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가 관직을 얻어 세상에 나아가 학문적 이상을 펼치는 일을 ‘출세’라고 한다.
하지만 출세는 필연적으로 권력과 재물이 움직여 허영과 시치, 거드름 따위를 만들어내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선비의 ‘자발적 청빈’과 충돌한다.
그래서 선비의 당연한 욕망인 출세를 겉으로 드러내고 말하지 못했다.  
선비들은 출세에 대한 욕구를 그림에 담아내되 문자의 유희를 통해 숨기고자 했다.
출세그림은 학문을 할 줄 아는 선비들 외에는 전혀 그 뜻을 알 수 없다. 밖으로는 그냥 꽃과 게가 있는 유유자적한 그림으로 보인다.
선비들의 출세그림은 염치가 있는 수준 높은 그림이다.
어떠한 가치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희생과 헌신이 있어야 하는데, 이 출세그림은 선비의 욕망을 숨기고 부끄러워함으로써 희생을 한 셈이다.  

▲ 김홍도/게와 연꽃.
수묵화로 빠른 시간 안에 즉흥적으로 그렸다. 그림의 크기는 10호 정도이다. 연꽃을 먼저 그리고 그 다음은 게, 갈대 순으로 그렸다. 갈대가 연꽃의 줄기의 앞으로 겹쳐져 있다. 이런 순서의 추론은 게의 어두운 발 부분을 남겨놓고 연 줄기를 그리는 것은 불필요하게 어렵기 때문이다. 연꽃으로 큰 구도를 잡은 다음 연 줄기 사이로 짙은 먹으로 게를 그리고 그 다음 엷은 붓질로 갈대를 그려야 편리하다. 아마 과거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아들을 둔 친구의 부탁으로 즉석에서 그렸거나 주문을 받아 판매용으로 그렸을 것이다. [자료사진 - 심규섭]
 
아무튼 이 그림은 전형적인 ‘출세그림’이다.
원래는 ‘게와 갈대’, ‘연꽃그림’은 독립적인 그림이다.
하지만 김홍도는 연꽃과 게와 갈대를 동시에 결합해 새로운 그림을 만들었다.
김홍도는 겸재 정선과 아울러 역대 화가 중에 가장 정치적인 화가였다. 정선이 영조의 화가였다면 김홍도는 정조의 화가였다.
자신의 모습을 화폭에 담아낼 정도로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다. 하지만 정조의 개혁정치가 실패하면서 함께 몰락의 길을 걸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김홍도는 1745년 태어났다. 강세황에게 그림을 배웠으며 이미 20세 이전에 도화서 화원이 되어 영조의 잔치에 초대될 정도로 천재성을 보였다. 29세 영조의 어진과 왕세자를 그렸고 정조와 만나 깊은 인연을 가진다.
37세에는 정조의 초상을 그리고 그 공로로 안동 ‘안기찰방’이라는 벼슬을 얻었다.
3년 후인 1791년 다시 정조의 초상을 그리고 충청도 연풍 현감이라는 화원 최고의 벼슬에 오른다.
1800년에 정조가 급작스럽게 죽고 난 후 1803년 까지 김홍도의 흔적이 보이다 사라진다.
말년에는 극심한 생활고과 병치레를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영조 때부터 시작해 정조에 이르러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정조와 함께 스러져간 김홍도의 삶은 파란만장했지만 가장 아름다운 화가의 삶을 살았다. 

이 그림의 주제처럼 ‘출세(出世)’는 단순히 선비가 관직을 얻는다는 뜻보다 더 크고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선비에게 있어 정치는 곧 삶이자 목숨과도 같았다. 정치 속에는 개인의 삶을 넘어 가문과 학문적 이상, 학문적 계보와 동료 따위의 복합적인 요소가 작용한다.
김홍도는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화공(畵工)의 수준을 뛰어넘어 그림으로 정치에 개입했다. 무엇보다 정조의 개혁정치를 돕는데 미술작품을 최대한 활용한 화가이다.
요즘으로 치자면 정치기획을 규장각이 담당했다면 김홍도는 홍보기획과 실행을 한 인물이다.

