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매듭이 풀리면 복잡하게 엉킨 실타래가 술술 풀리는 경우가 있다. 8일 발표된 장성택에 대한 ‘정치국 결정서’와 13일 공개된 ‘판결문’ 내용이 그런 것 같다. 돌이켜보면 지난해부터 해명이 잘 안 되는 일들이 실타래처럼 엉켜 있었다. 그 중 몇 가지를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2012년 9월 최고인민회의 12기 6차회의를 앞두고 장성택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나 내각 총리에 기용될 것이라는 설이 중국의 대북소식통을 통해 흘러나왔다. 근거 없는 이야기로 치부했다. 당직을 버리고 ‘좌천’을 선택할 가능성이 없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왜 이런 이야기가 유력한 소식통을 통해 흘러나왔는지가 의문이었다.

② 2012년 11월 4일 북한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확대회의를 개최하고 국가체육지도위원회를 신설하는 결정을 하고 위원장에 장성택을 임명했다. 그런데 국가기구를 신설하는 데 굳이 정치국 확대회의를 연 것이 이상했다.

③ 2013년 9월 북한은 국내 축구 경기에서 부정행위를 적발한 사실을 이례적으로 보도했다. 8월 28일 김일성경기장에서 열린 ‘횃불컵’ 1급 남자축구 인민군 ‘4.25팀’과 결승에서 부정선수를 출전시켰다며 선봉팀의 우승 기록을 박탈하고 4.25팀을 우승팀으로 조정한 것이다. 이 결승경기는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벌어졌다. 그런데 경기 결과가 뒤바뀌고, 굳이 알리지 않아도 될 내용을 공개했다. 이상하게도 북한의 체제 속성상 심각한 문제가 될 사안이었는데 별다른 후속조치 없이 그냥 넘어갔다.

이외에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2010년 조선대풍국제그룹 조직 등 여러 가지 사안이 미스터리지만, 장성택사건이 불거지면서 엉킨 실타래가 일부 풀리기 시작했다. 장성택에 대한 판결문에 언급된 내용을 중심으로 그의 부침과 사형까지 이르게 된 배경을 추론해 보기로 한다.

장성택 체포의 ‘결정적 계기’는 무엇이었나?

2013년 11월 18일 장성택 국가체육지도위원장이 전격적으로 가택 연금되고, 장성택의 측근인 노동당 행정부의 리룡하 제1부부장과 장수길 부부장이 체포됐다. 11월 6일 일본의 안토니오 이노키 참의원을 만난 것이 장성택의 마지막 공개활동이었다.

이때쯤 장성택 관련 ‘모종의 보고’를 받은 김정은 제1위원장은 정치국 상무위원과 일부 조직지도부 및 안보일꾼들이 참여한 회의에서 장성택에 대한 처리를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리룡하 제1부부장과 장수길 부부장은 ‘월권’과 ‘분파행위’, ‘당의 유일적 영도체계 거부’ 등의 혐의로 체포돼 조사를 받았고, ‘장성택 등의 뒤에 숨어서 당 위의 당으로, 내각 위의 내각으로 군림하려 했다’고 비판받았다. 며칠 후 이 같은 내용이 정보당국에 입수됐고, 곧이어 일부 북한전문가들에게도 알려졌다.

리룡하 제1부부장은 황해북도 당 비서를 활동하다 장성택이 2009년경 행정부 부부장으로 발탁한 간부로, 2011년 노력영웅 칭호를 받고 제1부부장으로 승진한 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현지지도에 동행하기 시작했다. 장수길은 인민보안부 산하의 승리무역회사라는 유류수입회사를 도맡아 운영했고, 중국과의 무역 및 차관 도입 등을 전담한 것으로 전해진다. 조사를 마친 두 사람은 11월 27일경 당 간부들 앞에서 처형됐고, 이 같은 사실이 30일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고됐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11월 29~30일 백두산 삼지연지구를 현지지도했다. 당시 현지지도에는 김원홍 국가안전보위부장, 김양건 당 비서, 한광상 당 재정경리부장, 박태성.황병서 조직지도부 부부장, 김병호 선전선동부 부부장, 홍영칠 기계공업부 부부장, 마원춘 재정경리부 부부장 등이 동행했다. 당시 김정은 제1위원장은 “백두에서 개척된 주체혁명 위업을 끝까지 완성하려는 결심과 의지가 더욱 굳세어진다”고 말했다. <노동신문>은 삼지연 방문에 대해 “조선혁명의 행군길을 이어가려는 철의 신념의 분출이었으며 혁명의 배신자들에게 내리는 무서운 철추였다”고 보도했다. 이때 장성택에 대한 처리와 향후 대책문제가 최종 결정된 것으로 추정된다.

12월 8일 노동당은 정치국 확대회의를 열고 장성택이 ‘반당반혁명적 종파행위’로 유일영도체계 저해, 당의 노선과 정책 왜곡, 부정부패행위, 도덕적 해이 등의 죄목으로 비판하고 그 자리에서 체포했다. 4일 후인 12일 장성택은 국가안전보위부 특별군사재판에서 국가전복음모행위로 사형을 선고받고 즉시 집행됐다. 가택연금에서 사형까지 한 달도 채 안 돼 사건이 마무리된 셈이다. 장성택에 대한 비판과 최종판결까지 공개적으로, 속전속결로 진행한 것은 북한이 이 사건의 정치적 파장을 최소화하려고 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11월 18일 장성택이 연금되고, 두 사람의 측근이 체포된 ‘도화선’은 무엇이었을까? 정치국 결정서나 판결문에는 이것이 명확하게 나와 있지 않다. 일단은 11월 6일 전후에 열린 장성택과 측근들의 모임이 직접적 ‘도화선’이 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장성택과 30여 명의 측근이 함께 한 이 모임에서 ‘장성택 동지의 만수무강 축원’, ‘장성택 동지 만세’ 등의 구호가 나왔다는 것이다. 이 모임에 대해 보고 받은 김정은 제1위원장이 조직지도부와 국가안전보위부에 ‘합동검열’을 지시했을 가능성이 크다. 일각에서는 장성택이 부장으로 있는 당 행정부 산하기관인 보위부가 아니라 군 보위사령부를 움직였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1997년 청년동맹사건까지 소급

