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교(道敎)를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쉽지 않다.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아주 복잡하고 난해하다.
무엇보다 인간의 원초적 욕망, 본능 따위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정형화시키기가 어렵다.
도교(道敎)라는 명칭도 위장된 것이다.
도교라는 말은 노장사상에서 차용한 것이다. 하지만 노장사상과 도교는 별 관련이 없다.
도(道)를 사전적으로 풀이하면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道理). 도는 삶의 ‘길’이며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 필요한 생활방식(way of life)’이라고 정의한다.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하고, 사람답게 살기 위한 생활방식을 추구하는 것은 철학과 문화, 정치가 결합되어야 하는 고도의 문화행위이다.

하지만 도교의 핵심 목적은 ‘불로불사(不老不死), 불로장생(不老長生)’이다.
늙지 않고 죽지 않는 삶을 추구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자연의 일부분이자 생물학적으로 동물에 속하는 인간이 늙지도 죽지도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을 원한다는 말인데 생명을 유지하고 발전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원초적 욕망이자 본능의 발현이다.
어쩌면 인간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생물이 추구하는 욕망일 것이다.
인간의 원초적 욕망은 삶의 바탕이고 목적이며 사회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다. 인류의 모든 문명과 문화는 바로 인간의 원초적 욕망의 구현이라는 목적으로부터 발생하였다.
학자들은 도교의 출현을 기원전 3세기 전후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제사와 같은 형식이 문헌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원초적 욕망은 문자나 제사라는 형식이 만들어지기 이전에도 존재했다. 인간이 무리를 지어 살아가는 원시공동체부터 도교가 시작되었다고 보는 게 맞다. 도교는 인류의 탄생부터 시작되었고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도교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 즉 본능을 추구하기 때문에 옳고 그름, 선악을 따질 수 없다. 또한 억압하거나 없앨 수도 없다. 본능을 억압하면 풍선처럼 다른 곳으로 튀어나온다.
이런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추구하는 도교에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첫째, 불로불사를 추구하는 것은 반자연적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계에 속하는 생명체이고 자연 속에서 생명은 반드시 늙고 죽는다. 늙고 죽는 존재가 죽지 않음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자연과 싸워야 한다.
자연과 싸우기 위해서는 자연과 동등한 힘을 갖거나 우월해야 하는데, 개미가 인간과 동등한 힘을 갖겠다는 것처럼 허망한 일이다.
둘째, 인간의 욕망은 서로 충돌한다는 것이다.
본능은 철저하게 이기적이다. 인간의 원초적 욕망은 부부나 가족과 같은 공동체보다 우선한다. 건강하게 오래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물적 재부가 필요하다. 그러나 물적 재부는 유한하고 제한적이다. 본능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유한한 물적 재부를 놓고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이 싸워야 한다. 생존에 필요한 재부가 부족했던 옛날에는 약탈과 전쟁은 미덕이었다. 그래서 고대의 영웅은 대부분 전쟁과 관련되어 있었다.

셋째, 인간의 원초적 욕망은 무한하고 제약이 없으며 실체도 없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무한한 가치를 추구한다. 욕망은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추상적 가치이다. 그래서 이러한 무형의 욕망을 유형의 가치로 바꿔야 한다. 욕망의 값과 유형의 물질 값은 언제나 비례하지 않는다.
 

▲ 도교는 우리나라,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 인도와 같은 여러 나라에서 발전하였다. 도교는 원초적 욕망을 얻고 구현하기 위해 구체적 대상을 요구한다. 그래서 수많은 우상들이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진다. 미술이 가지고 있는 주술적 특성과 상상력을 활용하여 우상이 만들어진다. [자료사진 - 심규섭]


도교의 이런 치명적인 약점은 도리어 문명과 문화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자연과 대항하기 위해 인간을 닮은 신과 종교를 만들어 내었으며 전쟁과 약탈, 살육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공동체에 필요한 사상, 철학 따위가 발전하게 되었다.

