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은 손에 잡히지 않고 보이지 않는 이상세계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다시 말해, 가치를 담아내는 그릇인 셈이다.
조선시대 화가들은 성리학의 가치를 수묵화에 담아내었다. 중세시대의 화가들은 기독교의 가치를 그렸고,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는 르네상스의 가치를 그림이나 조각 속에 담아 표현했다.
이상적인 가치가 절대자나 신(神)과 관련이 있으면 그림에 주술적인 성격이 붙는다. 예수나 부처가 그려진 그림이나 조각품에 절을 하고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대중그림인 속화(민화)가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백성들이 원하는 이상적인 가치를 담아냈기 때문이다. 백성들이 원했던 욕망은 장수와 다산, 가족의 화목, 액막이와 부귀영화였다.
이러한 욕망은 생명활동이라는 영역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민화의 전성기였던 18~19세기는 그야말로 세계적인 변혁의 시기였다.
조선은 이미 4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늙은 나라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선비의 가치는 훼손되었고 의심을 받기 시작했다. 오랑캐라고 불렀던 왜와 청나라에게 전 국토가 쑥대밭이 되는 침략의 수모를 겪으면서 선비들의 자긍심은 무너져갔다.
조선을 전쟁으로부터 구한 것은 이순신과 같은 힘없는 무관과 의병이었다. 선비들의 예법과 자발적 청빈은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하지 못했다.
그 당시 세계의 중심지였던 청나라로부터 유입된 새로운 문명과 사상들이 조선을 휩쓸었다. 천주교의 전래와 서구 과학기술의 도입, 재부를 중시하는 상업의 발전, 역관, 의관, 상인 따위의 전문직을 가진 중인들의 약진은 백성들에게 새로운 가치와 꿈을 주었다.
정조의 개혁정치는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반영한 것이었다.
정조는 백성들의 욕망을 정치와 결합시켜 사회 전반의 개혁을 이끌어내고자 했고 민화를 탄생시킨 주역이기도 했다.
‘책가도’를 통해 선비들의 출세 욕구를 자극했다. ‘책가도’는 단순히 책만 있는 그림이 아니라 부귀와 권력, 장수와 다산, 풍류와 유유자적이 함께 어우러진 욕망의 비빔밥이었다.
학문은 단순히 개인의 수양과 정치를 넘어 원초적 욕망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신선도’를 통해 선비의 이상적 가치와 ‘불로장생’을 뜻하는 신선과의 결합을 시도한다. 신선을 그림으로 표현함으로써 손에 잡힐 것 같은 현실감을 부여한 것이다.
권력은 선비들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선비를 배제한 개혁은 불가능했다.
개혁을 하기 위해서는 선비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래서 성리학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새로운 힘을 수용하는 전통적인 ‘변주’라는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사실 ‘책가도’와 ‘신선도’는 모두 청나라에서 수용한 것이다.
원래 이 그림들은 궁중회화가 아니었다. ‘책가도’는 중국의 ‘다보각경도’에서 나왔고, ‘신선도’는 중국의 ‘요지연도’에서 변주되었다. 이러한 청나라 문화의 변주는 선비들이 쉽게 수용할 수 있는 정서적 바탕이 되었다.
‘책가도’와 ‘신선도’는 선비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한 그림이지만 실제는 돈을 가진 중인들에게 더욱 환영을 받았다.
권력의 핵심은 선비에서 중인, 백성에게로 옮겨가고 있었다.
선비들의 욕망과 결합한 그림이 ‘책가도’, ‘신선도’였다면 백성들의 욕망을 부추긴 것은 ‘십장생도’와 ‘궁중모란도’였다.
‘십장생도’, ‘궁중모란도’는 전통적인 궁중회화이다.
백성들에게 ‘생명력이 풍부한 이상세계’라는 뜻을 가진 ‘십장생도’는 ‘불로장생’으로, ‘생명의 만개(滿開)’라는 내용을 가진 ‘궁중모란도’는 ‘부귀영화’의 상징으로 녹아내린다.
화가들은 ‘십장생도’와 ‘궁중모란도’를 다양한 형태로 변주하고 이를 전문 화공들이 대량으로 창작하여 소통시켰다.
장생도에는 학문적 이상세계를 드러내는 구체적 형상은 없다.
하늘, 해, 구름, 바다, 산, 소나무, 사슴, 학, 거북(현무) 따위는 모두 자연을 대표하거나 자연 그 자체이다. 또한 ‘궁중모란도’는 세상의 모든 꽃의 총합이자 대표로 표현되어 있다.
‘십장생도’나 ‘궁중모란도’의 세계는 넓고 깊기 때문에 백성들이 ‘불로장생, 부귀영화’의 의미로 수용한다고 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불로장생, 부귀영화’도 생명의 발전을 이루는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선비들의 욕망은 학문과 청빈으로 통제되고, 백성들의 욕망은 공동체의 가치로 수렴되었다.
