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Daum 영화]

아델은 집과 학교를 오가며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소녀, 남친이 생겼지만 그와의 만남은 껍데기에 불과한 것 같다. 그런 그녀에게 운명처럼 스쳐 지난 파란 머리, 자기도 모르게 서로 뒤돌아보던 두 사람은 우연히 바에서 다시 조우하게 되고, 빛의 속도로 서로에게 빠져든다. 이렇게 사랑은 예기치 않게 찾아오고 또 예기치 않게 떠나간다, 모든 사랑이 그러하듯이. 영화는 한 소녀가 겪은 운명적 사랑, 그 격렬한 몇 년 간에 대한 섬세한 보고서이다.

아델과 아델의 첫 남친이 헤어지는 이유는 뭘까? 서로 취향도 적성도 다르지만, 상대를 존중하고 이해하기 위해, 맞춰 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델은 그와의 만남이 공허하기만 하고, 언뜻 스친 파란 머리의 잔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혼란스럽다.

사랑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의 소산이다. 그걸 몰랐을 때 아델은 자기에게 호의를 품은 남친을 만나 데이트 하고 가벼운 스킨십부터 진한 섹스에 이르기까지 여느 연인들처럼 일련의 과정을 밟아 갔다. 하지만 이미 마음 한켠을 점령한 다른 이에 대한 감정, 멈출 수 없는 감정의 질주는 암세포보다 무섭게 증식하여 그녀를 집어삼킨다. 그녀는 망설일 새도 없이 위험한 사랑에 뛰어들고 만다.

▲ [사진-Daum 영화]

아델은 이제 겨우 고교 2학년. 상대는 순수미술을 전공하는 대학 4학년생. 성숙한 사랑의 감정을 싹틔우기에 둘의 정신적 격차가 너무 크지 않을까 싶은데, 둘은 눈빛만으로도 이미 서로의 마음을 읽고 서로의 육체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을 느낀다. 이건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경험이지만, 누군가에게 사랑은 이성으로 이해하고 말로 확인되기 이전의 원초적 감정으로, 온몸이 달아오르는 열정으로 찾아올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델은 문학을 사랑하며 단순하고 열정적인 성격에 현재에 충실한 인물, 그러나 상대는 이지적이고 자의식 강하며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현실보다 자신의 이상을 사랑하는 인물. 두 사람은 빨강과 파랑만큼 서로 다른 색깔을 지녔지만 그 어떤 것도 둘의 사랑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 성적(性的)인 사랑이 다른 모든 종류의 사랑과 다른 점은, 따라서 성적인 사랑의 본질은 바로 이 서로의 육체를 향한 불같은 갈망이 아니겠는가.

손을 잡고 입술을 탐하고 상대의 호흡을 느끼고 싶은 욕망은 성적인 사랑에 있어 그 시작이자 완성이라 할 수 있다. 영화는 두 사람의 격렬한 사랑의 행위를 오랜 시간, 공들여, 다양한 각도로, 세밀하게,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사랑의 균열은 의외로 쉽게 찾아온다. 동거를 통해 모든 순간을 함께하게 된 연인들은 처음에 완벽한 행복을 느끼지만, 차츰 함께 있어도 공유할 수 없는 것들이 있음을 지각하게 되고, 미묘한 어긋남은 어느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오해와 불신으로 귀착된다. 주체할 수 없던 격정은 이제 정확하게 주체할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의 총량으로 맞바꿔진다. 모든 것이 끝났다.

▲ [사진-Daum 영화]

영화는 장장 179분에 걸쳐 사랑과 이별에 대해 탐구하고 있다. 알 수 없는 이끌림, 흔히 ‘첫눈에 반한다’라고 하는 설명 불가능한 사건으로 시작되는 사랑, 그리고 차가운 파란색조차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색이 되는 사랑의 신비롭고 불가해한 과정이 영화의 2/3를 차지한다. 영화의 나머지 1/3은 이별 후의 뒤늦은 후회와 견딜 수 없는 상실감, 그러나 끝내 사랑이 끝났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과정이 가슴 저리게 그려진다.

사랑을 잃은 현재는 쓰라리고 고통스럽겠지만, 그것 또한 사랑의 운명인 것을. 어쩔 것인가, 누군가는 완벽하지 않더라도 새로운 사랑과 타협해야 하고, 또 누군가는 두 번 다시 찾아올 것 같지 않은 사랑을 잃은 외로움에 조금 더 오래 머물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영화는 사랑의 육체적 탐미성에 천착하면서도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라고 본다. 즉 사랑은 섹스 파트너를 구하는 일이 아니다. 사랑은 운명처럼 시작되지만 그 사랑의 영속성을 보장해 주는 것은 한때의 감정 그 이상의 깊은 이해, 내면에서 우러나는 공감, 의지와 노력 같은 것들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들은 생전 읽지 않던 두꺼운 책을 읽기도 하고 먹지 않던 어패류도 참고 먹으며 상대의 낯선 세계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노력만으로 다 넘어설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아델은 자신의 노동으로 생활을 영위하는 건실한 노동 계층의 자식. 그나 그의 부모나 삶의 만족은 안정된 직업과 경제적 독립을 기반으로 얻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연인을 위하여 요리하고 그의 친구들을 초대하여 대접하는 수고로움도 기꺼이 즐거움으로 받아들이며 사랑에 헌신하지만, 한편으론 사회적 시선을 의식하며 동거 사실을 숨기는 현실적 선택도 마다않는다.

