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선비들이 거처했던 방을 사랑방(舍廊房)이라고 한다. 요즘 말로 하면 남자들의 서재와 같은 곳이다.
선비들은 사랑방에서 공부를 하고 쉬기도 했다.
이런 사랑방을 장식했던 물건에는 서병(書屛)이나 서예 족자가 가장 많았을 것이다. 그 외에도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그린 사군자 그림이 한두 점 정도는 걸렸다.
조금 부유한 양반집 사랑방에는 학문을 사랑하고 권장하는 ‘책가도’나 출세를 바라는 ‘등용문 그림’, 아침 해와 매, 바다 위의 바위를 그려 선비의 지조나 절개를 상징하는 ‘욱일취도(旭日鷲圖)’, ‘해응영일도(海應逸日圖)’ 따위가 걸렸다.
이런 그림을 장식하는 것은 모두 선비 자신의 사상이나 가치를 드러내는 적극적인 행위이다.
선비의 사랑방에 걸리는 그림과 부인의 안방에 걸리는 그림은 달랐다.
여성들의 공간인 안방에는 주로 ‘화조도, 초충도, 꽃그림, 나비그림, 봉황그림’ 따위를 걸었다.
그림의 내용은 주로 ‘자연의 조화, 자연의 이치, 자연의 질서, 평안함’이었다.

<매화와 참새>라는 그림은 새와 매화가 그려진 화조도이다.
화조도는 주로 여성들의 공간인 안방에 걸었던 그림이다. 하지만 매화와 참새가 그려진 이 그림은 안방보다 남자들의 사랑방에 어울리는 그림이다.
화병에 다양한 꽃을 그린 ‘사계절 꽃그림’이 안방보다는 선비들의 사랑방을 장식했던 것과 비슷하다.
겉으로 보면 ‘화조도’처럼 보이지만 안으로는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 화조도에서는 새를 암수 쌍으로 그린다. 암수 쌍의 새는 ‘음양의 조화, 자연의 이치’ 따위를 드러내는 장치이다.
하지만 한 마리만 그려진 새는 선비의 분신으로 해석한다.
‘욱일취도, 해응영일도’에 나오는 한 마리의 매나 독수리는 모두 선비의 은유이다.

우측-김홍도/매작도(梅鵲圖)/화첩, 종이에 담채/26.6*31.4/간송미술관 소장.
매화와 까치 그림은 매화와 참새그림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까치(鵲)의 한자음과 참새(雀)의 한자음이 ‘작’으로 같기 때문이다.
다만 참새를 그리지 않고 까치를 많이 그린 것은 조형적 문제 때문으로 추정한다. 참새는 크기가 작아서 불필요한 공간이 많이 생긴다. 하지만 까치는 참새보다 크고 흰색과 검정색의 몸통 때문에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는데 유리하다. [자료사진 - 심규섭]
매화는 선비들이 좋아했던 꽃이다. 선비들은 화려한 궁중모란도보다 매화를 훨씬 더 사랑했다.
매화는 선비의 절개와 지조를 상징하는 꽃이다. 추위가 남아있는 초봄에 피는 꽃의 생태적 특징을 차용했다. 그러니까 추위와 찬바람은 어려운 환경을 뜻하고, 그 속에서 피는 꽃은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고 뜻을 이루는 것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선비가 절개와 지조를 통해 지키고자 하는 가치는 뭘까?
조선시대 여성들이 지켜야 하는 ‘지조와 절개’는 대부분 ‘가문과 가족, 부부’에 대한 믿음이었다. 남편을 잃은 과부가 다른 남자와 재혼을 하지 않고 가문과 집안을 지키면 ‘열녀문(烈女門)’을 세워서 공덕을 치하한다.
선비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신념은 조선시대의 핵심 사상인 ‘엄격한 예법과 자발적 청빈’이다.
예(禮)에 어긋나는 행동은 곧 도리(道理)를 벗어나는 일이다. 왕이라 할지라도 예(禮)를 벗어나면 목숨을 걸고 반대했다. 또한 ‘자발적 청빈’은 선비의 인격을 수양하고 관리가 되어 정치를 행하는데 필요한 덕목이었다.
다시 말해 ‘엄격한 예법과 자발적 청빈’은 사회질서를 만들고 정치를 하는 행동지침이자 선비의 존재를 규정하는 개념이었다.
참새를 한자로 쓰면 작(雀)이 된다. 작(雀)을 중국식 발음으로 읽으면 희(喜)가 되는데 이것은 ‘기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참새의 생태적 특징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한자를 사용하던 선비들의 ‘문자유희’에 다름 아니다. 우리 그림에서 동식물에 부여된 상징은 생태적 특징보다는 문자의 대치, 발음의 연관성을 이용한 것이 대부분이다.
매화의 상징과 참새의 독음을 이용한 상징을 결합하면,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신념을 지키는 일은 내면의 기쁨이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신념의 상징으로 사회에 나아가 사회적 가치(공동체의 가치)를 구현하고자 하는 선비의 비장한 마음 자세를 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그림에서 뜻하는 ‘기쁨’은 즐거움이나 웃음이 아니다.
‘존재의 만족, 가치의 만족’을 말한다.
청춘이 아름다운 것은 그 시절이 편하고 행복해서가 아니라 무한한 미래의 가능성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독립투사가 어려움과 고통을 겪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하지만 독립운동을 통해 꿈꾸는 미래가 있기 때문에 고통을 기꺼이 수용하여 내면의 즐거움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자학이나 고통을 즐기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선비들이 추구해야 할 가치나 이상은 명쾌했으며, 어려움을 이겨내고 이상에 대한 신념을 지키는 것은 모두 사회의 가치를 구현하기 위함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