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Daum 영화]

노인 하면 떠오르는 것은?
온갖 쾨쾨한 이미지들이 두서없이 나열된다, 젊은이들의 입에서.
하지만 처음부터 노인이었던 사람은 없다. 또한 노인이 되고 싶지 않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가고 싶지 않은 길이지만, 누구나 한 번은 갈 수밖에 없는 그 길이 이야기의 출발점이다.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노인 문제 전문가.
살아있는 것들은 무엇이나 다 탄생과 생장, 그리고 소멸의 과정을 밟아간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이다. 섭리란 아름다운 것이어서 신비롭게 돋아나는 잎싹과 흐드러지게 만개한 꽃을 보는 것도 설레는 일이지만, 낙화 뒤에 탐스런 결실을 보는 것도 흐뭇한 일이다. 찬바람 부는 황량한 들녘을 지키는 나목(裸木)의 을씨년스런 모습이라고 해서 추할 것인가? 이육사는 시 <교목>에서 ‘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 서 있는 겨울나무의 모습에 이런 수사(修辭)를 헌정하고 있다.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 마침내 호수 속 깊이 거꾸러져/ 차마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

▲ [사진-Daum 영화]

하지만 우리가 현실 속에서 접하는 노인은 가혹한 세월을 이기고 차마 바람도 죽음도 흔들지 못할 의지의 화신으로 우뚝 선 어른의 모습이 아니다.

오랜 동안 노인들은 비록 육신은 쇠락했을지라도 형형한 정신으로 공동체를 이끌었으며, 그들의 경험은 공동체의 지혜로 축적되었다. 그들이 적은 힘이나마 보탤 일거리가 있었고, 그보다 더 많은 경우에 그들의 판단을 구하는 과제들이 있었다. 그들로 인하여 공동체의 정신적 유산이 계승되고 전통과 역사가 이어졌다. 그 시절, 육신의 노화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전설이 되어 숭앙되고 공동체의 보위를 받았으며 죽어서도 후세대의 복락(福樂)을 좌우하는 존재로 곁에 남았다.

한 세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으리라.
그러나 지금 우리 옆에 있는 ‘노인’은 지하철 경로석 앞에서 언성을 높이거나 명절날 밥상머리에서 잔소리를 해대는 ‘노인네’로 전락했다. 세상은 그들이 따라가기에는 너무 빠른 속도로 변화하여 노인들의 경험이 현실 속에서 유용하게 활용되기는커녕 젊은이들의 도움 없이는 휴대폰 문자 메시지 하나 보내는 것도 여의치 않다. 그들의 생활 양식은 이제 구닥다리가 되었으며, 젊은 세대의 문화는 노인들에게는 꼴불견이다. 그러니 노인의 충고는 꼰대 짓이 되어 버렸다. 우리는 깊은 단절 속에 살고 있다.

▲ [사진-Daum 영화]

여기 만석꾼 집 막내딸이었던 오말순 여사가 있다. 인물 곱고 동리에서 노래 잘 하기로 소문나 유랑극단 가수를 꿈꾼 철없는 아가씨였다. 세상 물정 모르고 가진 것 없는 청년에게 반해 무작정 따라나섰다. 파독 광부, 파독 간호사가 유행이던 시절 돈 벌러 비행기에 몸을 실은 남편은 객지의 고혼(孤魂)이 되었고 나어린 새댁의 뱃속에는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얌전히 대청마루에 앉아 수를 놓던 아가씨의 낭만적 사랑이 그렇게 끝이 났을 때, 그 이후의 삶이 어떠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그 유복자가 번듯하니 대학교수가 되었을 때쯤 맘씨 곱고 어여쁜 막내아가씨 오말순 대신 남은 것은 드세고 뻔뻔하고 고집 세고 이기적이며 나이 칠십이 되어서도 아들 유세를 하느라 며느리를 달달 볶는 잔소리꾼 노인네였다.

▲ [사진-Daum 영화]

그런데 며느리의 심장병이 시집살이 스트레스로 악화되자 이 집안에 초비상이 걸린다. 며느리의 절대적 안정은 생사가 걸린 문제이므로 스트레스의 주범 오말순 할머니와 한 집에 둘 수는 없는 일. 극진한 효자이자 노인 문제 전문가인 아들도 마땅한 묘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마을의 정신적 지주로 봉양 받던 노인의 지위는 근대화 과정에서 공동체가 해체되면서 혈연 단위로 그 영향력이 축소되었다. 그나마 유교적 가치관과 가부장적 질서에 의해 떠받들어졌던 집안의 어른이란 권위도 대가족 제도가 해체되고 충효를 강조하는 봉건적 가치관이 쇠퇴하면서 더 이상 예전의 위세를 유지하기 힘들게 되었다.

여전히 경제적 부양의 책임은 자식들의 의무로 남아 있지만 3대가 한 집에 사는 것이 보기 드물어진 요즈음, 노인은 집단의 일원으로 대접받기보다는 집단에 부담을 주는 부양 대상으로 전락했다. 오말순 할머니는 그래도 지금까지는 효자 아들 덕에 집안에서 큰소리 땅땅 치고 살아왔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그의 거취는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가족 회의의 의제가 되어 버린다.