당 정치국 결정서는 “당에서는 장성택일당의 반당반혁명적 종파행위에 대하여 오래 전부터 알고 주시해오면서 여러 차례 경고도 하고 타격도 주었지만 응하지 않고 도수를 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수수방관할 수 없어 장성택을 제거하고 그 일당을 숙청함으로써 당 안에 새로 싹트는 위험천만한 분파적 행동에 결정적인 타격을 안기였다”라고 지적돼 있다. 여기서 지적한 “여러 차례 경고도 하고 타격도 주었다”는 것이 어느 시점부터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판결문에는 “장성택은 청년사업부문에 배겨있으면서 적들에게 매수되여 변절한자들, 배신자들과 한동아리가 되여 우리나라 청년운동에 엄중한 해독을 끼치였을 뿐 아니라 그자들이 당의 단호한 조치에 의하여 적발숙청된 이후에도 그 끄나불들을 계속 끌고다니면서 당과 국가의 중요직책에 박아넣었다”라고 지적해 1997년까지 소급했다.

판결문에 적시된 “적들에게 매수되여 변절한자들, 배신자들”들은 1997년 9월 ‘반당반혁명과 간첩죄’로 처형된 최현덕 청년동맹 비서, 함운건 사회안전부 부국장, 리병서 은별무역회사 총사장 등을 지칭한다. 1997년 2월 황장엽 비서가 망명하자 북한은 그와 관련된 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열을 진행했고, 그 결과 황 비서와 심금을 터놓고 대화했던 서관히 농업담당 비서를 비롯해 청년동맹 관계자들이 처형됐다.

일본 <요미우리신문> 1998년 3월 18일자 보도에 따르면 서관히 농업담당 비서가 처형될 때 사회안전부 함운건 정치국 부국장과 리병서 은별무역회사 총사장도 함께 처형됐으며, 이들의 가택 수색에서 한국 정보기관과 접촉한 증거품들이 압수됐다고 한다. 이는 황장엽 노동당 비서의 망명 직후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망명 경위와 접촉자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밝혀진 것이라고 한다. 이 신문은 또한 함운건과 리병서는 (황장엽과 함께 망명한) 김덕홍 씨를 통해 베이징에서 한국 정보기관과 접촉한 사실도 밝혀졌으며, 김정일 위원장 여동생의 남편인 장성택과 청년동맹 제1비서 최용해도 처형대상이었으나 측근이어서 간신히 화를 면했다고 보도했다.

같은 날 <연합뉴스>도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온 해외교포의 말을 인용해 청년동맹 간부들이 처형된 것은 안기부의 대북공작에 연루된 사실이 북한 당국의 집중적인 사상검열에서 발각됐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연합뉴스>는 “이 소식통은 ‘북한체제 전복을 위한 대북공작’은 ‘구체적으로 김정일 암살기도’라고 말하고 당시 처형된 최현덕 비서 등 청년동맹 간부 4-5명이 평양 청년극장 식당에서 김정일 암살을 모의했던 것으로 북한 당국은 파악하고 있다고 전했다.

소식통에 따르면 이들은 김정일을 암살하면 자동적으로 북한의 제2인자인 장성택이 김정일의 자리를 이어받게 될 것이라는 ‘쿠데타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장성택은 1988년 12월 노동당 청년사업부장, 1992년 12월 노동당 청년 및 3대혁명 소조부장을 맡는 등 청년조직에 깊이 관여해 왔다.

<연합뉴스>는 또한 “청년동맹에서 운영하는 은별무역회사를 통해 ‘남한 측 정보당국의 조종을 받는 무역회사’ 관계자와 북경에서 수시로 접촉하면서 ‘남측의 돈을 받아먹다 매수’됐으며 이 같은 제공 자금 가운데 일부는 청년동맹에서 장성택으로, 다시 장성택에서 최고위급에까지 흘러들어가는 등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났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에 언급된 ‘남한 측 정보당국의 조종을 받는 무역회사’ 관계자는 리병서 은별무역회사 총사장의 형으로 당시 필자도 인터뷰를 시도했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다.

얼마 후 자신들의 대표가 장성택이라고 주장하며 북측 관계자가 남쪽의 정보당국에 전달한 상당 분량의 문건을 입수됐다. 이 문건에는 북한 노동당의 비공개 회의에서 이뤄진 주요 논의사항이 날자별로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었고, 구체적으로 금액까지 적시하며 ‘거사자금’을 요청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이 문건을 본 북한전문가들은 북한 정보당국이 허위로 만들어 흘린 ‘역정보’라고 판단했다. ‘장 부장’이라 불리며 ‘실세’로 활동하던 장성택이 그 같은 어마어마한 ‘반혁명음모’에 직접 개입했을 리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청년동맹사건 이후에도 장성택은 ‘승승장구’했다. 그런데 16년이 흐른 시점에서 북한은 ‘장성택 판결문’에서 장성택이 당시 처형된 ‘청년동맹 관련자들과 한동아리’가 되어 청년운동에 해독을 끼쳤다고 언급했다. 무엇이 사실인지 혼란스럽다. 다만 청년동맹사건이 장성택과 당시 청년동맹 제1비서였던 최룡해를 곤란하게 만들었던 것은 확실하다. 최룡해는 1998년 1월 ‘신병’을 이유로 해임됐다.

2004년부터 2년간 ‘혁명화’과정 거쳐

노동당의 핵심부서인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외부에서 ‘사실상의 2인자’라는 평가를 듣던 장성택이 정치국 결정서에서 언급한 ‘타격’을 받은 것은 2004년 초였다. ‘권력욕에 의한 분파행위’라는 이유였다.

