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생도에는 두루미, 사슴, 거북이가 나온다. 두루미는 하늘짐승, 사슴은 뭍짐승, 거북은 물짐승을 대표하는 상징적 동물이다. [자료사진 - 심규섭]
두루미는 날짐승을 대표하고 사슴은 뭍짐승을, 그리고 거북이는 물짐승을 대표하는 동물이다. 그래서 해와 하늘과 산, 구름, 바다(물), 소나무 따위의 자연물과 더불어 온 세상, 이상세계를 표현하고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장생도는 ‘생명력이 풍부한 이상세계’를 표현한 그림이지만 그 안에는 현실과 크게 동떨어지지 않은 요소들로 채워져 있다.
용이나 해태, 기린, 봉황 따위의 상상의 동물이 아니라 현실에 살고 있는 동물을 바탕으로 했다.
그러나 장생도는 현실세계가 아니라 추구해야할 이상세계를 담은 그림이므로, 당연히 그 안의 동물들 또한 이상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이상세계를 표현할 때 현실과의 차이가 너무 크게 나면 이룰 수 없는 꿈, 갈 수 없는 곳이 된다. 반대로 현실과 너무 가까우면 꿈을 잃어버리게 된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런 세계를 표현해야 하는 것이다.
그림 속의 동물들은 실제 모습과 비슷하게 그려 현실감을 살렸지만 생태적 특성에 따른 상징을 사용하여 현실을 넘어선 이상적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다.
1. 두루미
두루미는 순수 우리말이고 한자로는 학(鶴)이라고 한다.
키가 140cm 정도의 대형 조류이며 안면의 일부와 꼬리는 검은색이고 나머지는 모두 흰색이다. 두루미는 어패류나 풀씨 따위를 먹는 잡식성이고 겨울에 한반도 지역에서 겨울을 나는 철새이다.
이런 철새가 어떻게 하늘짐승을 대표하는 동물이 되었을까?
두루미는 상당히 큰 덩치를 가지고 있지만 맹금류가 아니다. 또한 유난히 긴 목과 부리를 가지고 있다. 두루미는 다른 새에 비해 눈에 띄는 외형적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무엇보다 하얀색 몸통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목 부분과 꼬리의 검정색은 색상대비에 의해 몸통의 하얀색을 더욱 부각시키는 역할을 한다.

좌, 우측 위-고구려 고분벽화에 나오는 두루미의 모습. 천인이 두루미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다. 우측 아래-중국신화에 나오는 서왕모를 만나는 그림인 ‘요지연도’에 나오는 두루미의 모습인데 신령과 동자(童子)가 타고 있다.
우측 아래 옆-민화에 나오는 두루미의 모습인데 선녀가 피리를 불면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그렸다. [자료사진 - 심규섭]
하얀색 옷을 즐겨 입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것보다는 태양을 숭상하고 따르는 민족의 기질을 표현한 것이리라.
원래 면화에서 뽑은 광목은 누런색이다. 이렇게 누렇고 뻣뻣한 옷을 잿물을 이용해 삶거나 자주 빨다보면 탈색이 되어 하얗게 변한다. 흰색의 옷은 때가 잘 타고, 잘 보여 자주 세탁을 해야 한다. 자주 세탁을 하다보면 옷이 빨리 망가져 버린다. 이런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조선시대나 일제 강점기에는 백성들에게 색깔이 들어간 옷을 입도록 권장했다.
실제 백제의 백성들은 청색 옷을 즐겨 입었다고 하고,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오는 사람들의 복식을 보면 다양한 색상의 옷이 등장한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관혼상제와 같은 예식에는 화려한 색의 옷을 입었고 양반이나 관리들도 등급에 맞는 색상의 옷을 입었다. 조선시대 백성들이 흰 옷을 입은 것은 염색기술이 부족하거나 색상을 좋아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잿물을 이용해 광목의 옷을 삶아 세탁하면 면이 부드러워지고 눈부시게 하얀 옷이 된다는 편리성 때문이었다.
