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왕모(西王母)는 신성한 곤륜산에 산다는 여신이다.
요지(瑤池)는 서왕모가 사는 궁전 왼쪽에 있는 아름다운 연못을 말한다.
요지연도(瑤池宴圖)는 서왕모가 주나라 목왕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또한 그림에는 연회에 초대받은 불보살과 여러 신선들이 바다를 건너오는 모습도 함께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의 시대적 배경은 상고시대이다. 목왕은 기원전 1100년 무렵에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탄생한 주(周)나라의 5대 임금이다.
주(周)나라는 강태공과 같은 좋은 인재를 많이 등용하여 태평성대를 이룬 나라였다고 전해진다.

▲ 요지연도/8폭병풍/조선시대/경기도박물관 소재. [자료사진 - 심규섭]

요지연도(瑤池宴圖)는 신화의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한 ‘신화그림’이다.
중국의 옛 문헌인『죽서기년 竹書紀年』과『목천자전 穆天子傳』에 실린 서왕모와 주목왕(周穆王)의 연회에 군선(群仙)들이 초대되어 가는 이야기가 결합된 고사에 연원을 둔 것이다.
우리그림에서 신화의 내용을 이렇게 구체적인 형상을 통해 표현한 그림은 요지연도 밖에는 없다. 그림 속에는 다양한 인물과 동물, 식물 따위가 뒤섞이면서 웅장한 화면이 연출되고 있다.
서왕모라는 여신과 인간이 만나는 그 연회장은 마치 이상세계, 태평성대의 세상처럼 표현되어 있다.
서왕모는 그 이름처럼 여신이다. 중국에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에 묘사된 서왕모는 절세미인이거나 혹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표범의 꼬리와 호랑이의 이빨을 가진 괴물로 표현된다. 이렇게 좋거나 나쁜 모습으로 동시에 묘사되어 있는 것은 서왕모가 여신이기 때문이다.
옛 신화에는 여신의 시대에서 남신의 시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여신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흔하다.

요지연도에 나오는 사람들의 복장이나 머리모양을 보면 중국인의 모습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 주나라 사람들이 어떤 옷과 머리모양을 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단지 명.청 시기에 요지연도가 그려지다 보니 그 당대의 풍속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조선 말기에 그려진 요지연도에는 악기를 연주하거나 춤을 추는 무희가 나오는데 고구려 복장의 특징인 물방울무늬의 옷이 등장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주나라, 목왕, 서왕모가 나오는 요지연도가 우리 민족과는 별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고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하지만 주나라는 기원전 1000년 이전의 나라이고 특별한 민족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민족이란 개념도 존재하지 않았다.
주나라는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건국한 나라로 동이족이 세운 나라이다.
결국 중국대륙을 중심으로 주변 나라와 민족들의 공통적인 신화인 셈이다.
서왕모는 민족 신이 아니다. 남신과 달리 여신은 특정한 민족과 결합되어 있지 않다.
서왕모는 보편적 신에 가깝다.
그러니까 대륙의 특정 나라나 민족을 대표하는 그림이 아니라 보편적 동양의 정서가 들어가 있는 그림이라는 말이다.
그리스로마문명에서 많은 유적지가 그리스에 남아있다고 해서 현존하는 그리스만의 문명은 아니다. 유럽 전체, 심지어는 미국까지 포함한 서구문명의 뿌리인 것이다.

