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서방 언론으로는 처음으로 평양에 지국을 개설한 <AP통신>의 진 리(Jean Lee) 초대 평양지국장은 최근 국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최근 평양엔 슈퍼마켓 형태의 대형 상점들이 잇따라 생기고 있다. 이곳에서는 바코드가 붙은 상품이 판매된다. 생소하게 느낄지 모르지만 평양 주민들이 카트를 몰고 쇼핑하는 모습을 상상해 봐라. 북한에도 소비문화가 형성되고 있는 셈이다. 수입품 상점의 변화는 엄청나다. …수입품 상점은 평양뿐 아니라 지방의 주요 도시에도 들어서고 있다. 수입품 상점에서 구매 가능한 물품은 뭐든지 살 수 있다는 게 과거와 다른 점이다. 5년 전만 해도 북한에 들어가려면 거의 모든 물품을 사전에 외국에서 구입해 들어가야 했다. 현재 한국.미국.일본과의 교역은 일반 제품도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따라서 이런 물건들은 싱가포르.중국.베트남 등지에서 들여오는 것으로 판단된다.”

북한에 새로운 ‘소비문화’ 등장

▲ 북한의 첫 슈퍼마켓인 ‘광복거리상업중심’의 매장안내도. 2012년 1월 개장했을 때는 1층 안내판에 ‘알곡매장’이 있었으나 올해 들어 ‘희소곡종’ 매장으로 바뀌었다. [자료사진 - 민족21]
AP는 지난해 2월에도 1월 5일 문을 연 북한의 첫 슈퍼마켓인 ‘광복지구상업중심’의 사례를 소개하면서 최근 몇 년 사이 평양뿐 아니라 라선 등 국경지역에도 중국산 상품이 매일 사고 팔리며 새로운 소비문화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광복거리상업중심은 중국자본이 65%의 지분을 갖고 있으며, 세계 유명 제품들이 중국을 통해 공급된다. 매장에는 대체로 북한산 제품과 수입품이 4대 6의 비율로 진열돼 있고, 제품의 가격은 시장 가격보다는 싸게, 다른 국영상점 가격보다 높게 책정돼 판매된다. 광복거리상업중심은 개장이후 손님들로 항상 붐비고 있다고 한다.

AP 보도에 따르면 광복거리상업중심에서 팔리는 제품 대부분은 중국산이지만 땅콩버터로는 미국의 대표적인 브랜드 ‘스키피(Skippy)’ 제품과 스페인산 올리브오일, 스누피 등 북한 주민들이 과거에는 접해보지 못했던 미국과 유럽, 일본산 유명 제품들도 중국에서 수입돼 판매되고 있다.

실제로 최근 북한의 고가품 수입은 크게 늘었다. 국내 기관이 유엔안보리 결의 제1718호에 따라 우리 정부가 지정한 ‘대북 반출제한 사치품 목록’을 기준으로 보면 2008년 2억7천214만 달러, 2009년 3억2천253만 달러였던 것이 2010년에는 4억4천617만 달러, 2011년에는 5억8천482만 달러, 2012년에는 6억4천586만 달러로 늘어났다. 3년 동안에 2배로 늘어난 셈이다.

유엔은 2006년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1718호로 북한에 사치품을 수출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그 품목은 각 회원국에 위임했다. 우리나라도 이에 따라 2009년 사치품 품목 13개를 지정했다. 중국은 아직 사치품 품목을 지정하지 않고 있다.

지난해 수입이 크게 증가한 품목은 양주.와인 등 주류와 음료(3천11만달러), TV.컴퓨터 등 전자제품(3억710만 달러), 향수.화장품(631만 달러), 핸드백.가방 등 가죽제품(675만 달러), 모피의류(788만 달러), 고급시계(818만 달러) 등으로 나타났다.

이를 두고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소속 새누리당 윤상현 의원은 “이들 품목은 당과 고위간부 선물 및 연회용이거나 평양 부유층을 위해 백화점.외화상점 판매용”이라며 “북한 주민들은 만성적인 식량부족을 겪고 있는데 체제보위 핵심계층의 충성심을 유도하기 위해 각종 수입 사치품이 평양을 중심으로 뿌려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몇 년 전부터 계속 북한의 ‘사치품 수입액’을 공개하며 똑같은 주장을 폈고, 그때마다 국내외 언론은 이 같은 주장을 그대로 인용해 김정은 제1위원장의 ‘선물정치’를 위해 사치품 수입이 늘고 있다고 보도했다.