인간의 본능에는 논리와 합리성이 없다. 그래서 도교는 끊임없이 논리와 합리성을 가진 완성된 가치와 결합을 시도한다.
조상신을 모시고 제사를 드리는 형식은 모든 인류의 공통적인 문화이다. 바로 인간의 정체성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정체성을 중요하게 여긴다. 어떠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느냐가 자신의 존재가치를 규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조상신은 대단한 존재로 과장되고 그 뿌리도 깊게 설정한다.
이런 조상을 모시는 제사와 도교가 결합한다.
옥황상제를 모시거나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의례 따위는 모두 도교와 제사의 결합이다.
또한 완성된 종교나 사상, 철학, 문화와 다양한 결합을 시도한다.
앞서 도교란 말도 노장사상에서 차용한 것이다. 기독교나 불교와 같은 완성된 가치와 결합을 통해 부족한 합리성을 채운다.
인문학을 통해 정치를 하고자 했던 유학을 유교(儒敎)로 만든 것도 도교 때문이었다.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관계를 추구했던 풍수학이 묘지를 쓰고 명당을 찾는 것으로 변질된 것도 도교의 영향이다.
원래 불교사상에는 없었던 극락과 지옥, 극락왕생, 미륵불 같은 개념이 생긴 것도 도교의 영향이며 기독교의 부활, 천당, 병 치료, 은총, 축복 따위도 도교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다.
또한 도교는 시대의 흐름이나 주류사상에 재빠르게 결합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도교는 사회주의 사상, 제국주의, 자본주의 사상과도 결합한다.
요즘 말하는 ‘먹고사니즘’이란 말도 도교의 또 다른 이름이다.
 

▲ 상상의 동물이나 상징이 투영된 사물을 그림으로 그려 원초적 욕망을 밖으로 드러낸다. 하지만 대상을 사실적으로 그리기보다는 양식화, 정형화 된 그림을 사람들이 좋아한다. [자료사진 - 심규섭]

도교는 거의 모든 사회가치와 결합한다.
굶주림은 건강하고 오래 사는 데 방해가 되기에 당연하게 ‘부귀영화’도 추구하게 된다. 또한 부부금슬, 형제우애, 다산, 액막이, 가족화합, 출세, 영생 따위의 개념들도 모두 불로불사에서 파생되었다.
어머니가 먼 길을 떠나는 자녀를 위해 정안수를 놓고 기도하는 것도 도교이다.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 것, 사주팔자나 타로와 같은 점을 보는 것, 부적, 죽은 자를 꽃상여에 태우는 일, 단전호흡, 보양음식, 성명, 음양오행론, 북어에 명주실을 감아 드리는 고사, 달마상, 성황당, 아이가 태어났을 때 액막이용으로 사용하는 금줄, 합격을 기원하기 위해 엿을 붙이는 행위, 과소비와 허영, 웰빙(wellbeing), 힐링(hilling) 따위도 모두 도교의 다양한 얼굴이다.
도교의 특징은 그야말로 ‘구복(求福)’이다. 물론 구하고 원하는 복(福)의 내용은 ‘잘 먹고 잘 사는 일’, 다른 말로 ‘불로불사’인 것이다.

도교의 ‘구복(求福)’은 희생과 헌신, 절제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다. 철저히 이기적으로 교환한다. 제사를 드리는 데 들어가는 비용, 부적이나 면죄부를 돈으로 사며, 보양음식을 사 먹고, 웰빙과 힐링을 하기 위해 돈을 쓴다.
마치 축복을 얻기 위해 제물로 바치는 ‘희생양(犧牲羊)’처럼 교환하는 것이다.
가끔은 집단적으로는 정치적 힘을 모아주기도 하고 종교적 순교도 불사하는 경우도 있다.

