한 삶을 통과한 결과이다.
이것을 시간의 흐름에 맞추면 곧 역사가 된다.
시간이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순환 고리로 연결되어 있듯이 시대의 흐름인 역사도 과거와 현재, 미래가 총합되어 있다.
따라서 예술이라는 사회적 가치는 단번에 만들어지거나 홀연히 없어지지 않는다.
만약 없어졌다면 그에 맞는 이유가 있을 것이고, 기록이 없거나 박물관에 보존되지 않았다면 역사를 이어온 사람들의 문화적 유전자 속 어딘가에는 남아있을 것이다.
이렇듯 역사는 예술의 형태를 빌어 사람의 오감을 통해 수용되고, 문화적 유전자 속에 유, 무형으로 쌓여 민족과 공동체를 이루는 근간이 된다.

흔히 역사를 지배세력의 기록이라고 한다.
이런 규정은 역사를 변증법적인 투쟁의 결과로 인식하는 시각에서 나온 것이다.
일면 타당한 부분이 있지만 모든 역사와 예술이 그러한 것은 아니다.
권력은 보편성을 획득해야 역사로 자리 잡을 수 있다. 보편성은 자연의 흐름이자 사람이 현실세계에 투영한 자연의 진리이다.
일본의 조선침탈과 식민지 지배는 전쟁, 살육, 약탈, 파괴를 동반했기 때문에 보편성이 없다.
일제는 식민지 시대의 지배세력이었지만 역사 속에서 부정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제 식민지 시대의 보편성은 독립투쟁 세력과 독립 운동가들이 가지고 있다.
예술이 지배세력과 지배사상과 관계를 맺으면서 시대를 반영하지만 보편성을 획득하지 못하면
쓰레기로 전락한다.
그래서 예술은 인류보편적인 지배사상과 실천 강령을 가진 세력과 만났을 때 꽃을 피운다.

내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바로 ‘화가는 죽고 나서 유명해진다’, 혹은 ‘화가가 죽고 나면 작품 값이 오른다’라는 말이다. 당대를 반영하는 화가가 당대에 인정받지 못하다가 세월이 한참 흘러 인정받는다는 말도 안 되는 논리이다.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 화가는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는 딱 한 명이다. 바로 불운하게 살다간 ‘빈센트 반 고흐’이다. ‘고흐’는 죽을 때까지 작품을 한두 점 밖에는 팔지 못했다고 전한다. 같은 후기 인상파 작가로 묶여있는 ‘세잔’, ‘고갱’이 당대에 유명세를 누리고 살다간 것과 비교하면 ‘고흐’는 정말 최악의 화가였다.
물론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는 ‘세잔’, ‘고갱’을 몰라도 ‘고흐’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고흐’의 유작은 수백억에 거래된다.
‘세잔’은 추상미술의 바탕을 마련했고, ‘고갱’은 자연주의 철학을 반영한 작품을 창작했다.
하지만 미술계에서 ‘고흐’에 대한 평가는 바닥이다. ‘고흐’는 당대의 가치를 반영하지도 못했고, 후대의 가치를 미리 담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파란만장했던 ‘고흐’의 인생과는 별도로 작품 수준은 언급할 가치가 별로 없다.
‘화가가 죽고 나면 작품 값이 오른다’는 말은 철저히 장사치들의 상술이다. ‘수요와 공급’이라는 시장원리에 따라 화가가 죽어서 더 이상 작품을 창작하지 못하면 기존에 유통되던 작품의 가격이 오른다는 말이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대꾸한다.
“저는 오래 살고 싶어서 작품을 팔지 않습니다.”

