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1월 6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꺼내든 ‘통일 대박론’이 현 정부 대북정책의 기치로 나부끼고 있다. 지난 6일 진행된 통일부, 외교부, 국방부, 국가보훈처 합동업무보고의 주제도 ‘튼튼한 안보, 평화통일 기반 구축’이며, 통일부는 ‘범정부적 통일준비 협업체계 구축’을 제시했다.

윤병세 장관은 업무보고 후 박근혜 대통령과의 오찬자리에서 “우리 외교안보 부처 모두가 앞으로 ‘통일역군’이 된다는 자세 하에 정부와 국민과 국제사회가 이러한 방향으로 전부 다 같이 긴밀한 소통을 할 것이라는 각오를 말씀드렸다”고 밝혔다. 외교부와 국방부까지 갑자기 ‘통일역군’이 되겠다니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상황이 이러하니 각 부처는 대통령 관심사안인 ‘통일준비’를 위해 부산을 떨고 있다. 심지어 별 관련이 없어 보이는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까지 “통일시대를 대비해 통일 이후 공정거래법 운영방안에 대해 독일 사례 등을 연구해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니 담당 부처야 오죽할 것인가.

장성택 사건과 남재준의 ‘2015년 조국통일’ 발언

갑자기 ‘통일 대박론’으로 온 나라가 들썩이고 있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어 보인다. 먼저 그 진원지로 지목되는 곳은 국가정보원(국정원)이다. 남재준 국정원장은 지난해 12월 21일 국정원 간부 송년회 자리에서 “2015년에는 대한민국 체제로 조국이 통일돼 있을 것”이라며 “우리 조국을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통일시키기 위해 다 같이 죽자”고 말한 것으로 <조선일보>가 보도했다.

이어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 신문들이 새해를 맞아 일제히 통일 화두를 전면에 내걸었고, 이어 문제의 박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 발언이 나온 것이다. 우연의 일치라기 보다는 하나의 흐름이 읽히는 대목이다.

문제는 국정원이 이처럼 2015년까지 흡수통일(자유민주주의 체제로 통일)을 장담하면서 내놓은 근거가 무엇이냐다. 국정원이 스스로 내놓은 설명은 없다. 다만, 남재준 원장이 국회 법사위에서 “북한의 불확실성이 증대됐기 때문에 북한 붕괴 등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그런 상황을 눈을 부릅뜨고 예의주시하라는 취지였다”고 말한 적이 있을 뿐이다.

보다 공식적인 설명은 외교부 고위 당국자가 지난 6일 대통령 업무보고 직후 행한 배경설명에서 나왔다. 그는 “북한의 불안정성, 불확실성, 유동성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저희 정부만 그렇게 지금 판단하기 보다는 미국 워싱턴에서도 수없이 나오는 메시지도 그렇고 심지어 중국 측에서도 과거와 달리 이러한 분석들이 점점 많이 나오고 있다”며 “아마 작년에 장성택 처형 문제를 포함해서 지난 1년여 이상 북한 측의 대외적 행태 이런 것에 대해서 과거보다 예측가능성이 상당히 떨어지고 있다는 판단이 일반적으로 있는 것 같고, 이러한 점에서 앞으로 북한의 대외정책 이런 것이 가늠하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요약하면 장성택 처형 이후 북한 정세와 리더십의 불안정이 높아져 붕괴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과 미국, 중국 등 외국에서도 유사한 분석을 내놓고 있다는 점이 근거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앙꼬 없는 찐방’에 불과하다. 북한이 왜 불안정하고 심지어 붕괴까지 될 수 있는지 그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뚜렷한 근거 없이 북한 불안정은 이미 기정사실로 전제가 돼 버렸고, 따라서 붕괴는 대비해야 할 가능성으로 열리게 된 것이다.

국정원 ‘물타기’와 북한 불안정론

북한 불안정론이 불거진 직접적 계기는 아무래도 지난해 12월 장성택 처형 사건임에 틀림없다. 외교부 고위 당국자도 유일하게 장성택 사건을 지적했다. 그러나 장성택 사건은 북한의 ‘김정은 체제’가 불안정하다는 증거로 볼 수도 있지만 안정화로 접어들었다는 증거로도 얼마든지 채택될 수 있다.

많은 북한 전문가들은 장성택 사건 이후 김정은 체제의 공고화가 가속화될 것으로 전망하고있고, 실제로 최근 북한을 다녀온 인사들의 전언에 따르면 김정은 제1국방위원장을 ‘수령’으로 호칭하는 등 김정은 유일체제가 훨씬 강화되고 있는 조짐들이 감지되고 있다.

문제는 장성택 사건이라는 충격적 사안을 누군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해석하고 여기에 몇 가지 확인되지 않은 추가정보들을 덧붙여 북한 붕괴론으로까지 연결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당연히 의심을 사는 곳은 국정원이다.

사실 국정원과 원세훈 전임 원장, 남재준 원장은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과 이 사건의 축소은폐 등으로 지난해 연말 국정원 창립 이래 최대의 위기에 내몰린 상황이었다. 여야 합의로 국정원 개혁특위와 대선개입 특검이 구체적 일정에 올랐고, 국민 여론 역시 이를 강력히 지지하고 있었다.