2004년 2월 장성택이 관장하던 부서의 당 부부장의 아들 결혼식이 발단이었다. 결혼식에 참석했던 한 간부의 운전기사가 음주운전 사고를 내 사고경위를 조사하던 중 이 결혼식이 호화롭게 진행된 사실과 최용수 인민보안상 등 고위 간부들이 장성택에게 줄을 섰던 게 드러났다고 한다. 사실 고위간부의 음주운전은 평소 같았으면 그냥 넘어갈 일이었지만, 시기가 좋지 않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절대 음주운전 하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진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2003년 6월 16일 김용순 대남담당비서가 운전기사의 음주운전으로 교통사고가 나 10월 26일 사망하자 김정일 위원장이 이 같은 지시를 내린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리제강 당시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의 주도로 장성택과 그의 측근들에 대한 검열이 이뤄졌고, 결혼식에 참석했던 여러 간부들이 해임, 철직됐다. 장성택은 개인 사생활과 함께 2002년 10월 북한 경제시찰단 18명 중 일원으로 남한에 왔을 때의 행동과 발언으로 집중 비판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폭탄주’ 과음, 그로 인한 일정 차질, 북한 경제에 대한 비관적 발언들 등이 도마 위에 올랐다. 서울에 왔을 때 룸살롱에 갔다는 설도 있지만 가능성은 크지 않다.

2005년 정동영 당시 통일부장관이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을 때 장성택의 안부를 묻자 김정일 위원장은 ‘남쪽에 가서 폭탄주도 배우고 해서 아파서 쉬게 했다’며 장성택의 서울 행적이 북한 내부에서 문제가 됐음을 시사했다.

특히 ‘분파행위’로 비판받은 것은 2003년경 박봉주 당시 내각 총리가 평양시 광복거리 건설공사에 자재를 우선 공급하라고 지시했을 때 담당자들이 ‘장성택 부부장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고 보고한 게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고 한다. 장성택은 직위에서 해임된 뒤 김일성고급당학교에서 자기비판을 하며 ‘혁명화’과정을 거친 것으로 전해진다.

2년 간 ‘혁명화’이후 다시 승승장구

2006년 1월 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당중앙위원회에서 개최한 음력 설 연회에 장성택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장성택은 노동당 수도건설부 제1부부장으로 복권됐고, 평양시 재건설사업에서 성과를 내며 이듬해 당 행정부장으로 승진했다. 2008년 8월 김정일 위원장이 뇌출혈로 쓰러진 이후에는 부인인 김경희와 함께 정치적 위상이 더욱 높아졌고, 2009년 4월에는 최고인민회의에서 국방위원으로 선출됐다.

2009년 11월 북한은 전격적으로 ‘화폐교환’(화폐개혁)을 단행했다. 박남기 당 재정계획부장의 작품이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였다. 2003년 박봉주가 총리가 임명되면서 당과 군부의 견제로 힘이 빠지기 시작한 2005년 국가계획위원장에서 물러났던 박남기는 당 계획재정부장으로 복귀했고, ‘시장 축소’와 계획경제 강화를 위해 화폐교환을 실시한 것으로 평가됐다. 반면 사회주의경제관리개선조치를 주도했던 박봉주 총리는 2007년 4월 해임돼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 지배인으로 좌천됐다.

그러나 기존 화폐와 새 화폐를 100대1 비율로 바꾸는 화폐교환이 실시된 후 평양의 경우 대다수 상점이 문을 닫았고, 상품 가격이 새로 고지되지 않아 유통시장이 혼란에 빠졌다.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나선 것은 김경희 당시 당 경공업부장이었다.

“2009년 12월 중순 김경희 부장은 평양에서 고급 승용차를 타고 북쪽으로 향했다. 러시아풍의 털모자를 깊이 눌러쓴 김 부장은 평안도를 거쳐 자강도.함경도 등 지방을 순례하면서 화폐교환 이후 나타난 부작용과 민심을 살폈다. 평양을 떠나기에 앞서 그는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단독으로 만나 장시간 대화를 나눴다. 지방 암행을 마치고 돌아온 김경희 부장은 화폐교환 후 발생한 경제 혼란을 수습할 후속 조처들을 김정일 위원장에게 보고했다. 화폐교환을 주도한 박남기 재정계획부장과 국가계획위원회 일부 간부의 허위 보고와 부적절한 처신도 거론됐다. 김경희 부장이 전면에 나서면서 상점들이 다시 문을 열었고, 금지됐던 시장에서의 물품 거래가 일부 허용됐다.”

2010년 3월 중국을 방문했을 때 장성택 행정부장 라인과 가까운 한 중국 무역업자가 전해준 이야기다. 김경희 부장의 보고에 이어 리제강 제1부부장의 주도로 조직지도부의 검열이 진행됐다. 리제강이 썼다고 알려진 《혁명대오의 순결성을 강화해나가시는 나날에》에서는 박남기에 대해 “사회주의경제 건설을 저지하고 자본주의 경제방식을 끌어들이려다 덜미를 잡혔다”며 2009년 11월 화폐개혁 역시 김정일 위원장이 구체적인 방향과 방법을 제시했는데도 박남기가 이를 무시해 혼란이 빚어졌다고 주장했다.

박남기 부장은 2010년 1월 ‘노동당 본부당 대논쟁’에서 “남조선식 경제 수용이 자본주의 제도로 복귀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라 여겨 시장경제를 도입하려 했다”고 자백했다고 한다. 국가안전보위부 특별군사재판소는 2010년 3월 ‘만고역적 박남기를 처형한다’고 선고했고, 선고 직후 박남기는 리태일 계획재정부 부부장과 함께 강건군관학교에서 총살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판결문에서는 “2009년 만고역적 박남기놈을 부추겨 수천억원의 우리 돈을 람발하면서 엄청난 경제적 혼란이 일어나게 하고 민심을 어지럽히도록 배후조종한 장본인도 바로 장성택이다”이라며 화폐개혁으로 인한 혼란의 배후로 장성택을 지목했다. 현재로서는 사실여부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2004년 장성택 검열과 2009년 박남기 검열을 주도했던 리제강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은 2010년 6월 2일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당시 국내언론들은 김정일 위원장과 함께 군부대 예술선전대 공연 관람을 갔던 리제강이 심야에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점에서 여러 가지 의혹을 제기했다. 리제강의 죽음에 장성택이 개입돼 있다는 소문이 북한 내부에 파다하다는 설까지 보도됐다. 역시 확인되지 않은 내용이다.