‘책가도’에는 숱한 욕망의 상징을 담은 사물들이 나오지만 결국은 책(학문)과 함께 있어야 완성이 된다. 신선도에 등장하는 신선들은 모두 권력과 재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풍류를 즐기며 사람들에 도움을 주는 존재들이다. 결국 신선들의 모습은 선비의 청빈하고 유유자적한 삶의 또 다른 얼굴인 것이다.
백성들은 ‘십장생도’와 ‘궁중모란도’를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의 원초적 욕망과 결합하여 수용한다. 대부분의 그림은 공동체의 관혼상제에 사용되었고 장수와 부귀영화와 같은 복(福)은 서로 주고받았다. 또한 장수와 부귀영화에 직급이나 남녀노소에 따른 차별을 두지도 않았다.
1970년대 말부터 시작된 민족문화운동은 원래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말살된 우리문화를 다시 부활시켜 민족적 자긍심을 되찾는데 목적이 있다. 그래서 판소리, 농악, 사물놀이, 탈춤, 민요, 생활한복, 민족무예, 민화, 마당굿 따위에 관심을 가지고 조직적으로 부활시킨다.
이런 민족문화는 대부분 도교와 결합되어 대중들의 삶 깊숙이 녹아있던 것이었다. 민족문화운동가들은 이런 민족문화에 내포되어 있는 도교적 내용을 민중의 잠재된 정치적 욕구로 전환하고자 했다. 대중들은 그 당시 유행처럼 불고 있었던 사회주의 사상이나 민족주의 사상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자 했다. 그 부분이 서로 만나 폭발적인 성행을 이룬다.
그림은 대중들의 원초적 욕망을 정치적 욕망으로 승화시키는데 훌륭한 도구였다.
서구의 비판적 사실주의 계열의 작품이 주류를 이루긴 했지만 한편에서는 민화, 후불탱화의 구도나 상징을 수용하여 정치투쟁에 녹여내었다.
1987년 6월 대투쟁, 노동자 대투쟁 당시에 수많은 사람들은 먹선으로 거칠게 그려진 민화풍의 걸개와 깃발, 옷과 손수건 따위를 수용한다.
대중운동에 활용된 민화는 민주화와 통일을 위한 희생과 낙관, 풍자와 해학을 담고 있었다. 협력과 공생이라는 공동체의 가치를 추구했으며 색은 절제되었고 화려한 장식이나 꾸밈은 없었다.
간결하면서도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이러한 민화풍의 도상은 민주화투쟁의 상징이 되었다.
민주화운동이 한바탕 지나간 1990년대에는 아파트와 땅과 같은 부동산 투기바람이 분다.
부동산 투기를 통해 벼락부자가 되었다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너도 나도 은행이나 친척들에게 돈을 빌려 아파트를 샀다. 새로 입주하는 아파트 입구에는 알프스가 그려진 서양화와 수묵산수화를 파는 화상들의 장마당이 열렸다. 아파트 거실에는 새로 장만한 가전제품과 더불어 수묵산수화가 걸렸다. 알프스 풍경과 수묵산수화는 사람들이 욕망하는 이상세계와 부합했기 때문이다.
2000년대가 되면 ‘주식투자’와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유행한다.
이미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자본주의는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 정착한 상태였다.
돈은 최고의 가치였고 삶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사람들은 돈을 가지고 아무런 제약도 없이 욕망을 구현하고자 했다.
민화는 이러한 사람들의 원초적 욕망과 함께 다시 부활한다.
물론 1980년대의 정치적 내용은 모두 빠져있었다.
화려하고 단순한 형상과 부귀와 장수, 출세와 허영이라는 내용을 가진 민화는 대중들의 자본주의적인 욕망과 잘 부합했다.
부자들이나 지식인은 투자가치가 있는 유명화가의 그림이나 서구 사상이 담긴 그림을 좋아했지만 이런 그림들을 소유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값이 싸고 자극적이며 쉬운 상징을 가진 민화에 열광했다.
민화는 공동체의 욕망을 구현하는 그림이 아니라 물건을 소유하듯이 개인의 욕망을 충족하는 그림이 되었다.
금융자본주의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자극하고 소비를 통한 구현이라는 방식을 통해 발전한다. 인간의 원초적 욕망은 예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방식이 달라진 것이다. 예전에는 그림을 통한 정신적 충만감에 만족했다면 현대에는 직접적 체험을 요구한다.
이러한 대중들의 욕망과 결합한 민화는 전국적으로 수 십 만 명이 넘는 민화 창작가와 애호가를 양산하며 발전한다.