▲ [자료사진 - 심규섭]

▲ 심규섭/꽃게와 연꽃/디지털 회화/2013.
위-갈대꽃이 없는 그림, 아래-갈대꽃이 있는 그림.
같은 그림이지만 갈대꽃이 있는지 없는지의 차이만 있다. 이런 변주는 디지털회화만이 가능한 조형적 특징이다. 이런 방법을 사용하는 이유는 표현의 다양성을 얻기 위함이고 동시에 소통의 폭을 넓히기 위한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작가라고 하더라도 하나의 작품에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없다. 또한 반대로 수용자도 자신이 원하는 것이 담긴 작품을 찾기 어렵다. 디지털은 이러한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자료사진 - 심규섭]

김홍도의 출세그림인 <연꽃과 게>라는 작품을 디지털회화로 변주한 작품이다.  
김홍도의 출세그림 <게와 연꽃>은 수묵화이다.
이 그림에 나오는 게는 우리나라에는 없는 품종이다. 그림에 보이는 대략적인 게의 크기는 두 주먹만 한데 현재 우리나라에는 이런 모양과 크기의 게는 없다. 검색해 보니 중국의 ‘소주’라는 곳에는 나는 게와 가장 비슷하다. 아마도 중국의 그림을 참조하여 즉흥적으로 그렸을 것이다.
나는 굳이 우리나라에 나지 않는 게를 그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가장 흔하면서도 원본 그림과 근접한 꽃게를 선택했다.
 
표현방법에서는 수묵화의 방식을 넘어 채색화로 변주해 그렸다. 채색을 하되 적절한 선묘도 살리고 상징 명암법(가짜 명암)을 사용하여 입체감을 주었다.
 
원래 연꽃의 연밥, 즉 연과(蓮果)가 연이어 향시와 전시에 과거급제 한다는 연과(連科)와 발음이 같다는 이유로 출세그림의 주요 소재가 되었다. 또한 게는 두꺼운 껍질을 가지고 있기에 ‘등갑’이라고 해석하여 1등으로 급제하라는 의미를 가진다.
‘게와 갈대’를 독립적으로 그리는 경우는 게와 갈대의 발음이 ‘전려’가 되고 전려는 과거에 급제하여 왕이 내리는 음식을 받는다는 말과 같아 선택된 소재라고 한다. 그래서 그림의 게는 갈대를 집게로 잡고 있는 모습이다.

사실, 이런 식의 글 장난, 말장난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냥 선비들의 염치 있는 출세그림으로 수용하면 된다. 그 뜻이 이렇고 저렇고 하다 보면 그림은 간데 없고 뜻만 남게 된다. 이것은 그림과 별 관계가 없는 호사가들이 즐겨 쓰는 방식이다. 특히 문자에 그림의 뜻을 숨겨 염치를 더하고자 했던 본래의 의도는 희석되고, 마치 한자나 그림을 잘 아는 것처럼 지식을 자랑하는 행위는 정말로 염치없는 짓이다.
출세그림에는 대략 어떤 종류의 그림이 있다는 것은 알 필요가 있다. 일단 어떤 그림이 출세그림인 줄 알았다면 나머지는 그림을 감상하는 것이 맞다.
 
아무튼 김홍도의 그림에서는 갈대가 그려져 있지만 갈대를 상징하는 갈대꽃은 없다. 갈대꽃을 그리지 않더라도 의미 전달이나 조형적 문제는 전혀 없다.  
나 또한 갈대꽃이 없는 그림을 완성하고 며칠 후에 갈대꽃을 넣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고, 디지털회화의 특성에 따라 같은 그림을 두 개로 만든 것이다.  
 
배경에는 공간을 확장하기 위해 수채기법인 소금뿌리기 기법을 사용했다.
수묵화에서 여백은 화면을 담백하게 하는 역할을 하지만 채색화에서 여백은 미완성으로 보일 수 있다.
그래서 원본의 여백과 채색화의 특징을 적절히 결합한 소금기법을 사용한 것이다. 
또한 작품 윗부분에 표현한 잠자리는 원래 김홍도의 작품에는 없지만 화면의 구도 때문에 넣은 것이다. 하지만 권력을 가졌다하더라도 언제든지 훌훌 털어버리고 자유를 얻으라는 의미도 살짝 가미했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권력과 재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김홍도의 작품은 목적이 뚜렷한 그림이다. 하지만 현대에 있어 출세라는 의미는 변질되었다. 출세는 더 많은 권력과 소비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 일제의 ‘우리말 격파하기’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우리 사회의 지도층은 그야말로 가장 많은 사치와 허영을 부추기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허영과 소비는 미덕이 결코 될 수 없다. 또한 허영과 소비로는 사람들의 존경을 이끌어낼 수 없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모든 권력과 존경과 사랑은 ‘희생과 헌신’에서 나온다. 타인을 재물로 약을 올리거나 권력으로 눌러서 얻을 수 없다. 이것은 숱한 성현들의 말씀과 역사적 사실을 통해 증명된다.
정치나 경제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이 있다면 곁에 두고 감상하면서 스스로를 성찰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 출세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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