국방위원 선출돼 해외자본 유치에 개입

리제강 사망 후 5일 뒤인 6월 7일 최고인민회의 제12기 3차 회의에서 장성택은 국방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한 지 1년여 만에 다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승진했다. 다만 박남기의 실각 이후 경제정책의 주도권은 김경희 부장에게 넘어갔다.

최고인민회의 제12기 3차 회의에서 신임 총리에 김일성 주석의 서기실장(비서실장) 출신인 최영림이 기용됐고, 2개월 뒤인 2010년 8월 박봉주는 당 경공업부 제1부부장으로 복귀했다. 당시 국내언론들은 박봉주가 장성택 측근이라고 보도했지만, 그의 복귀는 김경희 부장의 추천으로 이뤄졌다. 실제로 2007년 박봉주 총리의 실각에는 박남기 외에 장성택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2009년 국방위원에 선출된 뒤 장성택은 본격적으로 해외자본유치에 개입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부터 조선대풍국제그룹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2009년 9월 초 김정일 위원장은 무역성과 대외사업기관 주요 간부들이 모인 자리에서 “미국을 비롯한 서구 자본 유치에 힘을 쏟아야 합니다”라며 대외무역 확대와 해외자본 유치를 촉구했고, 그 후 대외무역기관에 대한 정리작업도 진행했다.

국방위원회가 먼저 나섰다. 국방위원회는 2006년 홍콩에 본사를 두고 설립된 다국적 투자회사 대풍그룹을 확대해 해외투자유치에 뛰어들었다. 2010년 1월 20일 평양 양각도국제호텔에서 열린 조선대풍국제투자그룹 이사회 1차 회의에서는 대풍그룹의 이사장으로 김양건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위원장(국방위원회 참사 겸 노동당 통일전선부장), 상임부이사장 겸 총재로 재중동포 박철수가 선출됐다. 이사회는 국방위원회, 내각, 재정성, 유관 부서,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조선대풍국제투자그룹 대표 등 7명으로 구성됐다. 이사장은 김양건 부장이었지만 뒤에는 장성택이 있었다. 대풍그룹은 1년에 100억달러, 10년에 1,000억달러의 해외자본을 유치해 사회기반시설 건설에 투자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대풍그룹에 대해 내각 경제관료들은 비판적이었다. 계획의 현실성에 의문이 제기됐고, 내각의 대외사업과도 중복이 됐기 때문이었다. 대풍그룹에 대한 비판적 보고서가 연이어 제출됐다. 당시 대풍그룹에 대한 ‘조사보고서’를 제출했던 북측의 한 관계자는 “조사해 보니 박철수의 대풍그룹은 홍콩에 본사를 둔 페이퍼컴퍼니로 자본금도 거의 없었고, 투자유치 능력도 의문시됐다”라고 말했다.

2010년 7월 북한 내각은 전원회의를 열고 외자유치 전담기구로 조선합영투자위원회를 결성했다. 외자 유치와 합영, 합작 등 외국과 관련된 모든 사업을 통일적으로 지도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는 북한의 국가적 중앙지도기관이었다. 위원장에는 몇 달 전 스위스에서 귀국한 리수영 전 제네바 북한대표부 대사가 맡았다. 그해 12월 조선합영투자위 대표단은 베이징에서 중국 상무부와 라선특구와 압록강의 섬인 황금평 개발 등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하는 등 눈에 띄는 성과를 냈다.

그러나 2011년 1월 국가경제개발 10개년 전략계획이 내각 결정으로 발표됐지만 국가경제개발 전략계획에 속하는 주요 대상들을 전적으로 맡아 실행할 기관으로는 조선합영투자위가 아닌 조선대풍국제투자그룹이 선정됐다. 정상적인 조치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몇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잘못된 결정이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2011년 하반기부터 북한 언론매체에서 대풍그룹에 대한 언급이 없어졌고, 다음해 초 대풍그룹은 조선합영투자위에 흡수됐다.

장성택 판결문에는 “(장성택이) 위대한 장군님께서 최고인민회의 제10기 제1차회의에서 세워주신 새로운 국가기구체계를 무시하고 내각소속 검열감독기관들을 제놈밑에 소속시키였으며 위원회, 성, 중앙기관과 도, 시, 군급기관을 내오거나 없애는 문제, 무역 및 외화벌이단위와 재외기구를 조직하는 문제, 생활비 적용문제를 비롯하여 내각에서 맡아하던 일체 기구사업과 관련한 모든 문제를 손안에 걷어쥐고 제 마음대로 좌지우지함으로써 내각이 경제사령부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게 하였다”라고 적시돼 있다. 2010년에 있었던 내각 산하 조선합영투자위와 국방위원회 산하 대풍그룹의 양립과 갈등문제에 대해 장성택에게 책임을 돌린 것으로 보인다.

어째든 2011년에 들어 장성택의 공개행보에는 거침이 없었다. 2011년 1월 23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방북한 이집트의 나기브 사위리스 오라스콤 회장을 만난 후 찍은 사진에서 그의 위상이 잘 드러났다. 북한이 공개한 사진을 보면 장성택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사위리스 회장이 만찬 후 손을 잡고 사진을 찍는 자리에 단독으로 배석했다. 또한 장성택은 그해 5월 김정일 위원장의 중국 비공식 방문 때 수행했고, 이때 합의된 라선경제무역 지대와 황금평.위화도 경제지대 공동개발 및 공동관리를 위한 조중 공동지도위원회 북측위원장이 됐다. 그리고 6월 8일 ‘황금평.위화도 경제지대 조중 공동개발 공동관리 대상 착공식’을 시작으로 7개 북중경협사업 착공식을 성대하게 개최했다. 그러나 2011년에 진행된 사위리스 오라스콤 회장의 방북, 북중경협사업 등은 대부분 리수영이 주도한 조선합영투자위의 작품이었다.

장성택은 후계자 공식화에 반대했나?

한편 장성택은 2010년 9월 28일 열린 당대표자회에서 의외로 ‘소외’됐다. 리영호 신임 인민군 총참모장이 정치국 상무위원,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부상했지만, 장성택은 정치국 위원도 아닌 후보위원으로,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됐을 뿐이다. 당시 부인인 김경희는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됐다. 또한 전날 김경희, 최룡해, 김경옥 제1부부장 등에게 대장 칭호가 부여됐지만 장성택은 빠졌다.