▲ [사진-Daum 영화]

그런데 요양원행을 앞두고 영정 사진을 찍으러 간 오말순 할머니의 삶에 기적 같은 회춘의 마법이 일어난다. 칠십 노인이 50년의 시간을 거슬러 20대 청춘이 된 것이다. 이렇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영화는 대개 젊음을 되찾음과 아울러 시대도 과거로 회귀하므로, 그가 누릴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바꿀 선택의 기회에 국한된다. 하지만 이 영화의 판타지는 자신은 회춘을 했지만 다른 이의 시간은 현재 그대로라는 점에 있다. 스무 살 나이로 돌아간 오말순 할머니에게는 돈이 있고 새로운 기회가 있고 맘만 먹으면 누릴 수 있는 것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다.

더욱 재밌는 것은 외모만 스무 살 꽃처녀가 되었을 뿐, 말투와 행동거지, 정신 세계는 모두 오말순 할머니 그대로라는 점이다. 당황하는 것도 잠시, 세상에나, 이건 하늘이 내린 일생일대의 기회다! 과거의 수줍은 아가씨 오말순이 아니라 억척스럽고 활달한 할머니 오말순이기에 그녀는 21세기 한국판 오드리 헵번으로 빙의하여 제2의 인생을 열어나가기로 한다.

‘오두리’가 된 심은경은 오드리 헵번 못지않게 깜찍한 미모를 발산하며 걸쭉한 나문희의 복사판 연기를 펼쳐 관객을 포복절도하게 한다. 이제 갓 스무 살을 넘긴 이 풋풋한 여배우의 치명적 매력이야말로 영화를 들었다 놨다 하며 배우의 역량이 결코 대중적 인기나 돋보이는 외모에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내로라하는 스타급 배우 하나 없이, 웃기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웃을 수밖에 없는 상황과 연기의 자연스러움만으로 영화는 관객의 호응과 공감을 끌어낸다.

▲ [사진-Daum 영화]

영화는 코미디를 표방하지만, 우리는 웃다 보면 그저 웃어넘길 수 없는 진실과 만나게 된다. 노인은 어떻게 노인이 되었는가? 누군들 저런 노인이 되고 싶었겠는가? 욕쟁이 할머니 오말순의 실종과 때 아닌 인생의 봄을 맞은 오두리의 출현이 세월의 틈새로 실종돼 버린 꽃처녀 스무 살 오말순을 불러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깨닫게 된다.

우리가 떠올리는 ‘노인’에 대한 모든 불쾌한 이미지들은 육체의 노화에 따른 것이 아니라, 부모 세대가 견뎌온 세월의 험난함이 초래한 것이라는 사실을. 어린 자식의 생명줄을 붙들고자 모성의 이름으로 그악스레 살아온 시간들은 양산으로 얼굴을 가리지 않아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스무 살 오말순의 꽃다운 모습만 가져간 것이 아니라 고상한 인격과 기품 있게 늙어갈 기회조차 앗아가 버렸음을. 노화의 비밀은 상처로 얼룩진 삶이며, 거머리가 피를 빨 듯 부모의 청춘을 수혈하여 모든 자식들의 오늘이 있게 된 것임을. 자식들이여, 경의를 표하라.

▲ [사진-Daum 영화]

영화에서 아들에서 손자로 이어지는 오말순 할머니의 편벽된 사랑이나 자식을 위하여 희생한 세월을 잘난 자식 유세로 보상받으려는 태도는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전형적인 노인네의 모습이다. 영화를 보는 노인들이라면 오말순의 가족들이 할머니의 빈 자리를 느낄 때 그것 봐라 하고 고개를 주억거리겠지만, 내게는 초로의 며느리에게 여전히 퍼부어대는 진상 시어머니 오말순이 더 크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늙은 자신을 기다리는 것이 고적한 죽음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또다시 청춘을 포기하는 오말순의 결정은 뭉클하다.

오말순 할머니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 한 시어머니한테 쥐어 살던 며느리가 조금 더 용감해진다고 해서 반씨 집안의 갈등이 해소될 리 없지만, 그래도 "나는 다시 태어나도 네 어미로 살아갈란다."라는 오말순의 애틋한 자식 사랑은 가슴에 와 닿는다. 우리 역시 누군가의 부모거나 자식 아니던가.

젊은 세대가 노인을 바라보는 시선의 불경함뿐만 아니라, 노인 빈곤율이 45.1%로 OECD 평균의 3.3배에 달하며 OECD 국가 중 압도적 1위를 차지하는 나라에서, 노인 세대가 땀흘려 건설한 나라가 그들을 이용하는 방법이라곤 기껏 선거 때 지키지도 않을 공약으로 표를 사거나 시청 앞 광장에 가스통 할배로 동원하는 나라에서, 기초 연금을 비롯한 노인 복지 공약 따위 헌신짝처럼 버려지고 심지어 노인의 지하철 무임 승차 폐지까지 거론되는 나라에서 노인으로 사는 것은 모욕적이다.

500년 유교의 전통을 가진 나라에서 노인 세대는 악착같이 봉건의 잔재를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반면, 현실 속에서 그들의 위치는 이미 천덕꾸러기가 되어 있다.

영화는 이렇듯 옹색한 처지의 노인 세대에 바치는 위로와 그들에 대한 변명인 셈이다.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노인들의 노고를 기억하라고, 저런 모습으로 늙고 싶다고, 또는 저런 모습으로 늙어 가리라고 노인들이 원한 것은 아니었으니 함부로 그들의 현재를 야유하지 말라고 말이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