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생도는 삼국시대부터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니까 장생도는 삼국시대,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를 관통하면서 발전하여 우리 민족의 정서에 맞는 ‘십장생도’로 완성되었다는 말이다.
‘궁중모란도’도 마찬가지이다. 숱한 모란 그림이 있지만 궁중에서 대를 이어 그려진 ‘궁중모란도’가 최종 완성본이다. 모란그림도 신라 진평왕 때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으니 장생도와 함께 대략 1500년 정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장생도는 중국이나 일본에도 있는 그림이다.
우리 민족의 장생도는 ‘십장생도(十長生圖)’라고 부른다.
여기서 십(十)은 열 가지라는 말이 아니라 완성되었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백동자도(百童子圖), 백수백복도(百壽百福圖)’에 나오는 백(百)이 100명의 어린아이, 수복이란 글자가 100개라는 뜻이 아니라 ‘아주 많음’을 뜻하는 것과 비슷하다.
실제 ‘십장생도’에 나오는 장생의 요소는 대략 13개 정도인데 필요에 따라 적절히 사용해 그림을 그린다.
‘십장생도’는 완성이 되었기 때문에 일반 장생도보다 영역이 넓고 뜻이 깊다.
‘십장생도’에서 파생되거나 변주된 그림에는 ‘해학반도도’, ‘해반도도’, ‘일월오봉도’, ‘일월부상도’, ‘서수낙원도’ 따위가 있다.
장생도의 일부만 따로 떼 내어 독립시킨 그림에는 ‘송학도, 백학도, 백록도’ 따위가 있는데 세화를 제외한 대부분의 민화는 장생도의 요소에서 나왔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장생도에 나오는 학, 거북, 사슴 따위는 현실 동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영험한 기운을 뿜고 있는 거북, 금색과 청색의 날개를 가진 학, 화려한 뿔과 다양한 색으로 표현된 사슴은 실제 동물과 비슷하게 그렸지만 모두 신령한 능력을 가진 상상의 동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장생도를 배경으로 상상의 동물인 용, 해태, 기린 따위와 장생도를 결합한 그림이 창작될 수 있었다.
하늘을 나는 학은 주작이나 봉황의 분신이고, 바다에서 헤엄치는 거북은 용과 현무의 현실적 모습이며, 육지에서 뛰어다니는 사슴은 해태나 기린의 다른 모습이다. 결국 하늘과 바다와 땅을 대표하는 생물인 셈이다.

▲ 심규섭/봉황도/디지털회화/아크릴도구/2013. [자료사진 - 심규섭]

장생도의 일부 요소를 배경으로 봉황그림을 구상해 보았다. 일종의 장생도 변주 그림이다.
바다와 구름, 바위, 복숭아나무는 모두 십장생도의 요소이다.
모란은 조선 말기에 추가된 것으로 추정한다.
장생도의 여러 요소 중에서 바위와 바다, 하늘, 구름 따위는 배경으로 사용했다. 화면을 조형적으로 구성하기 위해 특별히 복숭아나무와 모란을 선택했다.
복숭아나무는 나무와 이파리, 열매와 꽃이 한꺼번에 결합되어 있다. 그래서 소나무보다는 조형적으로 다양한 색상과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 또한 모란을 선택한 것은 꽃이 가지는 화려함과 장식성 때문이다.
이런 조형적 선택과 장치를 통해 육지는 아름답고 풍성하게 표현된다.
이렇게 아름답고 풍성하게 표현하고자 한 이유는 바로 이 그림의 주인공인 봉황 때문이다.
봉황은 상상의 새이다. 또한 봉황이 가지고 있는 상징은 ‘태평성대’이다.
장생도의 뜻이 ‘생명력이 풍부한 이상세계’라고 한다면, 봉황의 상징인 ‘태평성대’는 일반백성들의 현실 정치적 요구이다.
‘태평성대’라는 추상개념을 현실적인 사물로 표현하기는 불가능하다. 복숭아나무나 모란꽃이 태평성대의 상징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이 가진 생태적 요소가 주는 아름답고 풍성한 느낌에 기대어 표현한 것이다.