장성택이 정치국 위원에 들어가지 못하고, 당시 황해북도 당책임비서였던 최용해도 받은 ‘대장’ 군사칭호를 받지 못하자, 외부의 관측과 달리 그가 ‘2인자’, ‘섭정 관리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줬다는 평가가 나왔다. 당시 북측의 관계자는 “장성택이 사실상 2인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역사상 부마(사위)가 2인자의 자리에 오른 적이 있느냐”라고 반문하며 “그의 역할을 과대평가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한 바 있다. 특히 그는 장성택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부정적 평가로 일관했다.

그런데 장성택 판결문에는 뜻밖의 내용이 적시돼 있다.
“장성택은 전당,전군,전민의 일치한 념원과 의사에 따라 경애하는 김정은동지를 위대한 장군님의 유일한 후계자로 높이 추대할데 대한 중대한 문제가 토의되는 시기에 왼새끼를 꼬면서 령도의 계승문제를 음으로 양으로 방해하는 천추에 용납 못할 대역죄를 지었다.”

2008년 8월 김정일 위원장이 쓰러진 후 김경희, 장성택 부부가 김정은 제1위원장을 후계자로 옹립하는데 적극 나섰다는 외부의 평가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 장성택이 2010년 9월 28일 당대표자회에서 김정은 후계자를 공개하는 것에 ‘유보적 의견’을 냈던 것일까?

북한은 애초에 2010년 6월 당대표자회를 9월 상순에 소집한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아무런 이유를 밝히지 않고 9월 말로 연기됐다. 이를 두고 북한이 비공식적으로 언급한 수해 때문이라는 설부터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이상설, 당 대표자회를 앞둔 권력갈등, 김정은 후계자의 공식 등장 여부에 대한 입장 조정 등이 연기사유로 거론됐다.

당시 북측관계자는 “처음 당 대표자회 소집이 발표됐을 때까지만 해도 북한은 후계자를 공개하지 않을 계획이었다”라고 밝혀 김정은 후계자의 공식 등장 여부를 두고 조정이 이뤄졌음을 시사했다. 8월 26일부터 30일까지 4박 5일간 김정일 위원장이 김정은 후계자를 동행해 만주지역을 방문하고 돌아온 후 ‘비공개’에서 ‘공개’로 바뀐 것이다. 북한이 이 시기에 장성택이 “령도의 계승문제를 음으로 양으로 방해”했다고 밝힌 것은 당시 장성택이 ‘후계자 공개가 너무 빠르다’란 의견을 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9월 당대표자회에서 장성택이 상대적으로 ‘소외’됐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장성택은 내각 총리에 욕심이 있었나?

그러나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 위원장이 급서하면서 장성택은 전면에 부상했다. 그는 12월 24일 금수산태양궁전 참배 때 대장 계급장이 달린 군복 차림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2012년 4월 김정은 제1위원장이 노동당 제1비서로 추대된 제4차 당대표자회에서 장성택은 마침내 정치국 위원에 올랐다. 그리고 2012년 한 해 동안 장성택은 106차례나 김정은 제1위원장의 현지지도에 수행하면서 최측근임을 과시했다.

이 해에 김정은 제1위원장이 의욕적으로 추진한 평양시 건설 및 편의봉사시설 건설사업에 장성택이 관장하던 자금이 투입됐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9월 2일 김정은 제1위원장이 대동강타일공장을 현지지도했을 때는 측근인 리룡하 행정부 제1부부장과 장수길 부부장이 모두 수행할 정도였다. 다만 인민군 차수로 승진해 정치국 상무위원,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인민군 총정치국으로 승진한 최룡해보다는 서열에서 밀렸다.

그런데 한 가지 의아한 점은 2012년 3월부터 장성택이 연로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대신해 4월에 열리는 최고인민회의 제12기 제5차회의에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에 취임할 것이라는 소식이 중국의 대북소식통을 통해 흘러나왔다는 것이다. 그것도 중국에 나와 있는 북측관계자들 사이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연이어 장성택이 내각 총리에 임명될 것이라는 또 다른 소문이 돌았다. 당시에는 장성택이 당과 국방위원회 직책을 내놓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나 내각 총리에 갈 가능성이 없다고 봤기 때문에 고려할 가치가 없다고 봤다.

그런데 뜻밖에도 판결문에 이와 관련된 부분이 들어가 있다.
“장성택은 당과 국가의 최고권력을 가로채기 위한 첫 단계로 내각총리자리에 올라앉을 개꿈을 꾸면서 제놈이 있던 부서가 나라의 중요경제부문들을 다 걷어쥐여 내각을 무력화시킴으로써 나라의 경제와 인민생활을 수습할수 없는 파국에로 몰아가려고 획책하였다.”
장성택 또는 그의 측근들 사이에서 ‘장성택 총리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판결문에는 “장성택이 부서와 산하단위의 기구를 대대적으로 늘이면서 나라의 전반사업을 걷어쥐고 성,중앙기관들에 깊숙이 손을 뻗치려고 책동하였으며 제놈이 있던 부서를 그 누구도 다치지 못하는 《소왕국》으로 만들어놓았다”라고 지적하고 있는데, 당 행정부를 측근인 리용하 제1부부장에게 맡기고 자신은 경제사업을 관장하는 내각 총리로 옮기려고 했던 것일까? 참 알 수 없는 대목이다.

그해 11월 장성택은 내각 총리가 아닌 국가체육지도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됐다. 부위원장에는 로두철 내각 부총리.최부일 총참모부 부총참모장.리영수 노동당 근로단체 부장 등이 임명됐고, 위원으로 당 비서들과 내각의 주요 상(장관)이 망라돼 내각과 군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였다. 이로써 그는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정치국 위원, 당중앙군사위 위원, 인민군 대장, 당 행정부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국가체육지도위원장 등 무려 8개의 직책을 갖게 됐다. 외부에서는 장성택이 북한의 2인자라는 사실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사실상 장성택이 김정은 제1위원장 뒤에서 ‘섭정’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판결문에서도 “장성택은 특히 경애하는 김정은 동지로부터 이전시기보다 더 높은 직무와 더 큰 믿음을 받았다”라고 나와있다.

