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은 말띠 해이다.
말띠 해를 맞아 말이 가진 상징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을 한다.
들판을 달리는 말의 생태적 특징 때문에 활달하고 진취적인 한 해가 될 것으로 예견하는 사람도 있고 또한 말띠 해에 태어난 사람은 그러한 성격을 가졌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다.

우리그림에도 말을 그린 작품이 있다.
대중그림인 민화에서는 찾기 어렵지만 궁중회화에는 말을 소재로 한 작품이 존재한다.
이른바 여덟 마리의 멋진 말을 그린 ‘팔준도(八駿圖)’가 그것이다.
‘팔준도’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업적을 칭송하기 위한 그림이다.
조선을 건국하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여덟 마리 말의 이름은 ‘횡운골’, ‘유린청’, ‘추풍오’, ‘발뢰자’, ‘용등자’, ‘응상백’, ‘사자황’, ‘현표’이다. 이 말들에는 이성계가 직접 타고 왜적을 무찌르거나 위화도에서 회군(回軍)을 했다는 따위의 사연이 따라 다닌다.
그러니까 단순히 멋진 말을 그린 그림을 넘어 태조의 또 다른 초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하더라도 그림 속의 말의 모습은 밋밋하다. 각각의 말들은 태조 이성계의 무공과 관련이 있는데 각 상황에 맞춰 용맹하고 활달하게 표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림 속의 말은 전투와는 전혀 무관하게 그저 풀이나 뜯고 모래 목욕이나 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렇게 표현한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 팔준도는 세종 때 용비어천가와 함께 그려진 화첩그림을 숙종 때 모사한 것으로 추정한다. 각 그림의 크기는 대략 42*35cm 정도이다. 각각의 그림에는 말의 이름과 칭송하는 글귀가 붙어있다. 위 그림은 팔준도에 나오는 여덟 마리의 말 중에서 다섯 마리인데 땅 바닥을 뒹구는 말은 모래 목욕을 하는 것이다. [자료사진 - 심규섭]

‘무릉도원도’를 그린 안견이 세종의 명령을 받아 1446년과 1447년에 ‘팔준도’를 그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 그림은 현재 전해지지 않지만 숙종의 명령에 의해 그려진 팔준도가 남아있다. 화가의 서명이 없고 뛰어난 필력으로 보아 도화서의 궁중화원이 그렸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숙종 때 그린 ‘팔준도’가 공제 윤두서(1668~1715)의 작품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윤두서는 흔히 자화상으로 유명한데 말도 상당히 잘 그렸으며 남아있는 작품도 있다.
주로 도화서 화원들에 의해 그려졌던 궁중회화인 ‘팔준도’는 조선 말기가 되면서 장승업, 안중식과 같은 화가들에 의해 민간으로 확산되면서 대중화된다.

‘팔준도’하면 지식께나 있는 사람들은 주나라 목왕이 서왕모를 만나러 갈 때 마차를 끈 여덟 마리의 말을 떠올린다.
조선시대의 ‘팔준도’가 주나라 목왕의 ‘팔준도’와 소재나 숫자에서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조선의 ‘팔준도’는 그야말로 개국을 칭송한 것으로 한정된다. 서왕모 신화나 주나라 목왕과는 전혀 관련이 없고 말의 이름도 다르다.

▲ 윤두서의 말 그림이다. 위의 흰말은 암말이라고 전문가들이 말한다. 배가 나오고 골반이 큰 것이 전형적인 암말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버드나무 아래 편안하게 서 있거나 노니는 모습을 그렸다. [자료사진 - 심규섭]

우리나라의 말 그림은 오래된 전통을 가지고 있다.
대표적인 그림은 바로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오는 수렵도이다. 또한 신라 천마총에서 발견된 말 안장 장식그림인 ‘천마도’도 있다.
모두 유목민족의 특성을 가진 그림이다.
고구려는 만주벌판을 호령하던 기마민족이었고, 신라도 나뭇가지 모양의 왕관을 쓴 초기에는 기마민족의 전통이 있었다.
말은 전투를 하거나 먼 곳으로 이동하고 무거운 짐을 나르는 주요한 수단이었다.
소가 농경민족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면 말은 유목민족의 핵심이다. 낙타를 이용하는 유목민족에게는 낙타그림이 있고, 순록을 이동수단으로 삼은 유목민족에게는 순록그림이 있다. 생존과 생활에 핵심이 되는 요소는 모두 신격화된다.

