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구 (전 동국대 교수)


▲ 강정구 전 동국대 교수가 21일 서울 서강대 동문회관에서 열린 안재구 선생의 『끝나지 않은 길』 출판기념회에서 서평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도형 객원기자]

먼저 선생님의 팔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아울러 통일의 그날까지 활동하셔 ‘끝나지 않은 길’을 ‘끝내버린 길’로 만들어 주시기 간절히 바랍니다. 저의 서평은 두 가지로 나눠서 하겠습니다. 하나는 책의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책의 특징입니다.

이 두 권의 책은 아직도 미완이긴 하지만 끝내 이룩해야만 하는 평화통일의 길을 걸어가시는 안재구 선생 일대기의 전사(前史)에 해당하는 자서전입니다. 1권의 이름은 ‘가짜 해방’이고, 2권은 ‘찢어진 산하’입니다.

책 이름이 말하듯이 이 시기는 역사적으로 해방, 분단, 전쟁으로 얼룩진 역사전환기였습니다. 역사가 근본적으로 변한 것을 말하죠. 또 이 시기에 택한 역사행로가 그 이후의 50~100년의 중기적 역사의 방향을 기본적으로 결정하는 결정적 시간대입니다. 따라서 이 전환기에 어떠한 주체가 형성되고 어떤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느냐가 그 이후 민족사의 골간을 형성하게 됩니다.

유감스럽게도 책 제목이 말하듯이 해방은 되었지만 진정한 해방은 이룩되지 못한 ‘가짜 해방’으로 끝나고, 조국은 남과 북으로 찢어지고 말았습니다. 역사의 근본이 바꿔지는 이 역사전환의 과정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엄청난 시련과 고통을 불가피하게 감내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안재구 선생님은 단순한 역사의 피동자로서 삶을 살아가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14살 어린 시절부터 적극적 역사 개척자로서 또 역사 주체로서, 역사와 맞부딪치면서 역사의 물줄기를 올곧게 이끌기 위해 자신의 삶을 바쳤던 것입니다.

독서회, 친일파 교장 반대, 자치회, 메이데이, 퇴학과 농성, 벽보, 함화, 7.27 미소공위재개 축하와 임시정부수립 촉구 인민대회, 소년선전대 활동, 2.7구국투쟁, 야산대, 유격대 무장투쟁 간부훈련 등 연속적인 투쟁의 현장과 함께 하면서 시련과 진통의 민족사와 정면으로 맞서 왔습니다.

비록 1952년 막바지에 이르러 자기를 끝까지 지킬 것으로 보았던 권총마저 버리고 이탈하고 말았지만, 이 실천 투쟁의 역사는 그로 하여금 다시 1976년 난민전의 전사로서, 이어 1994년 구국전위의 일꾼으로 부활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가진 이 책의 특징을 몇 가지로 요약해 보겠습니다.

첫째, 이 책은 개인 안재구의 개인사를 중심으로, 또 지역적으로 경상남도 밀양이라는 작은 지역을 중심으로 한 역사 서술입니다. 곧 작은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미시사적 역사입니다. 그렇지만 미시적 역사로 그치게 되면 전체 사회가 가는 방향과 미시사가 가는 방향이 서로 어떻게 결합되고 접목되는지 가늠이 가지 않아 총체적 모습을 놓치고 맙니다. 그렇지만 이 책은 거시사의 큰 흐름을 미시사적 현상과 행위에 연결함으로써 한반도라는 큰 역사의 흐름 속에 밀양과 청도, 언양 등의 작은 지역과 그 속의 개인 안재구의 실천투쟁의 미시사가 어떻게 체계적으로 결합되고 진행되어 가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거시사의 기반 위에 정교하게 다듬어진 미시사라는 방법론을 구사하는 표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끝나지 않은 길』 1권 표지. [사진제공 - 내일을여는책]
둘째, 민족의 운명이 좌우되는 역사 전환기에 지행합일(知行合一)을 하는 실천적 지성인으로서 표본적 삶을 보여 주는 책이기도 합니다. 14살 어린 나이에서부터 한결 같은 민족의 해방, 독립, 자주, 통일에 대한 일관된 신념과 지조를 이어나가면서 관념으로써가 아니라 실천으로써 이를 성취하겠다는 숭고한 행위와 뜻이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셋째, 이 책은 가계의 전통과 가풍, 또 지역적 특성이라는 게 우리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본인 안재구와 그 아들 안영민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친 ‘자주.평화.통일의 집’이라는 훌륭한 가풍이 확립되었습니다. 이게 어디 아닌 밤에 홍두깨 식으로 갑자기 나타날 수는 없죠. 할아버지로부터 집적된 고뇌, 실천, 시련, 발돋움 등 연속의 산물이라는 것으로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앞으로 5,6대를 더 이어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넷째, 안재구 선생님의 개인적인 천재성과 뛰어난 기억력을 재확인해 주는 책입니다. 밀양의 사투리며, 일가친척의 이름이며, 투쟁동지의 이름과 특징, 실천투쟁의 구체적 내용 등을 재생해 내는 것은 단지 기억력과 천재성만으로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14살부터 체질화한 민족에 대한 사랑과 투철한 사명의식이 지행합일의 실천적 삶 속에 녹아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밀성초등학교 최 우등상, 밀양중학교, 양잠학교 수석입학, 독학으로 교원자격 시험, ‘고등학교 3학년 입학 자격시험’, 수학의 미적분학 및 기하학 터득 등에서 보듯이 그의 천재성은 어릴 때부터 나타났습니다.

다섯째, 이 책을 읽으면서 저는 줄곧 ‘나 같았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과연 나라면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라는 자신에 대한 반문을 계속해 왔습니다. 나약한 지식인으로 벌써 이탈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졌습니다. 동시에 당사자인 안재구 성생님이 더욱 더 높이 보여 옷깃을 여미게 되었으며 나름대로 다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여섯째, 이 한반도를 이끌어갈 우리 젊은이들이 이 책을 꼭 한 번 읽고 어떤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게 올바른 삶인지를 깨닫게 하고 안 선생님의 삶을 하나의 사표로 삼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끝으로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읽고 앞으로 20~30년 이내 다가올 1630년대의 명.청 세력교체기와 같은 중.미 세력교체기를 맞아 광해임금의 자주중립정책을 일구어 세력교체기의 환란에 한반도가 휩싸이지 않고 평화통일의 역사행로를 일구어나가는 예지를 얻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인조반정 당시 서인 쿠데타 무리들의 존명사대로 인해 1636년의 병자호란이라는 민족 대재앙을 초래한 비극과 형극의 역사적 전철을 결코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이를 제대로 깨닫고 비동맹 중립화로 나아가는 역사의 주체로 승화해 나가길 간절히 바라고 요구합니다.

다시 한 번 이 땅을 책임질 우리 젊은이들이 중.미 세력교체기라는 역사의 소용돌이를 맞아 이 책을 읽고, 안재구 선생님을 귀감으로 삼아, 본인이 미시적 수준에서 무엇을 해서 거시적 수준의 큰 역사행로를 올바르게 이끌 것인지를 고뇌하고 실천해 나가 역사의 창조자로 우뚝 서 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고 절박합니다.

출판기념회 서평 발표문
2013년 11월21일, 서강대 동문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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