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현실 발전의 요구에 맞게 신용카드 보급과 관리운영 사업을 보다 원만히 전개해나가기 위한 경제실무적 및 법률적 대책들을 적절히 취해나감으로써 강성국가 건설을 더욱 다그쳐야 할 것이다.” 북한의 계간 학술지 <정치법률연구> 최신호가 자본주의 국가의 신용카드 거래 제도를 구체적으로 소개하면서 신용카드 보급을 위한 준비사업을 언급했다. 북한 당국이 앞으로 자체적으로 신용카드를 발행하거나 국제 신용카드의 사용점을 확대하려는 것으로 보여 주목된다.
외국인 대상 제한적으로 신용카드 사용 허용
북한에서 신용카드 사용은 1990년대부터 시작됐지만 외국인을 대상으로, 그것도 대단히 제한된 곳에서만 이뤄져 왔다.
▲ 2002년 8월 평양 만수대창작사 판매원이 달러를 받고 있다. 옆에 사용 가능한 신용카드의 종류가 제시돼 있다.
▲ 평양에서도 DHL 서비스가 가능하다. [자료사진 - 민족21]
2002년 8월 고려호텔에 갔을 때 신용카드 사용이 가능한 지 묻자 호텔봉사원은 “사용할 수 없다”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방문기간에 만수대창작사의 그림판매점을 가보니 ‘VISA’카드나 ‘MasterCard’, ‘JCB’카드를 사용할 수 있었고, DHL로 구매한 그림을 해외로 부칠 수도 있었다. 이곳의 판매원은 “1,000달러 이상의 고가 그림이 많아 그림을 구입하려는 손님들의 편의를 위해 신용카드를 사용할 수 있게 했고, 그림의 손상을 막기 위해 다른 나라까지 배달하는 봉사를 갖추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그림 판매수익을 높이기 위해 제한적으로 신용카드 사용을 허용한 것이다.
1년 뒤인 2003년 8월 다시 평양에 갔을 때 실제로 호텔에서 신용카드 사용이 불가능한지 확인해보기로 했다. 우선 체류기간 내내 커피숍, 카페 등에서 발생한 모든 개인비용을 방으로 달아놓았다. 그리고 체류 마지막날 개인비용을 정산할 때 현금이 없다고 버텼다. 곤란을 표정을 지으며 한참 동안 실랑이를 하던 호텔 직원이 마침내 구식 휴대용 신용카드단말기를 가지고 나와 결제를 했다. 한달 후 나온 신용카드 청구서에는 ‘보통강호텔’이라고 영문으로 찍혀 있었다.
당시 북한이 신용카드 사용을 꺼린 이유를 2가지로 추측해 봤다. 하나는 북한의 기업들이 하루, 한달 단위로 바로 바로 매출 결산이 이뤄지는 상황에서 후불로 청구되는 신용카드 사용은 상당히 복잡한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하나는 국제사회의 대북 경제제재가 일상화되어 있는 조건에서 혹시나 사후 결재가 이뤄지지 않을 것을 우려했던 것 같았다.
2005년에 첫 현금카드 발행
▲ 2005년 처음으로 발행된 현금카드의 기능과 가맹점을 홍보하는 안내문. [자료사진 - 민족21]
그러나 북한도 세계적 추세로 되어 있는 전자결제를 마냥 미룰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북한은 2005년 ‘실리’라는 이름의 IC현금카드를 처음으로 발행했다. 이 현금카드는 합영은행인 동북아시아은행이 발행한 것으로 은행에 돈을 미리 넣고, 가맹점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다. 2006년 5월 가맹점 중 하나인 평양 아리랑식당에 가보니 입구에 ‘우리나라에서 첫 현금카드 발행’이라는 제목으로 현금카드를 선전하는 광고문이 붙어 있었다.
“-현금의 보관기능 : 카드 한장으로 조선원과 유로, 일본엔, 중국원을 비롯하여 5-6가지 종류의 화폐를 입금 및 출금할 수 있습니다. -봉사지점에서 현금결제에 리용가능합니다.”