이런 요지연도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기는 대략 조선 말기라고 추측한다. 현재 남아있는 대부분의 요지연도는 18세기 전후로 그려진 것이다.
삼국시대나 고려는 불교라는 종교를 지배이념으로 삼았지만 조선은 주자성리학을 지배사상으로 삼아 발전한 나라이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불교가 인기를 얻고 있었지만 선비들은 종교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다.
선비들은 종교적 덕목 대신에 엄격한 예법으로 사회적 덕목을 만들고 이상적인 세상을 구현하고자 했다.
이런 선비문화가 건재하고 있는 시기에 요지연도가 수용된 배경에는 여러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요지연도가 태평성대의 세계를 보여주는 그림이기는 하다.
하지만 서왕모라는 신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그려지는 것은 선비들의 정서상 수용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신이 구체적 형상을 가지게 되면 곧바로 우상화가 이루어지고 구복(求福)신앙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
백성들은 미륵불 따위를 만들고 숭배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선비들은 학문을 가장 높은 가치로 여겼다. 공자나 맹자의 위패와 사당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는 것은 학문에 대한 숭배였지 개인에 대한 숭배는 아니었다.
서왕모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을 궁중에 들이는 과정에서 수많이 논쟁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요지연도는 단일 그림도 있고 8폭, 10폭 병풍으로도 그려진다.
물론 신화를 그림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미술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상상의 바탕이 된 기본 그림은 청나라에 수입되었을 것이다.
비단에 진채물감을 사용하고 최대 5m에 이르는 대작인 것을 감안할 때, 최고 수준의 궁중화원이 조직적으로 창작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요지연도에는 자연물인 바다와 산, 바위, 구름, 나무, 풀 꽃, 학, 봉황, 공작, 사슴, 거북, 호랑이, 말, 소와 같은 소재와 연회장의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한 각종 기물, 그리고 이런 자연물, 기물과 결합한 다양한 군상의 인물이 표현되어 있다.
하나의 그림에 이렇게 다양한 요소를 결합시키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리기도 아주 까다롭고 제작하는 비용도 엄청났을 것이다.
그럼에도 요지연도는 궁중에 필요한 수를 훌쩍 넘어서 상당히 많은 작품이 그려졌다.
그것은 돈과 권력을 가진 부자나 양반들의 수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청나라는 훈고학이 유행하고 조선도 영향을 받아 추사 김정희 금석학 따위가 발전한다. 이 과정에서 과거의 서책이나 물건, 즉 골동품을 모으는 일이 양반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
요지연도는 상고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훈고학 열풍에 잘 부합되었던 측면도 있었다. 또한 선비들의 엄격한 예법이 무너지면서 새로운 가치를 찾으려는 시대적 욕구가 서왕모, 신선 따위에 연결되기도 했을 것이다.

아무튼 신화를 담은 요지연도를 해석하는 핵심적인 기준은 바로 장생도이다.
장생도의 내용은 ‘생명력이 풍부한 이상세계’이다.
이러한 내용을 드러내기 위해 장생도에는 자연의 삼라만상의 상징들로 채워져 있다.
정조 때 도화서 화원들에 의해 그려진 요지연도를 보면 장생도와 비슷한 요소가 대거 등장한다. 학과 봉황, 거북, 사슴, 영지, 복숭아나무, 소나무 따위는 모두 장생도의 요소이다. 또한 표현 방식도 장생도와 흡사하다.
특히 호랑이를 탄 신선의 모습은 중국풍의 요지연도가 조선식으로 변주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장생도의 동물들은 하늘과 땅, 땅과 하늘, 바다와 땅을 연결하는 매개자로서의 역할이 주어졌다.
사람이 만드는 이상세계는 인간사회의 독자성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인간의 삶 자체가 자연과 붙어있기도 하고 이상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어야 인간사회를 통합하고 미래의 가치를 구현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측면 때문에 인간의 이상세계는 곧 하늘의 가치와 동일해야 한다.
태평성대는 인간만의 의지가 아니라 하늘이 허락하고 공명해야 구현이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조선시대 왕과 선비들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뜻을 물었다.

서왕모는 인간의 모습을 한 신이다.
서왕모가 군왕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푼다는 것은 신과 인간의 정치가 연결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연회의 자리에는 인간을 돕는 수많은 신선들도 함께 초대되었다.
연회에는 태평성대를 뜻하는 봉황이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이 나온다.
하늘과 인간이 연결된 곳이 곧 태평성대, 이화세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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