전문상점, 슈퍼마켓 등장이후 고가품 수입 급증

그러나 이같은 정치적 해석은 최근 북한사회의 변화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고가품 수입의 증가는 해외방문객을 통해 개별적으로 이뤄지던 고가품 구매가 국가유통망으로 흡수되고, 슈퍼마켓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유통망이 등장하면서 북한 내 수요가 증가됐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북한 경제상황의 호전과 경제정책 변화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평양에는 광복거리상업중심이 문을 연 후 이를 ‘본보기’(모델)로 청전거리의 해맞이슈퍼마켓, 동평양의 ‘해당화관슈퍼마켓’등이 들어섰고, 통일거리슈퍼마켓, 만수대지하상점 등이 건설 중에 있다. 평양의 각 구역(남쪽의 區에 해당)에 최소한 1개 이상의 슈퍼마켓이나 전문상점을 갖추고, 지방의 각 주요 도시에도 이를 건설한다는 게 북한 당국의 의도다. 김정은시대의 정책구호인 ‘세계적 추세’에 맞게 상업유통망을 재정비하려는 것이다.

물론 그 이면에는 국가가 인정한 전국 300여 개의 ‘종합시장’외에 존재하는 ‘비공식 시장’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비대화된 ‘시장영역’을 전반적으로 축소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또한 민간에 유통되거나 장롱 속에 잠겨 있는 20억~40억달러로 추정되는 외화를 국가 재정으로 흡수하려는 의도도 있을 것이다.

주민들 입장에서 보면 과거 평양제1백화점, 낙원백화점 등에서 제한적으로 구매할 수 있었던 물품들을 지방에도 슈퍼마켓이 들어설 경우 전국 어디서나 구매할 수 있게 된다. 돈이 있어도 제품이 없어 구매할 수 없어 해외출장 가는 사람에게 부탁하는 현상이 없어지게 되는 셈이다. 실제로 이 같은 현상은 ‘종합시장’이 활성화되면서 줄기 시작했고, 슈퍼마켓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 크게 축소될 것으로 보인다.

▲ 평양 양각도호텔 1층에 있는 스위스시계 매장의 모습. [자료사진 - 민족21]

이른바 ‘사치품’의 수입증가는 외국회사의 진출 확대와 평양 주재 외국인의 증가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북한은 스위스 시계 수입업체와 합작으로 평양 양각도호텔과 고려호텔 부근에 스위스 시계판매점을 운영하고 있다. 당연히 시계수입이 늘 수밖에 없다. 평양에는 외국인 전용 편의시설이 들어섰고, 외국대사관과 상업 대표부들이 밀집해 있는 평양시 대동강구역 문수동에 24시간 편의점도 문을 열었다.

양주.와인 등 주류의 수입증가도 경제적으로 해석하면 내부의 주류 판매량이 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북한을 찾는 관광객의 증가와 밀접하게 연관이 돼 있다. 중국측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북한을 다녀간 중국인 관광객은 2011년에 비해 22.5% 증가한 23만7천4백명에 달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북한 방문 중국인 관광객이 3배 가량 증가한 셈이다.

또한 북한의 ‘사치품’ 수입목록에는 평면TV, 디지털 카메라, 컴퓨터 등 전자제품이 포함돼 있는데, 이들 제품을 일괄적으로 사치품으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평면TV는 최근에야 보급되기 시작했지만 디지털 카메라, 컴퓨터 등은 북한에서도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으로 자라잡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 몇 년 사이에 북한에서는 자체 조립생산된 태블릿PC, 스마트폰, PDA 등을 판매, 보급하고 있다.

정치적 요소도 있겠지만 슈퍼마켓의 확산, 해외주재원과 해외관광객의 증가, 그리고 내수 증가 등이 자연스럽게 수입품의 증가로 이어졌다고 보는 게 타당한 것이다. 슈퍼마켓의 등장에 대해 AP 등 국내외 대다수 언론들은 “북한 경제가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부각시키고 새 지도자 김정은 제1위원장의 이미지를 강화하기 위한 선전활동의 일환”이라고 해석하지만 김정은시대에 들어와 슈퍼마켓과 전문상점은 기존의 국영상점망 및 ‘종합시장’과 경쟁하는 제3의 유통망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따라서 북한의 고가품 수입증가 현상은 굳이 정치적 요소가 아닌 경제적 요인으로 해석해도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다.