현금카드의 장점으로는 “카드를 리용하시면 봉사단위들에서 잔돈처리를 깨끗이 할 수 있습니다”, “은행을 경유하므로 위조화폐의 류통을 방지합니다”, “잔돈이나 현금지폐들을 가지고 다니지 않으므로 현금소유의 문화성이 보장됩니다”, “본인의 신분이 확인되면 임의의 시각에 요구하는 금액만큼 현금을 출금받고 카드의 잔액수를 줄여줍니다” 등이 적혀 있었다. 당시 가맹점은 평양호텔, 창광외국인숙소식당, 네거리상점 등 13개였다. 사실상 북한 주민보다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했다고 할 수 있다.
첫 현금카드 발행 후 5년이 지난 2010년 조선무역은행이 전자결제 카드인 ‘나래’를 발행하고, 다음해 고려은행이 ‘고려’카드를 발행하면서 북한에서는 본격적으로 현금카드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나래’카드를 사용할 수 있는 가맹점도 2년 만에 평양의 전 구역으로 확대돼 주요 호텔과 식당, 외화상점, 슈퍼마켓, 모든 손전화봉사소(휴대폰판매소) 등 120곳을 넘었다. ‘나래’카드는 대외결제은행 외화교환소에서 미화 3달러의 가입비(카드 발급비)를 내면 발급받을 수 있으며, 전국의 모든 외화 봉사단위들에서 상품과 용역에 대한 대금을 지불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
▲ ‘나래’카드 설명서, ‘나래’카드(내국인용), ‘고려’카드, 북한의 첫 슈퍼마켓인 ‘광복지구사업중심’의 계산대 모습. 북한 주민들은 현금 또는 현금카드로 결제할 수 있다. [자료사진 - 민족21]
다만 ‘나래’카드는 외화로만 ‘충전’이 가능하다. ‘나래’카드 사용설명서에는 “전자결제카드 ‘나래’는 외화봉사단위들에서 상품 및 봉사대금을 지불할 때 사용하는 전자지불수단으로서 모든 대금지불을 무현금결제의 방법으로 신속정확히 진행”할 수 있다며 “외화교환소에서 발행받으려는 손님(외국인 포함)으로부터 외화현금을 받고 당일 외화교환시세에 따라 환산한 우리 돈을 카드에 입금시켜 줍니다”라고 되어 있다. 내국인과 외국인이 모두 사용할 수 있으며 내국인에게는 빨간색, 외국인에게는 파란색의 카드가 발급된다.
카드를 발급 받을 때 사용자만이 알 수 있는 비밀번호 4자리를 입력하고, 비밀번호를 세 번 연속 틀리면 카드 결제가 자동으로 중지된다. 카드를 파손하거나 분실하면 신분 확인 후 재발급하는 등 국제사회의 카드 사용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평양에서 ‘나래’ 카드를 직접 사용해본 외국인들은 “물건값으로 100유로를 내면 거스름돈이 없어 오랫동안 기다렸지만, ‘나래’카드를 사용하면 훨씬 빨리 지불할 수 있어서 좋다”, “물품을 구입하기 위해 외국인으로서 일일이 환전해야 하는 불편함이 없어졌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특히 북한 당국은 지난해부터 외화뿐만 아니라 북한돈 전용 현금카드를 도입한 것으로 전해진다. 일단 국가은행에 돈을 저축하고, 그 금액만큼 상점 등에 가서 물건을 구입할 수 있는 일종의 ‘체크카드’다. 북한 주민들에게도 현금카드 사용을 권장하기 시작한 셈이다.
