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대왕은 조선의 22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1752년에서 1800년이다.
정조는 ‘사도세자’로 불리던 자신의 아버지가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하는 광경을 본 불운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정조는 재위기간에 세제, 군제(軍制) 따위의 여러 개혁적인 정치를 했다. 세도정치를 없애고 노론을 견제하기 위해 다방면의 노력을 했다.
이러한 개혁적인 행보 때문에 노론세력에 의해 독살을 당했다는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정조의 개혁적인 활동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왕실도서관이었던 규장각을 왕을 보좌하는 ‘비서실’ 형태로 신설했으며, ‘장용영(壯勇營)’이라는 친위부대를 만들었다. 미술과 연관해서는 도화서에서 뛰어난 화원을 뽑아 ‘차비대령화원’을 만들고 운영했다.
이 모든 것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규장각’은 관료대신들의 권력기구인 의정부(議政府)나 비변사(備邊司)를 견제하고 왕의 직권을 강화한 일종의 내각(內閣)이었다.
장용영(壯勇營)은 왕의 친위부대로 도성을 수비하는 내영(內營)과 화성에 주둔시킨 외영(外營)으로 나뉘는데 약 3,500여명의 전문무사들로 채워졌다.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성묘를 하고 회갑 차례상을 차려주기 위해 화성으로 행차를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화성에 주둔한 장용영이 길을 열어주고 신변을 보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원은 그야말로 정조가 만든 정조의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장용영이라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행궁(行宮)을 세웠으며 아버지의 묘소도 화성 근처로 옮겼고, 또한 용주사(龍珠寺)를 재건해 명복을 빌었다.
아예 수도를 화성으로 옮길 생각으로 수원성을 쌓기도 했다.

차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 제도는 영조 때 임시로 운영되는 것을 정조가 1783년 규장각 소속으로 넣으면서 본격화 되었다.
차비대령화원은 대략 10명 정도인데, 20명 이상으로 늘어난 경우도 있었다.
1783년에서 1881년까지 [내각일력]에 기록된 차비대령화원은 약 104명 정도로 파악된다. 김응환(金應煥), 신한평(申漢枰), 김홍도(金弘道), 이인문(李寅文), 김득신(金得臣), 김하종(金夏鍾), 장한종(張漢宗), 이한철(李漢喆), 유숙(劉淑), 이형록(李亨祿), 백은배(白殷培), 유운홍(劉運弘) 등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화원 화가들이 모두 차비대령화원을 역임했다.
차비대령화원은 ‘녹취재(祿取才)’라는 승급시험을 통해 정6~7품 정도의 관직을 얻을 수 있었다.
도화서가 예조 소속으로 궁궐 밖에 있었는데 반해 차비대령화원은 규장각 소속으로 궁궐 내부에 있었다. 왕의 명령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밤에도 순번을 정해 숙직을 했을 것이다.

정조의 왕권강화는 세종과 많이 닮아있다.
세종은 아버지였던 태종의 탄탄한 정치적 힘을 바탕으로 조선 초기의 중흥을 이끌었다.
태종은 고려시대의 잔재를 없애고 이성계와 주변의 무장공신(武將功臣)들을 숙청하면서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다. 왕과 세자의 친위부대를 뺀 모든 사병을 혁파하여 중앙군으로 편입시켰다. 이러한 군사적 힘을 바탕으로 세종은 정권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으며 ‘집현전(集賢殿)’을 통해 새로운 인재를 발굴하고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 좌-시흥환어행렬도.(始興還御行列圖)1795년 윤2월 15일 화성행궁을 떠나 시흥(始興)에 있는 행궁(行宮)으로 행렬이 도착하는 모습이다. 그림 중앙에 거대한 용기(龍旗)가 보이는데, 정조대왕(正祖大王) 어머니의 가마를 푸른색 휘장으로 둘러서 잠시 행렬을 멈추고, 정조대왕(正祖大王)이 어머니에게 다반(茶盤)을 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후, 그는 군복 착용 상태로 행궁(行宮)으로 먼저 가서, 직접 현장을 확인한 이후, 다시 돌아가서 어머니를 직접 모시고 행궁(行宮)으로 간다. 서울에서 수원까지 가는 도중에 행궁(行宮) 3곳을 거쳤으며, 행렬 주변에는 구경하는 백성들이 많이 있다. 우-노량주교도섭도.(鷺梁舟橋渡涉圖)1795년 윤2월 16일 화성행의 마지막 날 당시 서울 남쪽의 한강 노량진(鷺梁津)을 지나가는 모습이다. 한강은 강의 폭이 600m 가량으로 너무 넓기 때문에, 현대적인 교량 건설 기술이 존재하지 않던 당시에는, 교량을 설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용선(龍船)을 이용하여 도하(渡河)를 했었는데, 이것도 번거롭기 때문에 주교(舟僑)를 가설하여 이용하게 되었다.
정조는 이런 행렬은 민심을 이용해 정치력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짙게 깔려있다. [자료사진 - 심규섭]

