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Daum 영화]

또 북한 간첩 얘기라니 내용이 너무 식상하지 않나 싶어 관람을 망설이고 있었는데, 소리 소문 없이 개봉 27일 만에 400만 관객을 돌파했단다.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변호인>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지만 원톱 주연으로 137분을 끌고 간 저력이 있겠거니 싶어 큰 기대 없이 봤는데, 웬걸, 대박!

그러므로 일단 영화에 대한 선입견부터 털고 가야겠다. 영화는 북한 간첩 이야기가 아니다.

기존 반공 영화의 틀을 벗어난 북한 간첩은 1999년, <쉬리>처럼 인간적 감정을 억누르고 간첩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정통파 간첩과, 북한의 식량난 해소를 위해 슈퍼 돼지 유전자를 훔쳐가려다 눈 뜨고 코 베어가는 남한 사회의 실상에 몹시 당황해 버린 어리숙한 간첩 <간첩 리철진>의 양 극단 사이를 오가며 우리 영화 속으로 들어왔다. 위장 귀순해 이중 간첩으로 살다 비극적 최후를 맞는 <이중 간첩>(2003년), 얼짱 알바생이 알고 보니 간첩이더라는 스토리의 황당한 미녀 간첩 <그녀를 모르면 간첩>(2004년)이 모두 이 부류에 속한다.

이때가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이니, 때론 분단의 비극성이 비장하게 드러나고 때론 남북 관계의 화해 무드가 순진하거나 예뻐서 친근한 간첩으로 다가오며 남북 관계가 새 전기를 맞는 상황이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간첩은 아니지만 어쩌다 남쪽으로 흘러와 고군분투 귀환 작전을 벌이게 된 북한 장교와 병사의 모습을 그린 <동해물과 백두산이>(2003년)도 이 부근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다.

▲ [사진-Daum 영화]
▲ [사진-Daum 영화]

2010년 <의형제>에서부터 북한 공작원의 모습은 조금씩 달라져 간다. 그들은 북한 정권의 비정함과는 어울리지 않는 인간적 면모를 지녔고, 당연히 북한 정권을 등지게 되는 상황에 처할 수밖에 있다. <의형제>의 인간미 넘치는 순수 청년 간첩 강동원, <간첩>(2012년)에서 남한의 소시민으로 정착한 간첩 김명민, 염정아, 변희봉, 정겨운, <베를린>(2013년)의 충직한 베테랑 요원 하정우, <은밀하게 위대하게>(2013)의 바보 같은 임무도 위대하게 수행하는 꽃미남 간첩 군단 김수현, 박기웅, 이현우는 모두 피도 눈물도 없는 북쪽 정권에 의해 버림받거나 위험에 빠지거나 희생당하게 되는 피해자의 처지에 놓임으로써 연민과 안타까움의 대상이 된다.

심지어 <동창생>(2013년)은 남파공작원이었던 아버지의 누명을 벗고자 공작원의 운명을 걸머지게 된 열아홉 소년 간첩 최승현을 등장시켜 동생을 볼모로 잡힌 채 말도 안 되는 작전에 투입되는 상황을 설정하여 관객들의 심금을 울리려 든다.

이런 흐름에는 이명박 정부 이후 남북 관계가 경색되면서 확산된 반북 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다. 나쁜 체제와 인간적인 공작원의 대립이라는 구도는 남한 사회 체제에 이념적 정당성을 부여해 주면서 주인공 북한 공작원에 대한 관객의 감정이입의 여지를 확대시켜 준다. 이것은 직접적으로 이념을 내세우지 않지만 그 의식상 명백히 냉전 시대 반공 영화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점에서 교묘하고도 퇴행적이다. 또한 이런 류의 간첩 판타지가 새로운 흥행 코드로 정착하고 있는 것은 ‘간첩’이란 소재도 이제 상업적으로 소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간첩들의 활동 범위도 넓어졌다. 바야흐로 국제화 시대, 미국에 의해 ‘악의 축’으로 지목된 북한의 공작원들은 과연 악의 축답게 세계를 무대로 암약하는 테러리스트적 면모를 보여준다. <의형제>에서 북한 공작원이라기보다 프리랜서 테러리스트에 가깝던 ‘그림자’란 인물은 <베를린>에서는 북한 대사관 소속 표종성이 되어 주인공 자리를 꿰찼고, <용의자>의 지동철 역시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북한의 최정예 요원이었다.

그리고 이들 간첩들이 이념이라는 거대 담론을 버린 자리에 대신 들어선 것은 ‘가족애’이다. 가족에 대한 원초적 감정은 보편적 공감대를 형성하기 쉬운 데다,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붕괴된 국내 경제로부터 파생된 가족 파탄에 대한 위기 의식이 우리 사회를 지배해 왔다. 가족애를 동력으로 움직이는 간첩들의 모습은 이의 반영이다. 이것이 현재 간첩이란 소재가 남한 사회에서 소비되는 방식이다.