조선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발전한 나라이다.
알다시피 한반도는 7할의 산과 3할의 평지로 이루어져있다. 또한 생계도 대부분 농사를 통해 해결한 농경민족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유목민족의 상징인 말은 군사나 행정과 같은 공무를 제외하곤 별 필요가 없었다.
특히 한반도는 산과 골짜기가 많은 수비형 지형이다. 말을 탄 기마병은 공격하는데 유리하지만 수비에는 적합하지 않다. 한반도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기마병보다는 성을 쌓는 게 유리하다.
흔히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속담이 있지만 말이 자라는 최적의 환경을 제주도가 가지고 있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사람을 서울로 보내야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방편으로 말과 제주도를 사용한 것이다. 이를테면, 서울과 제주도, 사람과 말을 대비시켜 서울에 비해 제주도가 형편없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사람에 비해 말이 형편없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말은 전투용이나 행정용으로 국한되어 사용되었다. 가까운 거리를 이동할 때는 대부분 걸어서 다녔고 고관대작들은 사람이 매는 가마를 사용했다.
암행어사로 이름을 날린 박문수가 가진 마패(馬牌)는 그야말로 말을 사용할 수 있는 문서와 같은 기능을 했다. 먼 곳을 이동해야 하는 관리는 말이 필요했고 역참(驛站)은 말을 보유하면서 필요한 관리에게 대여했다.
조선은 그야말로 학문하는 선비를 중심으로 한 ‘문민사회’였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무관(武官)이 비변사를 통해 정치에 참여한 경우도 있었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왕이나 세자가 말을 타고 사냥을 하는 것은 ‘폭군’의 상징으로 그려졌다. 뛰어난 임금은 언제나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팔준도’에 나오는 말은 벌판을 달리거나 용맹을 과시하는 모습이 아니다. 오히려 조용하게 노닐면서 위엄을 드러내고 있다. 달리는 말과 서있는 말의 모습에서 드러나는 상징에는 큰 차이가 있다.

조선시대에 말이 독립적으로 그려진 경우는 ‘팔준도’ 밖에는 없다.
조선 후기에는 청나라의 영향으로 말을 타고 사냥하는 모습이 그려진 ‘호렵도(胡獵圖)’가 유행한다. 호인(胡人), 즉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이 등장하는 ‘호렵도’는 동물을 사냥하는 모습을 그린 ‘수렵도(狩獵圖)’와 내용이 같지만 구분하기 위해 만들어진 용어이다.
명나라가 청나라에 의해 망한 직후에는 청나라에 대한 반감이 컸지만 18세기에 들어오면서 이런 생각은 점차 누그러지고 청나라를 인정하게 된다. 기마민족인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는 말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고 말에 관한 수많은 그림이 그려졌다. 이런 청나라의 말 그림이 중국 사신이나 역관들에 의해 수입되었다. 18~19세기의 조선에서는 중국 물건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고 사서 모았다고 한다. 중국에서 유입된 모든 사상이나 물건들은 선진적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중국 그림을 흉내 내어 8폭에서 10폭으로 그린 ‘호렵도’는 주로 무관(武官)의 사랑방을 장식했을 것이다. 또한 사나운 맹수를 사냥하는 용맹한 모습이 담긴 그림이기에 민간에서는 액막이 그림으로 수용되기도 했다.

▲ 현대적인 팔준도이다. 수묵이든 유채든 여덟 마리의 말을 그린 것이 특징이다. 서양문화의 영향으로 말들이 거칠게 달리고 있다. [자료사진 - 심규섭]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말 그림은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가만히 서 있던 말이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바로 서양문화의 수입과 연관이 있다. 유럽은 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유목민족의 나라들이 모여 있다.
서양에서 말은 이동의 수단이자 생존의 수단, 혹은 문명의 수단이다.
그리스로마 신화에도 ‘뿔 달린 말인 유니콘’, ‘날개 달린 말’, ‘상반신은 인간, 하반신은 말인 신’ 따위가 등장한다. 말이 끄는 수레가 마차이고 마차는 기차나 자동차의 원형이 되었다. 지금도 자동차의 성능을 ‘마력(馬力)’으로 표시하고 있다.
또한 미국의 서부개척사에 있어 말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고 ‘카우보이’와 말을 탄 총잡이의 모습은 서부영화의 상징이다.
수묵화로 그렸든 유화로 그렸든 간에 말이 무리 지어 힘차게 달리고 있는 그림이 유행한다.
벽사의 내용을 넘어 넓은 세상을 지배하고자 하는 진취적이고 공격적인 상징으로 변화한 것이다.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대륙과 해양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한다.
이 때문에 해양진출을 원하는 대륙세력에게 공격을 당하고 해양세력이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한 침략을 당한다. 이것을 조금 다르게 해석하면 대륙문화와 해양문화를 모두 수용하고 공존하는 공간이 된다. 현재 우리나라는 대표적인 해양문화 음식인 젓갈과 대륙문화 음식인 김치를 동시에 먹고 있다. 심지어는 김치에 젓갈을 넣어 만들어 먹고 있다.
조선은 군인의 나라가 아니라 문인의 나라였다. 그렇다고 군사력이 약하지도 않았다. 조선은 강력한 대포와 최종병기 활과 진법을 이용한 창을 체계적으로 활용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조선과 전쟁을 치른 청나라는 세계 최강이었고, 서양 무기와 칼과 전투에 목숨을 건 사무라이가 주축이 된 왜국도 명나라를 정복하겠다고 호기를 부릴 만큼 강했다. 이런 나라들과 전쟁을 치르면서도 조선은 500년 이상 종묘사직을 유지했다.

말 그림은 대륙과 유목문화의 상징이지만 ‘팔준도’의 말은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이지 않는 말이 무슨 소용이 있냐고 하겠지만 말이 달리는 순간 전쟁과 약탈이 시작된다는 사실도 직시해야 한다.
‘평화는 총구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다.
침략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말이 상징하는 강력한 군사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강력한 무력은 침략이 아니라 평화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움직이지 않는 말의 모습을 그린 ‘팔준도’에서 우리가 곱씹어야 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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