정조가 ‘규장각’, ‘장용영’ 따위를 이용해 왕권을 강화하려 했지만 집권세력인 노론의 힘도 막강했다. 정부의 요직은 거의 노론의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그 관계망도 촘촘했다. 노론은 정조의 왕권강화를 위한 개혁에 조직적으로 반대하고 저항했다.
정조는 이러한 노론의 저항에 한계를 느끼고 백성들의 민심을 이끌어내어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정조는 궁궐 밖을 가장 많이 나간 왕으로도 유명하다. 대략 60회 이상 출궁한 것으로 알려진다.
특히 부모님의 회갑잔치를 위한 수원행차는 거대한 규모였다. 이러한 정조의 행차를 구경하기 위해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정조는 이러한 공식적이고 커다란 규모의 행차를 통해 민심을 이끌어 내고자 했다.
왕이 백성들을 직접 상대하는 일은 거의 없다. 백성들과 관계를 맺고 민심을 살피는 일은 선비들의 몫이었다. 왕이 권력을 행사하는 관료조직은 그야말로 행정조직이었고 선비들은 당(黨)을 만들어 백성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고 있었다. 백성들이 곤란한 처지에 빠지면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은 관청이 아니라 선비들이 모여 있는 서원(書院)이었다. 선비들은 백성들의 어려움을 듣고 관청의 관리들과 의논해 민원을 해결했다.
비운의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 이야기는 백성들에게 널리 퍼져있었다. 정조는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겠지만 ‘효심’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자 했다는 의심도 지울 수 없다. 억울하게 죽은 ‘사도세자’ 이야기와 효심이 강한 정조의 행위는 백성들 사이에서 널리 퍼졌다.
정조는 이런 화성행차를 차비대령화원들에게 거대한 그림으로 그리게 하여 남겨놓았다.

주자성리학을 지배이념으로 ‘태평성대, 이상세계’를 구현하고자 했던 나라에서 정조는 백성들의 종교였던 불교를 이용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빈다는 명분으로 한 화성 용주사의 재건이다.
불교를 이용한 정치력의 강화는 이미 여러 차례의 선례가 있었다. 조선의 역사를 보면 궁궐에 불당을 차렸다가 없애기를 반복했는데, 궁궐 내부에 불당을 차린다는 것은 백성들이 궁궐과 정서적으로 연결되는 효과를 낸다. 이에 선비들은 상소를 올리면서 적극 반대한다.
궁궐에 불당을 차리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사찰을 만드는 행위에서 민심을 이용하여 정치력을 강화하려는 정조의 의도가 읽혀진다.

정조는 부족한 정치력을 메우기 위해 ‘차비대령화원’과 미술작품을 적극 활용한다.
이른바 정조의 그림이라고 불리는 ‘책가도’가 대표적이다.
‘책가도’는 청나라의 ‘다보각경도’를 바탕으로 한 그림인데, ‘다보각경’은 요즘으로 말하면 일종의 장식장 같은 것이다. 책과 여러 기물들로 채워진 장식장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 ‘다보각경도(多寶閣景圖)’이고, 이런 다보각경도에서 책을 중심으로 재탄생한 그림이 ‘책가도(冊架圖)’이다.

▲ 용주사와 대웅전의 후불탱화의 모습이다. 용주사는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빈다는 명분으로 재건한 절이다. 백성의 종교였던 불교를 이용해 왕권을 강화하려했던 의도로 읽힌다.
[자료사진 - 심규섭]

정조는 차비대령화원이었던 김홍도를 청나라 사신 행렬에 보내 중국의 여러 곳을 보게 한다. 이렇게 중국에서 천주교 성당벽화를 통해 서양화법을 익힌 김홍도는 ‘책가도’를 그려 정조에게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김홍도는 용주사 후불탱화를 그리는데 감독역할을 할 만큼 정조와 깊은 관계를 맺은 그야말로 정조의 화가였다.
정조가 좋아했다는 책가도는 녹취재 시험으로 출제되었고 아예 책가도만 그리는 화원가문이 생겨날 정도로 선비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이런 책가도는 ‘책거리’라는 이름으로 대중화되어 민간에 널리 퍼졌다.
‘책가도’는 선비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훌륭한 수단이었다. 책읽기를 좋아하고 학문에 심취하는 일은 선비들의 덕목이다. 하지만 일반 선비들은 왕을 만날 수도 없고 왕의 학문이 어느 정도인지 알 방법이 없다. 책으로 가득 채워진 ‘책가도’는 그야말로 강력한 학문의 상징으로 각인되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학문의 상징이 ‘책가도’이고, ‘책가도’는 정조가 창안한 그림이며 학문과 정조는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결국 정조를 학문의 상징, 학문의 화신으로 각인시킬 수 있는 것이다.
학문에 인생을 건 선비들에게 학문의 상징으로 인식된 정조는 강력한 정치적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요지연도’는 서왕모와 주나라 목왕이 만나 연회를 하는 장면이 담겨진 신화그림이지만 정조에 의해 정치적으로 활용되었다.
‘요지연도’는 ‘책가도’와 마찬가지로 정조의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요지연도’는 정조의 재위 기간인 18세기에 시작된 그림이다.
조선의 이상세계를 구현한 그림은 ‘장생도’이다.
장생도는 구체적인 형상을 가지고 있지만 사람을 그리지는 않았다. 선비들의 이상세계를 담은 산수화에서도 사람은 아주 작고 희미하게 그려지거나 아예 없다.
조선은 신과 종교의 나라가 아니다. 예법과 청렴이라는 학문적 가치로 이상세계를 구현하고자 했던 나라였다. 사람을 그리면 숭배의 대상이 되고 숭배는 곧 종교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이러한 사상적 배경에서 궁중회화에 서왕모라는 신과 신선들과 현실적인 인물을 그려 넣는 일은 파격을 넘어 국가기강을 흔드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요지연도가 차비대령화원들에 의해 그려지고 궁궐을 장식하는 일은 선비들 사이에서 커다란 논란거리였을 것이다. 학문적 이상가치를 추구해 온 선비들의 반발은 당연한 것이었다.

