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장성택 전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 처형됐다. 지난 3일 국가정보원이 '장성택 실각설'을 발표한 이후, 수많은 언론들은 장성택의 숙청을 두고 '왜?'라는 질문, '설이 맞느냐'를 두고 분석기사를 쏟아냈다.

거기에 이 시점에 국정원이 '왜 장성택 실각설을 유포했느냐'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북한이 9일 당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장성택을 '반당, 반혁명, 종파행위'를 이유로 숙청했음을 밝히고, 뒤이어 13일 특별군사재판을 통해 처형했음을 공식 발표해 '설'은 '사실'로 바뀌었다.

일단 국정원이 장성택 실각 첩보를 정확하게 입수하고 공개한 데 대해 '선방했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지난 대선개입 사건으로 십자포화를 받아온 국정원이 대북 정보수집력이 약하다는 비판을 일거에 불식시켰기 때문이다.

국정원의 SNS 댓글만도 못한 언론의 대북 '자본주의 날라리 풍' 글쓰기

장성택의 죄명이 무엇이든 일단 장성택은 처형됐다. 문제는 우리 언론의 여전한 대북 보도 행태다.

처형의 이유를 분석하고 향후 북한의 행보, 남북관계 방향을 진단하고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려야 할 언론은 '통속소설'에 '자본주의 날라리 풍'의 글들을 써대기 시작했다. 비난을 한몸으로 받아온 국정원의 SNS 댓글만도 못한 글쓰기인 셈이다.

그 일례가 바로 '장성택과 리설주 성추문설'이다.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를 수 있지만, 고모부와 처조카 부인의 성추문이라는 삼류드라마에도 등장하지 않는 '음란물'을 기사로 쓰는 것은 경악할 일이다.

상상하는 것과 상상을 내뱉는 행위는 다르다. 머릿속으로는 무엇을 상상하지 못하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랫도리 이야기', '박근혜 대통령과 최태민 목사가 그렇고 그런 사이' 등등 머릿속으로는 무슨 상상을 해도 그만이다.

하지만 상상을 내뱉는 순간. 책임은 내뱉은 사람이 져야 한다. 기자는 정보를 수집하고 확인을 거쳐 '팩트'(fact)로 인정된다는 공통분모가 형성될 때 글로 써야 한다. 정보 차원도 아닌 첩보와 설을 있는 그대로 믿고 신문.방송.인터넷에 올리기 시작하는 순간 기자가 아닌 소설가가 된다.

그렇기에 '성추문설'을 마치 사실인 양, 유포의 진원지가 언론이라는 점은 수치다. 성 문제에 집착하는 황색언론과 이를 다루고 내뱉는 주요 언론은 초록이 동색이다. '김본좌'가 기자로 둔갑했다.

장성택 처형과 함께 또 다른 소설이 난무했다. 바로 북한 핵심 인사의 망명설이다. 장성택이 북한의 권력 2인자라는 인식 때문일까. 그와 관련된 인물들의 북한 탈출 러시 가능성이 주목받았다.

그 중 압권은 한 종편이 '단독'이라며 대대적으로 보도한 '로두철 내각 부총리 중국 망명'이다. 하지만 불과 며칠 지나지 않아 북한 김국태 당 검열위원회 위원장 사망 국가장의위원회 명단에 로두철의 이름이 올랐다.

제 아무리 특종으로 이름을 알리고 싶어하는 기자라지만,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내용을 특종인 양 날린 기자는 거짓말쟁이에 불과하다. 시끌벅적하게 단독이라며 커다란 자막으로 로두철 망명 허위사실을 유포한 언론사가 해당 기자를 제명했다거나 사과방송을 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수치다.

제 눈의 대들보는 보지 못하고 상대방의 티끌만 보는 언론 행태

장성택 처형이 보여준 북한이 공포정치를 시작했다는 보도도 마찬가지다. '공포'를 어떻게 볼 것인가? '공포'란 무엇이 가져오는 느낌인가. '공포'의 느낌도 상대적이지 않을까.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정은 제1위원장을 근거리에서 보좌하던 인물이 일순간에 끌려나가는 장면과 처형됐다는 소식은 일단 무섭지 않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북한에서 발생한 종파사건은 대대적으로 보도된 적이 없다. 이번은 이례적이다. 이례적이라고 공포를 조성하려 했다고 할 수는 없다. 김정은 체제 들어, 북한의 중요 행사와 사건은 당일 혹은 이튿날 보도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베일에 가려졌다고 평가받는 나라가 베일의 장막을 걷고 공개적이고 투명하게 자신들의 내부를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난 축구경기 부정사건도 그렇고, 이번 장성택 처형사건도 그러한 맥락인 셈이다.

그래도 이 자체를 공포라고 한다면 상대적 감정이지 않을까. 북한은 장성택 처형을 즉시, 공개적으로 알림으로써 북한 내부 단속을 하고 있다. 외부의 시선에서 그것은 공포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공포정치가 진행되고 있지 않은가. 철도 민영화에 반대한 철도 노조원들이 직위해제됐다. 국가기관 대선개입을 지적했다고 종북이라 매도당한다. 이는 파업을 해서는 안 되고, 국가기관의 행위에 반대하지 말라는 공포정치 아닐까?

우리 안의 공포는 외면하고 상대적인 공포를 비난하는 보도는 형평성에 맞다고 할 수 없다. 제 눈의 대들보는 보지 못하고 상대방의 티끌만 보는 훈계성 보도는 북한을 다루는 기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안타까움이다.

'안녕들 하지 못한' 현실 속에서 품격있는 기사까지 바라지는 않는다. 아침 식탁에 올라오는 신문이 나의 밥상을 더럽히지 않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반성한다. 나는 과연 상쾌한 아침 공기를 글로 더럽히지 않았는가 돌이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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