100여년 만에 부활한 21세기 민화는 ‘생명력이 풍부한 이상세계’를 담은 궁중회화, 절제를 담은 수묵화와 벽을 쌓고 오로지 허영과 사치, 젊음과 장수라는 욕망에 충실하고 있다.
금융자본의 허영을 만난 민화는 철학을 벗어버리고 ‘달마도(達磨圖)’와 같은 부적이 되었다.
이것은 비단 민화만의 문제는 아니다.
젊은 화가들의 작품은 광고용 일러스트와 구분이 되지 않는다. 미술작품은 처음부터 판매를 목적으로 창작되고 철저히 대중의 욕망에 영합한다. 현대에는 좋은 작품이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잘 팔리는 그림이 대중의 선택을 받는다.
현재 민화는 위기를 맞고 있고 이미 종이접기, 십자수 따위의 공예로 전락했다.
민화는 대중그림이기 때문에 그리기가 쉽고 자극적이다. 이미 미술 조형적 가공을 거친 그림이라 창작이 불가능하고 불필요하다.
같은 소재, 같은 본그림, 같은 형상이 반복적으로 그려지면서 근친상간과 같은 역효과도 나고 있다. 새로운 내용은 고급가치인 궁중회화, 수묵화에 있는데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궁중회화와 수묵화의 형식을 수용하면 전문 화가들과 활동영역이 겹치고 ‘생명과 청빈’이라는 내용을 수용하면 금융자본주의와 충돌하기 때문이다.
결국 새로운 형식과 내용이 수혈되지 않는다면 철따라 유행하는 문화센터 취미그림, 늙은이들의 치매방지용 그림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현대 민화의 위기는 희생과 헌신, 절제라는 고급가치의 부재에 있다.
민화는 마치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갈라 황금이 되기 전의 알을 빼먹는 것과 다르지 않게 움직인다. 오로지 사람들의 이기심과 탐욕, 허영과 사치의 욕망에 부응하기만 하는 점에서 금융자본주의와 닮았다.
물론 이것은 민화 자체의 문제만은 아니다.
미술은 시대의 주류사상을 반영한다.
이 시대의 주류사상은 금융자본주의이다. 이것은 정치와 사상의 역할이다.
어쩌면 민화가 금융자본이라는 주류사상을 반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민화는 미술의 일반적인 발전 경로와 다른 길을 가고 있다.
민화발전의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의 욕망이 함축된 도교적인 그림인 민화가 또 다시 도교와 결합하는 것이다.
마치 이미 만들어진 김치찌개를 다른 그릇에 담아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민화를 궁중회화나 수묵화와 대립하는 개념으로 정의했다. 뿌리가 없어진 민화는 결국 자기 살을 뜯어먹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된 것이다.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없애버리려는 야나기 무네요시의 간교한 의도가 관철되는 것이다.

궁중회화인 장생도의 구도에 봉황과 바다, 산이라는 상징요소, 여기에 현대적인 진달래, 보리, 도라지꽃을 결합하여 새로운 우리그림을 창작했다. 이 작품들은 백두산, 한라산, 독도를 소재로 봉황이 상징하는 민족공동체의 태평성대라는 주제를 표현한다. 민족통일을 바탕으로 새롭고 풍요로운 세상을 열망하는 사람들의 이상을 잘 담아낸 수작이다. [자료사진 - 심규섭]
민화는 18~19세기라는 세계적 격동기에 조선이라는 동북아시아의 조그만 나라에서 꽃을 피운 대중그림이다.
단언컨대, 세계에서 최초로 미술이 대중화에 성공한 사례일 것이다.
대중화에 성공하려면 반드시 사람들의 가치를 높여줄 완성된 고급가치가 있어야 하는데 민화의 바탕에는 ‘풍부한 생명력의 이상세계’라는 궁중회화가 있었다.
생명력이 넘치는 이상세계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희생과 헌신, 절제라는 공동체의 가치가 동반되어야 한다.
이기적인 욕망의 구현은 전쟁과 살육, 약탈을 불러올 뿐이다. 이것은 결국 생명의 가치를 훼손하고 파멸로 이끈다.
인류문명은 언제나 진보한다. 생명은 발전하고 확장하고자 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의 발전, 문명의 발전의 방향은 어디일까? 욕망을 무제한적으로 구현하는 사치와 허영일까, 아니면 절제를 통한 공존일까.
모든모든 예술은 세상을 반영한다. 세상의 보편적 가치를 노래와 춤과 이야기와 그림 속에 담아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그림은 전쟁영웅을 미화하거나 신과 같은 절대적 존재를 숭배하거나 권력자나 부자들의 삶을 그리지 않았다.
우리그림의 아름다움은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희생과 헌신, 절제라는 공동체의 가치로 녹여 내어 생명력이 넘치는 이상세계를 추구하고 표현하는 데 있다.
(대체, 8일 08: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