▲ 조선의 탁월한 화가들이 그려낸 이상세계이다. 그림 속에는 당대의 철학과 가치가 녹아있다. 이러한 화가들의 그림은 [십장생도]에 총화되고 함축되었다. 위부터 [십장생도](디지털), 안견의 [몽유도원도], 김홍도의 [신선도], 정선의 [금강산도]. [자료사진 - 심규섭]
조선시대를 주름잡은 탁월한 화가들이 있었다.
안견,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과 같은 사람들이다. 대부분 교과서에 실려 있을 정도로 유명한 화가들이다.
이들의 작품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고, 작품세계나 예술적 삶에 관한 책은 어림잡아 수백 권 이상 출판되었을 것이다.
이들의 작품이 역사 속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나름의 보편성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작품의 가치는 물감이나 기법, 필치, 농담이라는 조형적 기법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작품 속에 담긴 사상과 철학이라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작품의 수준은 조형적 형식과 보편적 철학의 절묘한 결합을 통해 결정된다.
유명화가가 되지 못한 수많은 평범한 화가들도 모두 힘든 훈련 과정을 거쳐 조형적 원리를 배웠다. 또한 지배철학을 현실에 구현하는 정치와 직간접적인 관계를 가지면서 창작활동을 했다.

안견의 탁월한 조형적 기량은 안평대군의 철학과 이상세계와 만나 [몽유도원도]라는 걸작을 만들었다. 안평대군은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바탕으로 한 꿈 이야기를 안견에게 그리게 한다. 도연명의 무릉도원은 그야말로 이상세계이다. [몽유도원도]는 제목처럼 이상세계를 간절히 원하는 의지를 담은 그림이다. 안평대군은 실제로 무릉도원과 똑같이 여겼다는 부암동계곡에 무계정사를 짓고 조선의 땅에 이상세계를 구현하고자 했다.
안평대군은 나중에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과 정치력을 겨뤘던 인물이다.
안견의 [몽유도원도]에는 그림을 보고 감상평을 넣은 신숙주, 이개, 정인지, 박연, 김종서, 박팽년, 이현로, 성삼문, 서거정 등 22명의 이름이 적혀있다.
이 그림에 이름을 넣은 많은 문인(정치인)들은 이후 계유정란 때 죽임을 당하거나 안평대군을 버린다. 수양대군이나 한명회는 [몽유도원도]를 일종의 정치적 연판장(연판장-여러 사람의 의견이나 주장을 표명하기 위하여 연명으로 작성한 문서)으로 해석한 것이다. 일명 ‘생육신, 사육신’에 관한 이야기는 모두 [몽유도원도]와 관련이 있다.
안평대군의 정치적 관점은 정도전이 추구했던 ‘왕권과 선비세력의 균형’을 통한 이상세계였다면 수양대군의 정치적 추구는 왕권강화와 비대해진 양반세력에 대한 견제였을 것이다.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은 단종에 이어 세조로 등극하고 여러 가지 개혁적인 정치를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수양대군으로 기억하지 세조로서의 업적은 잘 모른다.
이것은 세조가 수많은 선비들을 반역죄로 척살한 계유정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실제 선비들이 반역죄를 저질렀는지 혹은 모함에 의한 것인지는 입장에 따라 다르게 해석한다. 하지만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들도 선비이기 때문에 사화(士禍)를 일으킨 왕에게는 공식명칭보다는 한 단계 낮춰 부르는 속성이 있다. 조선에는 4번의 사화가 있었는데 수양대군, 광해군, 연산군 때이다. 이들은 모두 정식 왕으로 등극하고 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왕이 되기 전의 이름을 부른다.
이렇듯 [몽유도원도]에는 안평대군과 그를 따랐던 수많은 정치인의 파란만장한 꿈과 좌절이 녹아있다.
조선에 맞는 이상세계를 구현하고자 했던 안평대군의 정치철학이 없었다면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한낮의 개꿈을 담은 허접한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겸재 정선은 ‘진경산수화’를 개척한 화가이다.
또한 영조와 깊은 관계를 맺은 왕의 화가이기도 했다.
명나라가 망한 이후, 선비들 사이에서는 자주적인 사상이 등장했고 정선은 금강산그림을 통해 조선이 추구해야 할 이상세계를 보여주었다. 우리 강산의 풍경을 정선 특유의 필치에 담아내어 조선의 자부심을 높였다.
[몽유도원도]가 안평대군의 이상세계를 구현한 그림이라면 정선의 금강산 그림은 영조의 이상세계를 담은 그림이다.
정선의 진경산수화가 ‘소중화사상(小中華思想)’의 발현이라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청나라는 조선을 침략한 국가이다. 자신의 나라를 침략한 국가에게 곧바로 머리를 숙이는 것은 명분과 체면을 소중하게 여겼던 선비들의 사상과 부합하지 않는다.
오히려 명나라의 유학적 전통을 조선 내부에 투영시켜 독특하게 발전시켰다고 보는 게 맞다.