일부에서는 수입품을 구매할 정도의 경제력을 지닌 ‘신흥 자본계층’이 북한 내부에서 부상하고 있는 증거라고 평가한다.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는 “중국에서 들어오는 소비재에 대한 수요는 정치적 상류층에만 국한돼 있지 않다”며 “북한 인구의 1%에 해당되는 24만명이 구매력을 갖춘 계층을 형성하면서 고가품에 대한 수요도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것도 이제는 옛이야기가 됐다. 단적으로 현재 북한에는 600~700달러(이것을 광복거리상업중심에서 우대환율로 환전하면 북한 돈 500만원에 해당한다)를 주고 최신 스마트폰을 사는 10만명 이상의 수요층이 존재하고 있고, 300달러 3G휴대폰을 구매해 사용하는 층이 200만명을 넘었다. 북한 전체 인구의 10%에 근접하는 수치다. 특히 지난 1년 동안 판매된 휴대폰만 100만대가 넘었다.

이것을 ‘고가품 구입=특권층’이라는 과거의 시각으로 본다면 북한의 ‘특권층’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는 결론 외에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소득 격차 확대가 소비수준의 차이로 나타나

▲ ‘광복거리상업중심’에 쇼핑 나온 평양 시민이 3층에 마련돼 있는 ‘어린이놀이장’에서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다. [자료사진 - 민족21]
<AP통신>의 진 리(이준희) 초대 평양지국장이 말한 것처럼 해당화관이나 해맞이식당에 있는 고급 슈퍼마켓에서 쇼핑을 할 수 있는 북한 주민은 아직 극소수다. 그러나 북한의 구상대로 평양의 각 구역마다 슈퍼마켓이 들어서고, 지방의 주요 도시에도 슈퍼마켓이나 전문상점들이 완비되면 사정은 달라질 것이다.

또한 슈퍼마켓이나 전문상점이 늘면서 그 형태도 고급 슈퍼마켓과 일반 슈퍼마켓으로 분화가 이뤄질 것이다. 평소에는 구역에 있는 국영상점이나 시장, 혹은 앞으로 들어설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사고, 특별한 날이나 고급제품이 필요할 때 백화점이나 고급 슈퍼마켓에 가서 쇼핑하는 소비문화가 자리잡게 되는 셈이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겠지만 북한도 수입대체 상품이 생산되고, 첨단 전자제품을 생산할 수 있게 될 때까지는 수입품 증가가 필연적인 현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아직까지 전반적으로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고가품 외에 북한 주민들의 필수 생활용품 수입도 크게 증가하고 있다. 다만 최근 늘고 있는 수산물, 육류, 채소 등을 취급하는 전문상점에서 자체 생산물 중심으로 판매하고, 슈퍼마켓에서 북한산 제품 비중이 조금씩 높아지고 있는 것은 북한의 농업, 경공업이 일정 정도 활성화되고 있다는 신호로 보인다.

물론 전문상점과 슈퍼마켓이라는 새로운 상업유통망의 등장은 과도기적으로 구매력이 있는 층과 그렇지 못한 층 사이의 차이를 확대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소득의 차이가 소비수준의 차이로 이어지는 셈이다.

‘번 만큼 분배’, 즉 기업이나 협동농장들이 ‘수익을 낸 만큼’ 자율적으로 임금을 결정하는 방향으로 경제구조가 바뀌고 있는 상황에서 일정한 소득격차의 발생은 불가피하다. 실제로 2002년 사회주의경제관리개선 조치(7.1조치)가 실시될 때 북한 당국은 생활비(임금)를 업종별로 인상폭을 다르게 책정해 최대 7배 정도의 차이를 두었는데, 독립채산제가 확대 실시하고 수익에 따른 분배가 이뤄지면서 그 차이는 더욱 벌어진 것으로 보인다. 북한 경제가 전반적으로 활성화돼 업종별, 지역별로 기업과 협동농장의 수익차이가 해소돼야 해결이 가능한 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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