국정원과 남재준 원장을 구원해준 구세주는 아이러니하게도 북한이었다. 여야가 국정원 개혁특위 합의 논의를 진행하던 3일, 국정원은 국회에 장성택 숙청설을 브리핑했고, 언론에 보도자료까지 돌렸다. 그런데 북한 언론이 며칠 후 이를 사실로 확인 보도해줬으니 국정원으로서는 구세주를 만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국정원의 장성택 사건 사전 포착 및 공개는 남북 정보전 사상 유래 없는 개가로 평가할 만한 일대 사건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공개한 시점이나 방식은 위기에 처한 국정원이 살아남기 위해 북한 정보를 이용한 전형적인 ‘물타기’였음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쨌든 국정원은 대북 정보전에서 개가를 올리고 위기를 탈출하는 한편, 나아가 앞으로 살길을 모색하면서 북한 불안정론, 붕괴론에 근거한 ‘2015년 조국통일’을 제시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미국과 중국도 북한 불안정론 인정했다?

사석에서 ‘북한 불안정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한 정부 당국자는 “김정일이 5년 이내에 사망할 것이라는 정보당국의 관측이 실제로 들어맞지 않았느냐”며 국정원의 정보분석력을 무시할 수만은 없다고 말했다. 2008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쓰러진 뒤 국정원은 뇌사진 파일을 입수, 분석한 결과 5년을 넘기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고, 이명박 대통령의 일방적 대북정책의 한 배경이 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성택 숙청 정보도 미리 입수했던 국정원이 북한 불안정론을 흘리는 마당에 무시할 수만은 없다는 분위기가 팽배해진 것이다. 여기에다 박 대통령 임기 내 통일, 즉 ‘통일 대통령 만들기’ 논리가 가세하면 누구도 감히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형성되게 마련이다.

“대통령 임기 내에 우리 체제로 통일을 이루어 박근혜 대통령을 역사에 남는 통일 대통령으로 만들고, 만약 임기 내에 통일이 안 되더라도 ‘통일의 발판을 마련한 대통령’으로 기록된다면 좋은 것 아니냐”는 논리에 반대해 나설 관료가 있겠는가.

최근 미국의 언론플레이도 심상치 않다. 중진 정치인 출신인 케리 미 국무부장관은 지난 1일 독일 뮌헨에서 열린 국제안보회의에서 “한국.일본과 남북한 통일문제를 협의하고 있으며, 중국과 이 문제를 논의할 것”이라고 말해 관심을 끌었다.

심지어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작년 한.중 정상회담은 통일문제에 대한 터부를 깨는 하나의 출발점이었다”며 “과거 이 문제 대해서 자동반사를 내보였던 중국 측이 최고위 레벨 차원에서도 솔직하게 본인들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한국 국민들의 염원인 평화통일을 지지한다’는 말까지 나왔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나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은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케리 장관의 발언은 “일종의 성동격서 전략”이라며 “통일을 대비하는 척하면서 북한의 붕괴 가능성을 퍼뜨리고, 이를 통해 동북아의 안보 상황이 혼란스러워질 가능성이 있다면서 한미동맹을 강화해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북한의 군사적 위협, 나아가 북한의 급변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일본도 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얘기”라고 짚었다.

일각에서는 미국 연방정부 예산 책정을 앞둔 3월께 연례적으로 북한 위협론이 되풀이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북한 불안정론과 붕괴론의 효용성이 있을 것이라는 진단도 있다.

정세현 전 장관은 또한 중국이 “지정학적으로 중국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북의 동의 없이 남에 의한 일방적인 흡수통일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통일이 임박했으니 대국들이 한반도 통일문제 논의해보자는 케리 장관의 제안에 중국이 동의해 나올 리가 없다”고 해석했다.

‘앙꼬 없는 찐방’에는 진짜로 앙꼬가 없다

최근 북한 불안정론이 급속히 확산된 데는 이 같은 미국이나 중국의 여러 ‘태도’가 영향을 미친 것도 사실인 것으로 보이지만 미국이나 중국 역시 북한 불안정론의 ‘근거’를 제시하지는 않고 있다. 역시 앙꼬 없는 찐빵인 셈.

어느 당국자가 “최근 미국에 갔더니 미국 고위 관리들이 서로 만나자고 하더라”며 “장성택 사건 이후 우리와 대북 정보를 공유하고 싶어 한다”고 전한 워싱턴 분위기는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장성택 사건을 계기로 한국의 대북 정보력이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추세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기분 좋은 이야기일 수 있지만, 거꾸로 미국이나 다른 나라들도 특별한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국정원발 정보에 귀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앙꼬 없는’ 국정원발 북한 불안정론이 외국을 거쳐 다시 국내로 확산되는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국정원이든 미국이든, 또는 중국이든 북한 불안정론과 한반도 통일 준비 운운을 거론하려거든 설득력 있는 근거를 내놓아야 할 것이다. 정부란 늘 만의 하나의 경우를 위해서라도 철저히 준비해야 하는 임무가 있지만 근거 없는 북한 불안정론과 붕괴론에 취해 대북정책을 펴는 것은 국익을 위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김일성 주석 사후와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후 북한 붕괴론이 횡행했지만 결국 북한 정권은 무너지지 않았고, 우리의 대화 상대로 테이블에 마주앉아 있는 것이 현실이다. 김영삼 정부와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고,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대북 정보를 활용하는 국정원에 휘둘리지 않는 통일.외교.안보 라인 구축에 힘써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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