단원 김홍도와 정조의 개혁정치는 한 몸으로 결합되어 있다.
정조는 선비들의 정치력과 백성들의 민심을 통해 구태의 정치를 개혁하고자 했다. 선비들의 학문에 대한 욕구를 ‘책가도’에 담아내었으며, 백성들의 삶에 대한 원초적 욕망을 ‘신선도’에 구현시켰다. 중국의 [다보각경도(多寶格景圖)]를 바탕으로 [책가도]라는 그림을 창안한 화가, 중국의 [요지연도]를 수용해 [신선도]를 대중화시킨 화가도 모두 김홍도였다.
김홍도는 풍속화, 진경산수화, 화조도, 인물, 영모 따위를 모두 잘 그렸지만 그 중에 대표를 꼽으라면 단연 [신선도]라고 할 수 있다.
김홍도의 [신선도]는 정조의 탁월한 정치사상과 만나서 명작의 반열에 올랐다.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는 ‘실학사상’, ‘시장경제’의 흐름 속에서 나온 것이고, 오원 장승업의 남종산수화는 암울한 시대에 선비들의 꼿꼿한 품격을 담고 있다.

가끔 우리그림에 민중미술은 없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우리그림에 민중미술은 없다.
민중미술은 1980년대 노동자, 농민의 정치적 자각과 진출을 반영한 형식이었다. 하지만 민중의 개념이 확대되고 사회적 모순의 근본을 이해하면서 민족미술로 바뀐다.
민중미술이나 민족미술이라는 개념과 형식이 생겨난 것은 우리 사회를 총합한 보편적 사상이 뚜렷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외세의 의한 분단과 대립의 결과이다. 외세에 의해 우리의 운명이 뒤틀어진 모순을 바로잡고자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고통을 당했다.

또 어떤 미술이론가는 민화가 곧 민중미술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민화는 야나기 무네요시가 만든 허구적이고 기만적인 이론이다.
민화는 궁중회화, 화가의 수묵화에서 흘러내린 속화(俗畵), 혹은 대중미술이다.
조선은 500년 이상 건재했던 나라였다. 조선의 지배철학은 주자성리학이었고 ‘엄격한 예법과 자발적 청빈’이라는 실천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조선의 미술은 우리민족의 전통인 유학과 불교, 도교를 모두 함축하여 발전했다.
지배와 피지배라는 계급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를 하는 계층과 정치의 혜택을 받는 계층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안평대군이 추구했던 이상세계, 영조나 정조가 꿈꾸었던 세상은 왕족이나 양반만 잘 먹고 잘살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이상세계의 구현이라는 정치의 최종적인 혜택은 언제나 백성들의 몫이었다. 백성을 위한 정치, 공동체를 위한 정치를 위해 선비들은 기꺼이 목숨을 버렸다. 또한 왕도 독살을 당하거나 비운의 죽음을 맞이했다.
정치를 통해 이상세계를 건설하고자 하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목숨을 내놓을 만한 철학과 배짱을 가져야 한다.

안견의 [몽유도원도], 정선의 [금강산도], 김홍도의 [신선도]는 모두 조선의 이상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조선의 이상세계를 양식화, 정형화 한 그림이 바로 [십장생도]이다.
궁궐을 가득 채운 [십장생도]는 ‘생명력이 풍부한 이상세계’라는 보편적 철학을 표현하고 있으며, 조선의 정치사상을 함축하고 있는 무릉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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