▲ [사진-Daum 영화]

<용의자>의 주인공 지동철은 엄청난 무력의 소유자로서 잘 훈련된 북한 특수부대 공작원 출신. 그리고 북한으로부터 버림받았다. 가족을 잃었다. 이 삼 박자를 고루 갖췄다는 점에서 위 간첩 영화들의 맥을 잇고 있지만, 영화에서 그의 처지는 이미 모든 법적 절차를 마치고 남한 사회에 정착한 탈북자이다. 이 영화는 엄밀하게 말하면 탈북자 이야기이다.

기존 탈북자 영화들은 대개 탈북 동기나 과정을 중심으로 북한 인권 문제의 범주에서 접근하거나, 탈북자의 입장에서 남한 사회 정착의 어려움 정도를 조명해 왔다. 하지만 탈북자 문제는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복잡한 이면을 갖고 있다.

탈북의 원인에는 정치적 이유도 있지만 애초에 경제적 동기가 컸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도적 지원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는데도 그간 우리 정부의 대응은 북한 체제의 취약성을 비난하거나 탈북을 막는 북한의 대응을 반인권적인 것으로 몰아부치는 데만 치중해 왔다.

심지어 탈북자 지원을 표방하면서 실제로는 ‘탈북’을 지원하며 탈북자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드는 경우도 있어 ‘기획 탈북’이란 말도 떠도니, 탈북자 문제의 실상은 팩트조차 정확하지 않다. 어쨌든 탈북자의 존재는 남한에는 효과적인 북한 체제 비판의 선전 수단이 되며, 역으로 북쪽으로서는 감추고 싶은 치부가 될 수밖에 없다.

▲ [사진-Daum 영화]

이들 탈북자의 남한 사회 정착은 또 다른 문제이다. 처음에 탈북을 반기던 남한 사회에서 늘어가는 탈북자의 존재는 어느덧 짐스러워졌다. 이제는 별로 신기하지도 않다. 그리고 이들을 보는 남한 사회의 시선은 이중적이다. 이들은 연민의 대상이자 남한 사람들의 북한 사회에 대한 무시와 경멸이 그대로 투영되는 대상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이 트로이의 목마일지도 모른다는 경계의 눈초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질적 존재들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반북 의식이 강해질수록 이들 탈북자는 남한 정부에 요긴해지고 탈북 지원은 늘지만, 도리어 남한 사람들에게 탈북자는 달갑지 않고 정착 지원금을 퍼주는 것은 아까워진다.

그 지점에 서 있는 것이 영화의 지동철이다. 지동철을 아끼는 박 회장은 남한 사회에서 탈북자가 자력으로 정착하기가 쉬운 줄 아냐고 말한다. 지동철은 대리 기사로 극빈의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또 다른 탈북자 리광조는 먹고 살기 위해 국정원 사조직 ‘북진회’의 일원이 되어 권력의 하수인 노릇을 하고 같은 처지의 탈북자를 죽이는 일에 동원된다.

탈북자를 관리하고 이용하는 국정원, 탈북자끼리 견제하게 만드는 교활한 관리 방식, 탈북자라는 약점 때문에 언제든지 이 사회의 배신자로 몰릴 수 있는 탈북자의 상황 등은 최근의 탈북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지동철을 둘러싼 상황과 지동철의 처지는 탈북자의 현주소를 냉정하게 반영하고 있으며, 또한 남한 사회 내부에서 탈북자가 다뤄지는 방식을 최초로 드러내고 있다. 영화의 초점이 탈북자 문제는 아니지만, 영화의 배경은 정치적으로 올바르다.

▲ [사진-Daum 영화]

지동철은 정치적 동기의 탈북자이다. 따라서 최초의 갈등 구조는 북한 체제와 형성된다. 하지만 지동철을 쫓는 것은 남한의 정보 기관이며, 그는 조작된 살인 용의자의 혐의를 쓰고 137분 내내 추격자들과 맞서야 한다. 그의 복수극은 추격자들로 인해 지연되고, 그 과정에서 그는 가족 살해의 또 다른 진실과 맞닥뜨린다.

이전의 간첩 영화에서 주인공을 압박하는 상황은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전설적인 북한 특수부대, 추정되는 북한 내부 권력 투쟁, 가상의 테러 명령 등 순전히 추측과 상상에다 냉전 시대 사례를 참조해서 만들어낸 것들이었다. 있을 법한 일이지만 디테일을 확보하지 못한 상상력은 갈등 상대를 필요 이상으로 잔악하고 격앙되어 있으며 비인간적인 존재로 그려낸다. 한 마디로 전부 사이코패스 수준인데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 것이다.