▲ 여러 요지연도와 부분 그림이다. 요지연도는 신화그림이지만 이상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구체적인 신과 인물을 드러내는 것은 조선시대의 사상과 맞지 않다. 하지만 백성들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백성들의 정서에 부합하여 구체적인 상징을 통해 이상세계를 표현했다. 요지연도는 대중정치를 위한 정치색이 농후한 그림인 것이다. [자료사진 - 심규섭]

하지만 백성들의 입장은 다르다.
백성들에게 장생도는 너무 어렵다. 그래서 고작 장수도(長壽圖) 정도로 이해할 뿐이었다.
백성들은 구체적인 형상을 요구한다. 그것을 우상(偶像)이라고 한다. 초기 기독교나 불교에서도 우상숭배는 금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종교가 대중화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또한 우상화이다. 선비나 수도자 같은 지식인들은 보이지 않는 대상을 선호하지만 일반 백성들은 보이는 대상에 집착한다. 그래서 백성들이 많이 찾는 사찰이나 무당집에는 구체적 형상을 가진 불상이나 칠성신, 삼신 따위가 그려져 있다. 백성들은 숭배의 대상이 구체적 형상을 가져야 시각적으로 각인되고 수용하는 것이다.

‘요지연도’에는 서왕모와 주나라 목왕이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주나라 목왕은 정조와 대입시킬 수 있고 여러 신선들은 정조를 도우는 충신들로 연결시킬 수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쿠데타로 집권하고 난후 전국 학교에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 동상을 건립한 이유와 비슷한 효과를 내는 것이다.
또한 요지연도는 백성들에게 이상세계를 구체적인 모습으로 보여준다.
요지연도에는 수많은 볼거리와 이야기 거리가 들어가 있다. 서왕모 이야기, 각종 신선들의 이야기, 화려한 무희들이 등장하고 각종 신성한 동물들이 나온다. 술과 음식과 여자와 춤이 있고 한번 먹으면 천년을 산다는 천도봉숭아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호랑이를 탄 신선도 있고, 물고기를 탄 신선, 학을 탄 신선도 나오고 불교의 보살이 나온다. 연회의 중심에는 태평성대를 뜻하는 봉황이 춤을 춘다.
그 중심에는 서왕모라는 여신에게 초대받은 목왕이 있는데 목왕을 정조의 분신으로 본다면 정조는 하늘의 초대를 받는 왕, 하늘의 뜻을 받을 자가 된다.
이상세계의 구체적인 형상으로 보여주고 그 이상세계를 구현하는 사람이 곧 정조라는 상징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요지연도’는 가장 그리기 까다롭고 품이 많이 들어가며 비싼 그림이지만 장생도보다도 많이 그려지고 대중화된다. 특히 돈을 많이 번 상공인이나 의관, 통역관 따위의 전문직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정조는 민심을 이용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이것은 조선시대의 흐름을 본다면 엄연한 ‘반칙행위’이다.
하지만 영조를 움직여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일 만큼 노론의 힘은 강하고 비대했다.
조선은 왕과 선비들이 서로 협력하고 견제하면서 정치를 한 나라이다.
세종이 좋은 정치를 하고 성군으로 칭송되는 것은 세종이란 개인이 특별나게 뛰어난 왕이라서가 아니라 선비들과 조화를 이뤄 정치를 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선비들의 힘이 너무 강하면 왕은 허수아비가 되고 권력은 부패한다. 선비들은 가문이나 인맥으로 연결되어 있고 자기 사람들을 정부 요직에 임명하고자 한다. 이렇게 되면 백성을 위한 정치보다는 가문이나 당을 위한 정치가 된다.
정조는 왕권 강화를 통해 선비들을 탄압하거나 절대왕권을 추구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선비들과 공평한 힘의 균형을 원했을 뿐이다. 또한 이러한 왕과 선비의 조화를 통해 이상세계를 구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노론에 의해 정치적 힘이 막혔던 정조는 규장각, 장용영, 차비대령화원을 이용해 선비와 백성들의 힘을 이끌어 내고자 했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조선은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요지연도는 이런 정조의 정치적 의지가 담긴 그림 중에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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