한반도에서 백두산(白頭山)은 신령스런 산으로 추앙된다. 백두산을 해석하면 ‘흰 머리 산’이 되는데 산꼭대기에 눈이 쌓여 있는 형상을 따라 표현한 말이기도 하지만 그 안에는 흰색에 대한 상징이 붙어있다.
흰색은 태양을 상징하는데 우리그림에서 태양은 하얀색 또는 빨간색으로 표현한다.
백두산을 단순히 높은 산이 아니라 하늘의 뜻, 태양의 기운을 가진 신령한 산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백호나 백록, 백사(白蛇), 하얀 소처럼 하얀색의 동물을 신성하게 여기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단지 피부 색소가 부족한 데 따른 기형이지만 하늘의 색인 흰색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신성한 동물로 여겼다.
한라산 정상에 있는 연못을 백록담(白鹿潭)이라고 하는데 역시 하얀색이 들어있다.
또한 흰색은 늙은이를 상징하는 색이기도 하다.
예전의 늙은이는 지혜와 경험을 가진 사람으로 추앙받았다. 또한 인간의 평균수명을 훌쩍 넘겨 생존하는 늙은이는 경외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이상세계에 산다는 신선이나 산신령은 모두 백발과 하얀 수염을 가진 늙은이로 표현된다.
백발과 하얀색 수염을 기른 산신령은 하얀색 호랑이, 하얀색 두루미, 하얀색 사슴을 타고 다닌다.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두루미를 타고 있는 신선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장생도는 삼국시대부터 그려졌고, 그 당시 흰색의 두루미는 신성한 동물의 상징이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니까 흰색은 ‘하늘과 태양, 신령한 동물, 이상세계, 지혜와 경륜’을 상징하는 것이다.
흰색을 신성하게 여기는 우리민족의 정서는 두루미에게 하늘과 땅을 연결시키는 매개자 역할을 맡겼다.
두루미가 천년을 살면 몸의 색깔이 청색으로 바뀌어 ‘청학’이 된다고 한다. 지리산 어느 구석에 있는 청학동은 두루미의 신령스런 상징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또한 천년의 수명을 가진 청학이 다시 천년을 살면 검은색(玄鶴)으로 바뀐다는 전설도 있다.
후기에 그려진 장생도에는 청색의 두루미, 금색의 두루미가 나온다. 두루미를 더욱 신령스럽게 만들고자 하는 표현이다.
선비들은 두루미를 좋아해서 앞마당에 풀어 키웠다는 기록도 있다. 또한 문인 관복의 흉배에 두루미를 새겨 넣기도 하였다. 관복에 두루미를 새겨 넣은 것은 ‘이상세계를 구현하는 자’의 역할을 가졌다는 의미이고 동시에 선비들의 존재가치를 규정하는 상징이다.
이 모든 것은 두루미의 흰색에서 출발하여 변주된 상징들이다.
2. 사슴
장생도에는 뭍짐승을 대표하는 동물로 사슴이 등장한다.
우리나라에는 사향노루, 고라니, 대륙사슴, 백두산사슴 따위가 서식한다고 알려져 있다.
사슴은 초식동물이고 소나 말에 비해 크기가 작지만 다른 육지동물보다는 평균적으로 큰 편이다.

좌측 위-신라 금관과 사슴뿔의 관계를 보여주는 연구결과가 있다.
좌측 아래, 우측-신선그림에 나오는 사슴의 모습이다. 커다란 뿔을 가진 사슴은 신선의 또 다른 모습이다. 김홍도와 양송당(養松堂) 김시의 작품이다. [자료사진 - 심규섭]
사슴의 커다란 뿔은 나무의 상징으로 보았다.
여기서 나무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우주목(宇宙木)을 뜻한다.
동물의 머리에 나무를 연상시키는 커다란 뿔에 달려있는 것 자체가 신령스러웠을 것이다.