높은 가치, 완성된 가치는 대부분 희생과 헌신, 절제라는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기독교의 희생, 불교의 무소유, 이슬람교의 금욕, 유학의 청빈은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넘어선다. 사람들은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넘어서는 가치에 경외심과 두려움을 느낀다.
수녀나 신부, 중과 비구니에게 경외심을 느끼고 존경심을 가지는 것은 개인적인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욕망을 절제하고 희생하기 때문이다.
조선이 500년 이상 유지될 수 있었던 바탕에도 선비와 양반들의 청렴과 청빈이라는 희생과 절제가 있었다.
희생과 헌신, 절제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 모든 가치는 사기질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더라도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 주인을 본다. 손가락 주인이 희생과 헌신, 절제라는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달을 쳐다보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이 희생, 헌신, 절제를 바탕으로 하는 가치에 매달리는 것은 자신의 원초적 욕망을 구현시켜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완성된 가치 즉, 고등 종교, 사상, 철학, 문화 따위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과 결합해야만 대중성을 획득할 수 있다.
기독교는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는 명제와 더불어 가난하고 무지한 자들에게 하느님과 직접 소통하는 ‘주기도문’과 이것을 보증하는 자로 ‘예수’를 내세웠다. 이것으로 사람들은 복을 구할 높은 존재를 찾았을 수 있었고 종교가 원하는 집단의 가치와 규범을 수용했다.
수도자의 개인 해탈을 목적으로 삼는 소승불교와는 달리 대승불교는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이라는 주문만으로도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부처는 그야말로 ‘불로불사’의 존재로 사람들에게 각인되었다.
‘인내천(人乃天)’이란 고급 철학을 내용으로 하는 동학도 대중화를 위해 ‘복, 주문, 옥황상제, 병 치유’ 와 같은 도교적 내용을 활용한다.
사람들이 과학을 추종하는 것도 과학기술의 발전이 ‘불로불사’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불로불사’하는 방법은 시대에 따라 다르다. 사람들의 욕망은 낮은 단계에서부터 점차 높은 단계로 발전한다. 과거의 방식에 익숙해지면 더 나은 ‘불로불사’의 방법을 찾는다.
초창기 도교에서는 ‘불사약(不死藥)’을 만들고 ‘불사초(不死草)’를 찾아다니기도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세상에는 죽지 않는 약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재앙을 부르는 귀신을 막아준다는 부적이 효과가 있을 까닭이 없다. 귀신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복(福)이라는 개념도 너무 추상적이다. 손에 잡히는 물건이나 가치가 아니다. 제사를 지내고, 좋은 묘 자리를 쓴다고 삶에 무슨 영향을 미치겠는가. 물론 위약효과(placebo effect)와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는 있다.
결국 ‘불로불사’를 추구하던 도교는 과학이 발전하면서 대부분 미신으로 전락하고 지금은 고작 장사치들의 얄팍한 상술로 이용될 뿐이다.
대신 도교는 삶의 가치, 존재의 가치를 높이는 형태로 발전한다.
생존의 문제에서 생활의 문제로 전환된 것이다.
사회변혁이나 생산력의 폭발적인 발전이 일어나는 것은 바로 인간의 욕망이 새로운 가치를 만나 상승할 때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엄청난 힘을 쏟아내고 이런 힘은 사회 전반에 커다란 발전을 가져온다.

▲ 안보영/십장생도/디지털회화/2013.
궁중회화인 장생도는 ‘생명력이 풍부한 이상세계’라는 가치를 담고 있으며 엄격한 조형적 형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한다. [자료사진 - 심규섭]

미술을 포함한 예술은 고급 가치를 담아내는 그릇이다.
정신적 가치는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다. 예술은 실체가 없는 가치에 마치 현실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음악은 소리로, 연극은 상황으로, 문학은 이야기로, 미술은 눈으로 가상의 실체를 보여준다.
높은 가치는 예술을 통해 현실화되고 대중은 이런 가상현실을 통해 고급 가치를 생활 속에 수용한다.
인간의 원초적 욕망도 실체가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건강하게 오래 살고, 질 높은 생활을 누리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현실이 필요하다.
예술은 이러한 고급가치와 인간의 욕망을 결합시키고 현실로 만드는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훌륭한 예술작품은 고급가치의 표현을 통해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자극하여 더 높은 삶의 가치를 상상하고 추구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앞으로는 협력과 공영을 바탕으로 하는 공동체, 생명의 가치를 존중하는 사상, 다양한 삶의 방식을 인정하는 사상, 전쟁과 약탈이 아닌 평화와 공존의 철학이라는 고급가치가 사람들의 원초적 욕망과 결합할 것이다.
이런 가치를 담아내는 예술을 보편적인 예술, 공동체 예술, 민족예술, 혹은 우리그림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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