장성택, 핵실험에 반대?

거기까지였다. 2013년 들어 그의 위상은 갑자기 낮아졌다. 현지지도 수행빈도 수가 급감했다.
어느 시점에, 무엇을 가지고 틀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 지난 3월 개성공단 폐쇄 문제가 현안으로 등장했을 때 장성택이 부인인 김경희 당 비서에게 “지도자 동지(김정은)가 당신(김경희) 말은 들을 테니 그러면 (공단을 폐쇄하면) 안 된다고 건의 좀 하라”는 주문을 했다고 정보 당국은 파악하고 있다. 정책결정과정에서 장성택이 배제되기 시작한 것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장성택이 국가체육지도위원장으로 간 것이 한직으로 밀려난 것이라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실제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올해 들어 장성택은 주로 체육행사나 예술공연에 모습을 드러냈다.

2013년 1월 26일 김정은 제1위원장이 핵실험과 관련된 중요 정책 결정을 위해 소집한 ‘국가안전 및 대외 부문 일군협의회’에도 장성택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반면 2월 초 군사력 강화와 관련된 김정은 제1위원장의 지침을 전달하기 위해 개최된 당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에서 참석했다. 3월에 열린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는 ‘경제건설과 핵무력 건설 병진노선’이 채택됐다. 그러나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4월까지 긴장이 고조된 시점에 장성택이 공개석상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이와 관련 장성택이 2012년 12월 ‘은하 3호 장거리 로켓’발사와 2013년 2월의 3차 핵실험에 대해 반대의견을 갖고 있었다는 설이 흘러나오고 있다. 3월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도 드러내놓고 반대는 못했지만 ‘경제건설과 핵무력 건설 병진노선’ 채택에 부정적 의견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중국을 의식해 공개활동을 자제했다는 설도 있다.

정치국 결정서는 ‘장성택과 그 추종자들’이 김정은 제1위원장의 명령에 불복했으며 당의 노선과 정책을 집행하는 데도 태만하거나 왜곡했다고 지적했다. 장성택이 노동당 정치국회의나 국방위원회에서 결정된 사안에 대해 ‘반대의견’을 표명했거나 집행을 제대로 하기 않았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정치국 결정서에서 장성택에 대해 “당의 유일적 령도체계를 세우는 사업을 저해”하고, “앞에서는 당과 수령을 받드는척하고 뒤에 돌아앉아서는 동상이몽, 양봉음위(陽奉陰違, 앞에서는 받드는 척하지만 뒤로는 다른 행동을 함) 하는 종파적 행위를 일삼았다”라고 지적한 것도 이와 관련된 것이다. 즉 공식회의 석상에서는 자신의 의견을 제출하지 않고, 결정사항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며 개성공단 문제처럼 수정을 시도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북한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행동이다.

판결문에서는 “장성택이 지난 기간 우리 당의 조직적의사인 당의 로선과 정책을 체계적으로 거역하는 반당적행위를 감행한 것은 제놈을 당에서 결론한 문제도, 당의 방침도 뒤집을수 있는 특수한 존재처럼 보이게 하여 제놈에 대한 극도의 환상과 우상화를 조장시키려는 고의적이고 불순한 기도의 발로였다”고 지적했다.

사실 면종복배(面從腹背)와 비슷한 뜻인 양봉음위는 과거 북한이 ‘반당반혁명 숙청사건’때마다 써먹은 용어다. 그런데 이 단어를 몇 년 전 북측 관계자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당시는 그는 “지금 장군님(김정일 위원장) 앞에서는 만세를 부르고 갖은 미사여구를 나열하지만 뒤로 돌아서면 딴 생각을 하고 제 주머니만 챙기는, 양봉음위하는 간부들이 있다는 게 큰 문제다”라고 말했었다. “그런 간부 중에 장성택도 포함되냐”고 묻자 그는 대답을 피하며 “알아서 판단하라”라고 말했다. 북한 내부에 장성택의 행적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이 잠재돼 있었던 것이다.

장성택은 왜 계속된 경고를 무시했나?

2013년 1월 29일에 열린 제4차 당세포비서대회에서 김정은 제1위원장은 “세도군, 관료주의자들이야말로 우리 당이 단호히 쳐야 할 주되는 투쟁대상”이라며 예상보다 강도 높게 ‘세도’와 ‘관료주의’ 척결을 강조했다.

“당중앙위원회는 인민대중중심의 사회주의화원에 돋아난 독초와 같은 세도와 관료주의를 벌초만 할것이 아니라 뿌리채 뽑아버리기로 단단히 결심하였습니다. 세도와 관료주의를 반대하는 투쟁은 모든 당조직들과 당원들이 다 떨쳐나서야 할 전당적인 사업입니다. 세도와 관료주의를 없애자면 일군들과 세포비서들이 자신을 혁명적으로 수양하기 위하여 적극 노력하며 중앙당과 도,시,군당,초급당조직들은 물론 당세포들에서도 세도,관료주의와의 투쟁을 원칙적으로 강도높이 벌려야 합니다.”

여기서 언급한 ‘세도’와 ‘관료주의’가 장성택을 겨냥했을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결과적으로는 장성택에 대한 경고가 됐다고 할 수 있다. 이날 김정은 제1위원장의 연설 내용에는 “사업에서는 직급이 있어도 당생활에서는 높고 낮은 당원이 있을 수 없으며 당안에서는 이중규률이 허용될수 없습니다”는 구절도 포함돼 있었다. 실제로 장성택이 체포된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채택된 정치국 결정서에도 “우리 당은 앞으로도 혁명의 원칙을 저버리고 당의 령도에 도전하며 당과 국가의 리익, 인민의 리익을 침해하는 자는 그가 누구이든 직위와 공로에 관계없이 추호도 용서치 않을 것”이라는 대목이 들어가 있다.

세포비서대회가 끝난 직후인 1월 31일 국방부 정보본부는 “올해 들어 장성택이 김정은 (당 제1비서)을 별로 의식하지 않는 모습이 자주 식별돼 북한 내 실질 권력자가 김정은이 아닌 장성택이라는 소문이 지속적으로 들린다”는 보도자료를 냈다.