영화에서 사건의 중심에 있는 것은 국정원이다. 국정원의 전횡은 이미 대선 개입 사건에서도 확인되었다. 국정원 활동을 북한과 해외로 국한시켜 본연의 정보 수집 임무에 충실하게 해야 하며, 국내 정보 수집을 금지하고 대공 수사권을 이관함으로써 정치 사찰이나 국내 정치 개입을 제도적으로 차단해야 한다는 국정원 개혁 요구는 현재 진행형이다.

권력형 비리와 부정부패 역시 숱하게 익숙한 사례들을 가지고 있다. 영화에는 남북의 부정한 권력끼리 서로 통하는 내용도 나온다. 이는 1997년의 일명 ‘총풍 사건(銃風事件)’을 떠올리게 한다. 대통령 선거 직전 한나라당 후보의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 청와대 행정관 등 3명이 베이징에서 북한과 접촉하고 휴전선 무력 시위를 요청한 사건이다.

영화의 갈등 구조는 정확하게 이러한 현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 영화가 액션에 집중하면서도 이야기의 얼개가 정교하고 긴장감 넘치며 설득력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영화는 북한 체제의 비인간성이라는 기존 간첩 영화의 맥을 이으면서도 간첩 출신 탈북자와 남한의 부패한 권력의 대결이라는 남한 내부 문제로 접근하여 훨씬 강한 현실적 울림을 준다.

<도가니>에서 꽤 괜찮은 배우라고 생각했던 공유는 이제 멋진 배우라는 수사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다. 좋은 체격 조건에 정색하면 좀 불량해 보이지만 웃을 땐 아주 달달한 미소를 보이며 선하고 부드러운 눈빛을 지닌 이 배우는 완전히 스크린을 장악한다. <의형제>나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간첩들이 깔끔하고 합이 잘 맞아떨어지는 액션을 보여줬다면, <베를린>의 간첩은 맨몸으로 부딪치고 구르는 쾌감을 선사했다. <용의자>는 상황을 <베를린>보다 좁은 공간으로 밀어넣고 빠르게 격돌시켜 보는 이의 숨이 멎게 한다.

근접 촬영으로 더 강렬하고 현란하게 피와 땀이 전해지는 격투 장면은 가히 액션 영화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을 들을 만하다. 좁은 골목길 근거리에서 벌어지는 자동차 추격 장면, 지동철이 죽음 직전에 탈출하기 위해 밧줄을 푸는 장면은 눈을 떼기 어려운 명장면들이다.

▲ [사진-Daum 영화]

영화의 재미, 가장 큰 매력은 이 비교 불가능한 액션에 있다. 그러나 그 액션을 감싸고 있는 드라마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는 복수극, 그런데 다른 복수극과 다르다. 누명 쓴 주인공은 굳이 누명을 벗으려고 노력하지 않으며, 복수를 꿈꾸지만 그것이 최종 목표가 아니다. 모든 것을 잃은 이 남자는 죽기를 원한다.

가족을 잃은 자의 복수는 우리에게 익숙하다. 그것은 분노이다. 그러나 상대를 죽이고 자신도 죽으려고 하는 자의 마음에 응결된 고통과 슬픔은 그 무게를 가늠하기 어렵다. 그는 누명을 벗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신의 복수가 완결될 때까지 추격의 손길을 늦추려고 하는 것뿐이다.

공유는 영화에서 단 한 번 웃고, 두 번 눈물을 흘리고, 나머지는 감정을 눌러 담은 듯한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자신의 생에서 최후의 보루였을 아내와 아이를 잃은 가장의 허망함과 상실감을 표현해 낸다. 영화의 말미에서 “제발, 말하라우!” 짧고 낮게 반복하는 지동철의 간청은 영화가 끝나고도 묵직한 슬픔을 남긴다.

▲ [사진-Daum 영화]

그리고 이 감정에 감응해 가는 것이 전날 지동철과 악연을 지닌 민세훈 대령. 간첩 잡는 사냥개로 이름을 날렸으되 오로지 부정과 타협하지 않고 사건 수사에 충실하다가 간첩 혐의를 뒤집어쓸 뻔한 위기 상황에까지 몰린다, 영화의 표현대로 ‘생각하는 군인은 오래 못 가는’ 현실에서는 원칙과 상식을 지키는 일조차 위험하지만, 그는 끊임없이 ‘생각’하며 군인다운 군인으로 자신을 정립한다.

“그러고도 네가 기자냐”를 외치며 진실을 추적하는 해직 기자 최경희나 권력의 앵무새 되기를 거부하고 기자 정신을 회복하는 주 기자를 비롯하여 영화 속 인물들은 지동철의 표현대로 ‘자신의 할 일을 하는’ 것으로써 제 자리를 찾아간다. 각자 자신의 할 일을 했을 때 정의가 바로세워지고 지동철이 지켜낸 박 회장의 비원(悲願)은 남북 화해로 귀결되며 이 거대한 음모와 불의는 파탄을 맞게 된다.

<변호인>을 보고 울분에 찼던 관객들이라면 이 영화에서 공유의 고독한 질주를 관망하며 희망의 좌표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지 추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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