최근 북한이 현금카드 사용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신용카드 도입을 언급한 것은 전자결제시스템이 안정화되고 주민들이 카드 사용에 익숙해졌다고 판단한 결과로 보인다. ‘세계적 추세’가 강조되는 김정은시대에 들어와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신용카드 사용까지 적극 검토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북한은 지난 5월 “전자결제 방법의 적용은 시대의 요구이며 그 우월성은 이미 우리나라에서 크게 발휘되고 있다”며 “모든 상업기업소(백화점, 상점 등 유통업체)들에서는 결제의 전자화, 정보화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을 보다 힘있게 벌여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한은 카드사용 확대를 통해 주민들과 외국인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민간에 유통되는 외화를 재정으로 흡수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 당국은 민간영역에 40억 달러 상당의 외화가 잠겨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카드 사용을 권장해 외화와 현금 사용의 투명성을 높이려는 의도도 갖고 있다. 북한 당국이 고위 관리나 군인들에게 카드를 지급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목적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일부 보도에 따르면 북한은 지난해부터 인민군 장성들에게 일정액의 외화가 충전된 전자결제카드를 지급해 평양의 외화상점과 식당, 청진과 함흥 등 지방 휴게소에서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생활비 외에 군 산하의 무역회사를 통해 개별적으로 외화를 조달해 보관, 사용하는 것을 차단하고, 현금 사용의 투명성을 높이려는 것이다.
북한은 올해 초부터 외화를 취급하는 모든 개인과 기업소, 기관에 ‘내화 구좌’와 함께 ‘외화 구좌’를 별도로 개설해 거래토록 하고 실제 시장에서 통용되는 환율을 적용하고 있는데, 기업들이 대금을 자체적으로 보유하고 있다가 당국에 압수되거나 높은 시장환율로 불법적으로 환전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다. 과거 북한에서는 거래대금을 24시간 안에 은행에 예치하도록 했는데, 내화와 외화 계좌가 없는 경우에 자금을 보유하고 있다가 압수 당하는 경우가 있었다. 김정은시대에 들어와 이처럼 불필요한 사유로 규정을 위반하거나 개별적으로 자금을 보유하고 있는 현상을 없애려 내화와 외화 계좌를 모두 가질 수 있게 허용한 것이다.
사회 전반에 전자카드 도입 확대
또한 기업과 기관의 자금사용에서 전자결제비율을 높여 자금이 불법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차단하겠다는 의도다. 북한은 전자결제가 유동자금이 결제과정에 머무르는 시간을 대폭적으로 줄여 주며, 전자결제로 자금 회전 속도가 높아지면 상품 유통도 원활해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유동자금이 결제과정에 머무르는 시간’, 즉 자금이 개인과 기업소, 기관에 있는 시간에 발생할 수 있는 자금의 유용, 횡령 등을 전자결제 시스템의 상용화를 통해 방지하겠다는 정책의지가 내포돼 있는 것이다.
결국 북한이 ‘나래’, ‘고려’ 등 현금카드 사용을 확대하고, 신용카드까지 고려하고 있는 것은 ‘전자카드’가 일반화 된 세계적 추세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민간에 잠재돼 있는 외화를 흡수하고 기업과 기관의 자금 사용에서 투명성을 높이려는 다목적 포석이 깔려 있다.
▲ 김책공업종합대학 전자도서관 출입 전자카드. 북한은 2000년대 중반부터 경제, 사회분야에서 전자카드 도입을 확대하고 있다. [자료사진 - 민족21]
북한은 앞으로 현금.신용카드를 활용한 금융분야의 전자결제 외에 전자칩이 내장된 ‘전자 공민증(주민증)’ 도입 등 사회 전반에 전자카드 도입을 확대할 것으로 전망된다. 북한은 2000년대 중반부터 ‘RFID(Radio Frequency Identification)’ 기능을 활용해 인민대학습당, 김책공업종합대학 전자도서관 등의 출입증을 전자카드로 바꿨고, 남쪽과 기능이 유사한 교통카드도 발급해 사용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10월 7일 강윤일 평양정보기술국(구 평양정보쎈터) 카드연구소장도 <노동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세계적으로 전자카드가 전자현금카드, 지하철운임카드, 버스운임카드, 전화카드, 의료카드, 출입카드, 전자여권 등에 이용되고 있다고 소개한 후 북한에서도 전자카드 이용 분야를 확대하기 위한 사업이 활발하다고 주장하며 전자카드가 경제를 현대화, 정보화하는데 기여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북한은 2011년 5월 평양정보쎈터가 전자결제카드, 출입카드, 급양봉사카드, 도서관리용카드 등의 여러 가지 전자카드를 개발했다고 공개했다. 바야흐로 북한에서도 전자카드 활용이 점차 일반화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