아델의 연인 파란 머리는 개방적이고 교양 있는 집안에서 성장한 엘리트. 그도 그의 부모도 대학을 포기하고 유치원 교사에 만족하는 아델을 이해하기 어렵고, 전공을 수입과 직결시키지도 않는다. 그에겐 가치관을 공유하는 동료들이 있고, 어떤 순간에도 현실과 타협하여 자신의 신념이나 삶의 방식을 양보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아델이 시위에 동참하며 몸으로 느끼는 것들을 파란 머리는 철학책과 친구들과의 토론을 통해 이해한다. 아델 가족이 즐기는 배부르고 흥겨운 파스타 식사와 파란 머리의 가족이 레몬 뿌린 신선한 굴을 음미하는 장면은 두 집안의 문화적 차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두 사람의 계층적 차이는 처음엔 희미한 배경색 같은 것이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두 사람을 규정하는 밑그림으로 작용한다.

아델이 좀더 현명했다면 사랑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야 했다. 상대를 완벽하게 이해하여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관계는 흔치 않다. 그러므로 상대가 다른 문제에 골몰해 있을 때,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여유와, 온전히 사랑에 목매지 않고 혼자 있는 시간을 채울 수 있는 자신만의 독립적 세계를 남겨 두어야 했다.

하지만 아델에게 교양 있는 파란 머리의 친구들은 불편하고, 자기 고민에 골몰해 있는 파란 머리를 기다리는 시간은 외로웠다. 그러니 아델의 외도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두 사람의 관계가 지속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 [사진-Daum 영화]

영화가 내용은 사랑학 개론인데 생각보다 노출 수위가 높아 처음에 사뭇 당황. 고등학생들이 아무런 제재 없이 바에 드나들고 음주, 흡연, 섹스가 자연스러운 일상인 것은 문화적 충격. 내가 너무 보수적인가? 고등학생 아델의 일상을 구성하는 학교 수업 장면과 시위 참여 장면 등에서 엿보이는 프랑스의 지적, 사회적 풍토는 부럽다.

이제 마지막으로 좀더 특별한 사실 하나를 보태야 할 것 같다. 아델의 사랑은 주변 어디서나 목격할 수 있는, 우리 자신도 경험해 봤을 법한 그런 것이지만,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 아델의 연인, 아델을 한눈에 매료시킨 파란 머리는 엠마, 여성이다. 영화는 동성애를 소재로 하고 있다.

▲ [사진-Daum 영화]

영화를 보면 톨레랑스의 나라 프랑스라고 해서 동성애에도 관대한 것은 아닌 듯하다. 사회적 매장을 각오해야 커밍아웃 할 수 있는 분위기까지야 아니지만, 우연히 친구 따라 게이바에 간 아델에게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 그리고 동성애자라는 오해가 불쾌하게 받아들여지는 상황은 프랑스에서도 동성애는 사회적 소수자의 위치를 면치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화는 프랑스의 동성 결혼 합법화 법안이 가결된 직후에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함으로써 동성 결혼 합법화를 둘러싼 논란 와중에 합법화 찬성 쪽에 힘을 실어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문화 예술 활동의 창조적 힘은 이렇듯 인식의 새 지평을 열어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실체 불명의 창조 산업이 아니고 말이다.

영화에서 매력적인 두 배우의 정사 장면은 아름답고 격렬하다. 아델도 자신이 이런 사랑에 빠지게 될 줄 몰랐다. 이성이든 동성이든 모든 사랑은 운명적 인연의 끈을 타고 오며, 사랑하면 섹스하고 결혼하고 싶은 것은 자연스런 욕구이다. 그리고 그 격정(激情)만큼이나 많은 변수로 둘러싸인 사랑의 종말도 수학적 공식처럼 예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엠마는 결국 몸으로 기억하는 사랑보다 뜻을 같이하는 사랑에 안주하는 걸 택하고, 레즈비언이라는 정체성에 얽매이지 않는 아델의 사랑이 어디로 향할지는 아델 자신도 모른다. 그렇다한들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은 그 푸른 기억은 남을 것이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모든 사랑이 그렇다. 영화는 보편적이지 않은 사랑은 없다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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