국가안전보위부와 인민보안부를 통제하는 장성택 행정부장이 1월 26일 김정은 제1비서가 주관하는 국가안전 및 대외일군협의회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점, 제4차 당세포 비서대회에서 김 제1비서의 연설 때 장 부장이 다른 곳을 바라보거나 자세를 삐딱하게 했다는 점을 제시했다. 북한을 자극할 수 있는 민감한 내용이었다. 국방부 정보본부가 이 같은 보도자료를 낸 의도는 차치하고, ‘세도’와 ‘관료주의’ 척결을 강조하는 자리에서 보인 장성택의 행동이 북한의 당 조직지도부나 국가안전보위부 등의 기관에서 볼 때 곱게 받아들일 사안은 아니었다.

장성택의 첫 번째 현실적인 위기는 5월에 찾아왔다. 장성택은 올해 5월 13일 김정은 제1위원장의 인민내무군협주단 공연 관람 이후 6월 10일 평양국제축구학교 시찰에 동행할 때까지 한 달여 간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판결문에는 “장성택은 석탄을 비롯한 귀중한 지하자원을 망탕 팔아먹도록 하여 심복들이 거간군들에게 속아 많은 빚을 지게 만들고 지난 5월 그 빚을 갚는다고 하면서 라선경제무역지대의 토지를 50년 기한으로 외국에 팔아먹는 매국행위도 서슴지 않았다”라고 지적돼 있다. 5월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겨레얼통일연대’ 장세율 대표(군 출신 탈북자)는 최근 <중앙일보>와 인터뷰 이렇게 말했다.
“2011년 4월 김정은이 장성택을 국방위 부위원장으로 승격시키면서 총정치국 산하 54부를 맡게 했다. 겉은 무역회사지만 실제론 인민군의 석탄.연료.피복.목재.생활필수품 등을 공급하는 회사다. 장성택은 54부 부장(사장)에 장수길 행정부 부부장을 임명하고 기존 간부들은 그대로 남겼다. 그런데 장성택 주변에 이용하 노동당 행정부 제1부부장, 장수길 행정부 부부장, 54부 당비서, 인민보안부 정치부장으로 4인방이 만들어졌다는 말이 퍼졌다. 그중 54부 당비서가 끄나풀이 돼 장성택의 모든 것을 비밀리에 총정치국에 전했다.”
현재로서는 확인하기 어려운 전언이다.

그런데 맥락이 비슷한 다른 전언이 또 있다.
“올해 들어 김정은 제1위원장은 마식령스키장 건설에 큰 관심을 보였는데, 여기에 들어가는 자금을 장수길 부부장이 관할하는 무역회사에서 중국 기업으로부터 조달했다. 그런데 약속한 기일이 돼도 빌린 자금을 갚지 않자 중국기업이 북한 당국에 상환을 요구했다. 문제는 장수길이 빌렸다고 한 금액과 중국기업이 요구한 금액 사이에 큰 차이가 있었다는 점이다.”

두 전언의 내용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장수길이 운영하는 무역회사의 자금에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당 행정부 간부들에 대한 내사가 이때 시작됐다고 한다.그러나 총정치국이나 국가안전보위부의 당 행정부에 대한 검열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듯하다.  “제놈(장성택)이 있던 부서를 그 누구도 다치지 못하는 《소왕국》으로 만들어놓았다”라는 판결문의 지적이 이를 시사한다.
최근 나온 또 다른 전언 역시 54국 산하로 세계 곳곳에 산재해 있는 해당화 식당에서 발생한 이익을 별도로 관리하다 적발됐다는 것이다.

6월에 들어 북한은 ‘당의 유일사상 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을 39년 만에 개정하면서 다시 ‘분파주의’에 대해 경고를 했다. 개정된 10대 원칙 6조 4항에는 “개별적 간부들의 직권에 눌리어 맹종맹동하거나 비원칙적으로 행동하는 현상을 없애야 한다”는 내용과 함께 기존의 “당의 통일단결을 파괴하고 좀먹는 종파주의, 지방주의, 가족주의를 비롯한 온갖 반당적 요소에 반대하여 견결히 투쟁하여야 한다”는 내용에 ‘동상이몽, 양봉음위하는 현상’을 추가했다. 또한 2조의 “금수산태양궁전을 영원한 성지로 꾸리고 결사 보위한다”, 3조의 “백두산 위인들(김씨 일가)의 초상화, 동상, 영상을 담은 작품, 말씀판 등은 정중히 모시고 철저히 보위하여야 한다” 등 수령 우상화물에 대한 내용도 추가하거나 개정했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때 추가된 내용들이 모두 장성택의 죄목으로 거론됐다. 판결문에는 ‘당의 유일사상 체계 확립의 10대 원칙’ 제3조 위반과 관련 “(장성택은) 무엄하게도 대동강타일공장에 위대한 대원수님들의 모자이크영상작품과 현지지도사적비를 모시는 사업을 가로막았을 뿐아니라 경애하는 원수님께서 조선인민내무군 군부대에 보내주신 친필서한을 천연화강석에 새겨 부대 지휘부청사 앞에 정중히 모시자는 장병들의 일치한 의견을 묵살하던 끝에 마지못해 그늘진 한쪽구석에 건립하게 내리먹이는 망동을 부렸다”라고 지적돼 있다.

3개월 후인 8월 말 또 다른 대형악재가 터졌다. 8월 28일 김일성경기장에서 김정은 제1위원장이 직접 관람한 ‘횃불컵’ 1급 남자축구 인민군 ‘4.25팀’과 결승경기가 며칠 후 부정선수를 출전시켰다며 선봉팀의 우승 기록을 박탈하고 4.25팀을 우승팀으로 조정한 것이다. 북한의 체제 속성상 당연히 ‘정치적 문제’로 비화될 수 있는 사안이었다. 국가체육지도위원장이었던 장성택의 입장에서도 난처한 상황이 됐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때까지는 장성택의 위상에 큰 변화가 감지되지 않았다.