신라시대 출(出)자 형태의 금관은 우주나무를 뜻하고 그 형상은 사슴뿔에서 나왔을 것이란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러니까 금관을 쓴 왕이나 부족장은 머리에 우주나무가 연결되어 있다는 상징이고 이는 곧 하늘과 소통하는 자, 하늘의 권능을 받은 자 따위로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큰 뿔을 가진 사슴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성하게 여겨졌다.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신선도(神仙圖)에는 큰 뿔을 가진 사슴이 등장한다. 일본 애니메이션 ‘원령공주’, 할리우드 영화의 ‘백설공주’의 변주 판, ‘반지의 제왕’ 후속편인 <호빗-뜻밖의 여정>이라는 영화에서도 큰 뿔을 가진 사슴이 나온다. 모두 신령한 존재로 표현된다. 또한 비록 상업적인 요소가 강하지만 산타클로스의 썰매를 끄는 사슴도 모두 크고 아름다운 뿔을 가지고 있다.
한라산의 정상이 있는 못의 이름은 ‘백록담’이다. 이것을 해석하면 ‘하얀 사슴이 내려와 노닌 깊은 연못’이 된다. 산신령과 흰 사슴에 관한 전설 때문에 ‘백록담’이란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사슴은 나무를 닮은 크고 아름다운 뿔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신령한 존재가 되었다. 사슴의 뿔은 단순히 몸에 좋은 ‘녹용’이 아니라 우주나무의 상징이다.
하늘과 땅(인간)을 연결하는 우주나무를 머리에 달고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땅의 동물 중에서 사슴에 뭍짐승을 대표하게 된 것이다.
3. 거북
거북이가 물짐승을 대표하게 된 것은 의외이다.
거북이는 물고기가 아니라 파충류이다. 물론 알은 육지에서 낳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물에서 보낸다. 거북이의 잠수시간은 대략 40분 전후로 아주 길다.
덩치가 큰 상어, 고래, 명태, 고등어와 같은 다양한 어종을 제치고 거북이가 선택된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우측-민화에 나오는 거북의 모습인데 신령한 기운을 뿜고 있다. 그 위에는 생황을 부는 어린 신령이 타고 있다.
좌측 아래- ‘토끼와 거북’이란 우화 속에 나오는 거북이의 모습은 삼국시대에 만들어졌다. 여기서 거북은 물과 땅을 연결시키는 매개자 역할을 한다. [자료사진 - 심규섭]
인터넷에 거북에 관련한 자료를 찾아보니 여러 내용이 나온다.
거북은 오래 산다는 의미에서 용이나 봉황과 함께 상서로운 동물로서 인식되었다. 그리하여 집을 짓고 상량(上樑)할 때 대들보에 ‘하룡(河龍)’.‘해귀(海龜)’라는 문자를 써넣었다. 또 귀뉴(龜紐)라 하여 손잡이 부분에 거북의 모양을 새긴 인장을 사용하였고, 귀부(龜趺)라 하여 거북 모양으로 만든 비석의 받침돌도 사용되었다. 또한 동작이 느린 동물로서 많은 이야기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구지가 龜旨歌>라는 노래가 한역되어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거북은 가락국의 시조인 수로왕(首露王)을 드러내게 하는 동물로 등장한다. 또한 ≪삼국유사≫ 수로부인조(水路夫人條)에도 <해가사 海歌詞>라는 노래가 들어 있는데, 이 노래에도 거북은 바다로 납치된 수로부인을 나오도록 하는 동물로 나타난다. 이런 점에서 거북은 수신(水神)이나 주술매체 동물로서 고대 우리 민족에게 인식된 듯하다.
옛날 중국의 하(夏)나라의 우(禹)임금이 치수를 할 때 낙수(洛水)에서 나온 거북의 등에 마흔다섯 점의 글씨가 있었다고 하며, 이것이 ‘낙서(洛書)’라고 하는 바 ‘하도(河圖)’와 함께 ≪주역≫의 근본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중국의 초기문자인 갑골문(甲骨文)도 거북의 등에 기록된 것이며, 점을 칠 때 쓰였던 복사(卜辭)였다. 오늘날에도 ‘거북점’이라는 것이 있어 귀갑을 불에 태워서 그 갈라지는 금을 보고 길흉을 판단한다. 이처럼 거북은 신령스러운 동물로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양 일대에서 신성시하던 동물이었다.