그러나 11월 측근들의 모임에서 장성택을 ‘1번동지’라고 지칭한 것이 파악되면서 장성택과 측근인사들이 체포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판결문에는 “장성택이 제놈에 대한 환상과 우상화를 조장시키려고 끈질기게 책동한 결과 놈이 있던 부서와 산하기관의 아첨분자, 추종분자들은 장성택을 《1번동지》라고 춰주며 어떻게 하나 잘 보이기 위해 당의 지시도 거역하는데까지 이르렀다. 장성택은 부서와 대상기관에 당의 방침보다도 제놈의 말을 더 중시하고 받아무는 이질적인 사업체계를 세워놓음으로써 심복졸개들과 추종자들이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명령에 불복하는 반혁명적인 행위를 서슴없이 감행하게 하였다”라고 지적돼 있다.

장성택의 측근들이 실제로 ‘1번동지’라는 말을 했는지, 언제, 어떤 상황에서 이런 말이 나왔는지는 불확실하다. 다만 ‘1번동지’란 말이 ‘반당반혁명종파행위’에서 ‘국가전복음모’로 확대돼 장성택이 사형당하는 결정적 빌미가 된 것은 확실한 것 같다.

판결문에는 “정권야욕에 미쳐 분별을 잃고 날뛰던 나머지 군대를 동원하면 정변을 성사시킬수 있을 것이라고 어리석게 타산하면서 인민군대에까지 마수를 뻗치려고 집요하게 책동하였다”라고 적시돼 있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확인되지 않는다.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 것은 올해 들어 계속적으로 간부의 ‘세도와 관료주의’가 제기되고, 자신에 대한 ‘검열의 경고음’이 울리는데도 장성택이 왜 주변정리를 확실히 하지 않았냐는 점이다. 판결문에서 지적한 것처럼 “오래 전부터 품고있던 정권야욕”이 ‘2인자의 자리’에 확고히 서자 그대로 표출된 것일까? 아니면 세포비서대회에서 “세도와 관료주의는 단순히 일군들의 성격상문제나 사업작풍상의 문제가 아니라 사상상의 문제”라고 지적된 것처럼 ‘사상의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김정은체제의 공고화로 귀결될 것

일각에서는 장성택이 중국을 믿고 있었다는 추론을 내놓기도 한다. 판결문에 나와 있는  “장성택은 비렬한 방법으로 권력을 탈취한 후 외부세계에 《개혁가》로 인식된 제놈의 추악한 몰골을 리용하여 짧은 기간에 《신정권》이 외국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어리석게 망상하였다”라는 대목이 근거다. 역시 현재로서는 확인하기 어려운 추론이다.

사실 지난해 경제사업에 대한 내각의 ‘통일적 지도’를 강조하며 ‘내각책임제’ 확립을 추진한 김정은 제1위원장의 방침에 소극적 태도를 보여 해임된 리영호 전 인민군 총참모장처럼 장성택 숙청도 첫 출발은 당 행정부가 관할하던 무역회사와 자금의 내각으로의 이관문제에서 비롯됐을 수도 있다. 정치국 결정서는 ‘장성택 일당’이 “교묘한 방법으로 나라의 경제발전과 인민생활 향상에서 주요한 몫을 담당한 부문과 단위들을 걷어쥐고 내각을 비롯한 경제지도기관들이 자기 역할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실제로 당 행정부가 내각이 관장하도록 한 ‘부문과 단위’를 계속 놓지 않고 이권을 챙겼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당 행정부가 벌어들인 자금이 경제건설에 쓰였기 때문에 자금 마련과정에서 자원을 헐값으로 판 행위, 광산개발권을 투자대가로 넘긴 행위, 라선특구의 토지를 넘긴 행위 등과 장성택의 과거 행적과 부정부패 등은 어쩌면 군더더기에 불과할 수도 있다. 장성택이 ‘혁명화 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마무리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의 유일사상 체계 확립의 10대 원칙’ 위배, ‘최고사령관 명령에 불복하는 반혁명적인 행위’, 장성택을 ‘1번동지’라고 지칭한 행위 등이 조직지도부와 국가안전부의 ‘합동검열보고서’에서 거론되는 순간 김정은 제1위원장의 유일영도체계가 공고화되는 조건에서 장성택도 최악의 상황을 피해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오랫동안 몸을 낮추고 이른바 ‘2인자’의 자리에 있었던 장성택이 이 같은 상황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점이 이상할 정도다.

12월 8일 당 정치국 확대회의 이후 북한은 다시 평상을 되찾았다. 국내외 언론에서는 북한의 특정인사를 장성택의 측근이라고 거론하며 줄줄이 체포될 것이라고 보도하고, 일부 인사가 이미 망명했다고 거론했다. 그러나 거론된 인사의 대다수가 13일 사망한 김국태 당검열위원장의 장례위원회 명단에 올라 건재를 확인했다. 2004년 장성택과 관련 간부들이 ‘분파행위’로 2년 간 ‘혁명화 과정’을 거치면서 밖에서 거론하는 ‘장성택라인’은 사실상 해체됐던 것이다. 판결문에서 명시된 당 행정부와 산하기관의 ‘아첨분자, 추종분자들’은 이미 체포됐을 것이다.

한 고위탈북자는 “"북한에서도 일정한 직위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이런저런 연줄이 작용한다. 그러나 중앙당 과장급 이상부터는 철저하게 실력이 있어야 승진할 수 있다. 유력한 실력자에게 줄을 대거나 누구 누구의 사람이라고 불리는 것은 거의 자살행위에 가깝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노동당 중앙당 과장급 이상의 간부 중에서 장성택사건과 직접 관련돼 정치적으로 문제가 되는 사람은 국내 전문가나 언론의 예상보다 훨씬 적을 것이다.

또한 당 행정부가 해체된 후 힘이 실리게 된 내각 주도로 경제관리개선 조치와 경제특구(개발구) 확대 정책도 안정적으로 진행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장성택사건을 계기로 세포비서대회에서 강조된 “중앙당과 도,시, 군당, 초급당조직들은 물론 당세포들에서도 세도, 관료주의와의 투쟁”이 강도 높게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과거 1956년의 ‘8월종파사건’이나 1967년의 ‘박금철.이효순의 반당반혁명사건’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김정은체제의 불안정성보다는 공고화로 귀결된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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