거북에 관한 설화는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조(金庾信條)에 ‘귀토지설(龜兎之說)’이란 우화가 인용되어 있다. 이 설화에서 거북은 동해용왕 딸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토끼의 간을 얻으려고 육지에 나와 토끼를 업고 바다로 가다가 간을 두고 왔다는 토끼의 말에 속아 다시 토끼를 놓아주는 우둔한 동물로 나타난다.(하략)
[네이버 지식백과 거북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거북이의 생태적 특징은 물과 뭍에서 동시에 생활한다는 점이다.
물(바다) 속에서만 생활하는 물고기는 사람들에게 인식이 거의 불가능하다. 바다나 물속은 미지의 세계였다. 그래서 해룡(海龍)이나 용왕과 같은 상상의 존재가 바다를 대표했다.
그에 반해 거북이는 대부분의 시간을 물에서 생활하면서도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동물이다.
옛날 사람들에게 거북이가 폐나 아가미로 호흡하는 차이로 인한 구분은 별 의미가 없었다.
그러니까 폐로 호흡하는 파충류인 거북이를 물의 동물로 인식한 것이다.
무엇보다 거북이 가지고 있는 수륙양용(水陸兩用) 능력은 특별해서 경외의 대상이 되었다.
바로 이런 능력 때문에 사람들은 거북에게 물과 땅을 연결하는 매개자 역할을 부여했다.
‘귀토지설(龜兎之說)’ 혹은 ‘별주부전’에 나오는 거북이의 모습이 물과 땅을 연결하는 전형적인 상징이다.
장생도에 표현되어 있는 거북의 모습은 민물에서 사는 남생이(자라)처럼 보인다. 하지만 초기 장생도의 거북은 남생이인지 거북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고구려 벽화의 현무(玄武)처럼 상상의 동물로 표현되어 있다. 조선 말기에 그려진 장생도에는 바다 대신에 작은 강을 그리기도 하는데 여기에 나오는 거북은 거의 남생이에 가깝다. 바다거북은 보기가 쉽지 않고 포획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쉽게 접할 수 있는 남생이의 모습이 투영된 것이 아닐까 추정한다. 하지만 남생이든 거북이든 간에 입으로 신령스런 기운을 뿜고 있는 모습은 동일하다.
장생도에 나오는 동물 안에는 여러 가지 상징이 압축되어 있다. 고대 중국, 고구려 시대부터 전해지던 상징이 투영되기도 하고 조선시대에 새롭게 만들어진 내용이 더해지기도 했다. 그래서 각각의 동물들에 대한 정확한 상징을 추론하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장생도는 누구나 척 보면 알 수 있는 상징적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
장생도는 이상세계를 표현한 그림이고 이상세계는 하늘과 땅, 바다가 어우러지는 세상이다. 물론 그림에는 표현되어 있지 않지만 이상세계의 주인공은 사람이다.
땅은 인간의 영역이고 삶의 터전이다. 장생도의 동물들은 하늘과 인간, 물과 인간을 연결하는 매개자로서의 역할을 맡고 있다.
하늘의 뜻과 가치, 혹은 자연의 순리를 사람의 삶속에 담아내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인간은 짐승의 상태에서 벗어나 사회적 존재인 사람이 된다. 하늘의 가치와 사람의 가치가 결합되고 통일을 이룰 때 태평성대가 열리는 것이다.
하늘의 가치는 시대나 문화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는 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가치는 ‘생명’이고 그 생명의 확산과 발전일 수밖에 없다.
장생도의 생명사상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사람이 곧 하늘이고 만물이 하늘이다’라는 ‘인내천(人乃天)’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