민화에서 표현되는 대부분의 봉황그림은 오동나무, 죽순, 바위를 배경으로 봉과 황, 즉 암수 두 마리를 그린다.
그 뜻이 ‘태평성대’이기는 하나 봉황의 모습만 중심으로 그려 내용적, 형식적 풍부함이 떨어진다.
또한 민화나 수묵화 같은 우리그림은 배경이 여백으로 처리하거나 생략된 경우가 많다. 앞부분부터 먼 뒷부분까지 제대로 그려진 그림은 장생도 밖에 없다.
새로운 그림을 구상할 때, 혹은 그림의 배경을 만들어 낼 때는 거의 장생도의 요소를 차용한다.    
장생도의 공간에 봉황이 결합하면서 그림의 서사성이 만들어지고 다양한 표현의 변주가 가능할 것이라 판단한다.

▲ 봉황도/오일영/창덕궁 소재/비단에 채색/1920. [자료사진 - 심규섭]

이 그림은 장생도를 변주한 것이다. 장생도에 수묵화의 조형기법인 여백과 필선, 준법 따위를 결합시켜 독특한 작품세계를 창조했다.
또한 그림 속에는 궁중회화의 요소뿐만 아니라 민화의 요소인 오동나무와 부귀영화를 뜻하는 모란과 원추리도 함께 들어가 있다. 그러니까 궁중회화, 수묵화, 민화의 요소가 엉켜있다는 말이다. 미술적 관점으로 본다면 높이 평가할만한 조형실험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일제 식민지 시절의 혼란스런 상황이 작품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장생도와 결합한 봉황도의 원조는 창덕궁 재건벽화에서 오일영이 그린 ‘봉황도’이다.
창덕궁 ‘봉황도’는 해와 바위와 바다, 대나무, 영지, 구름과 같은 장생도의 요소와 오동나무, 원추리, 모란이라는 민화적 요소를 배경으로 10마리의 봉황을 그렸다.
이 작품은 봉황도와 화조도, 모란도, 해학반도도의 요소를 적절히 차용하고 결합했다. 또한 채색화에서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여백과 필선을 추가했다. 이는 수묵화의 요소가 궁중회화에 녹아들었다고 볼 수 있다.
 
조형적 특징은 10마리의 봉황을 화면에 가득 채워서, 상대적으로 봉황이 두드러지며 크게 강조했다.
또한 바다로부터 육지로 봉황이 날라드는 상황이 연출되어 있다.
창덕궁 '봉황도'의 제작연도는 1920년이다. 즉 조선이 일제에 의해 합병되는 1910년도와 조선민중의 각성이 일어나는 1919년 3.1만세운동이라는 정치적 격변기에 그려졌다.
이 봉황도의 배경의 흐름은 짝을 이루는 '백학도'와 마찬가지로 바다에서 육지로 들어온다. 또한 육지에 앉아있는 봉황은 부귀영화를 뜻하는 모란꽃과 원추리가 그려진 배경에 편안하게 쉬는 모습이다.
조금 억지는 있지만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분석해 본다면,
태양이 솟는 바다는 일본을 뜻하고 육지는 식민지 조선을 의미한다면 ‘일본으로 부터 날라 온 봉황이 태평성대와 부귀영화를 가져다준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결국 봉황은 일본제국주의의상징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런 해석은 미술 조형적 기준이 아니라 철저하게 정치적 판단이다.
창덕궁은 일제 식민지배의 정치적 모순이 집약된 공간이기 때문에, 정치와 무관한 창작행위는 불가능하다.
창덕궁에 있었던 순종은 그야말로 조선백성의 눈을 속이기 위한 껍데기에 지나지 않았다. 어떤 정치적인 권력이나 능력도 없었다는 말이다.
원래 일본인 화가에 의해 그려질 창덕궁 벽화를 순종의 강력한 주장에 의해 우리 화가들로 대체되었다고는 하지만 조선총독부의 검열이 없이 그림이 구상되고 창작되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어쨌든 창덕궁 재건벽화 6점을 구매하기 위해 지불한 비용이 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30억 이었다. 그림 한 점당 5억 원이다. 
그림을 제작하기 위한 비용이 순종의 개인 주머니에서 나왔을 리도 없고 독립운동가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결국 일제에 복무하는 정치인이나 재력가에 의해 자금이 마련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 봉황도는 창덕궁의 ‘봉황도’에서 영감을 얻었다.
바다에서 육지로 날아오는 봉황이 아니라 육지에서 바다로 뻗어나가는 봉황을 그리고 싶었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한 습작, 혹은 예비그림이라고 보는 좋을 것이다.
 
우리민족이 남북통일을 이루어 평화와 상생과 공영이라는 ‘태평성대’의 세상,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모든 생명이 저마다의 존재를 아낌없이 드러내는 이상세계가 펼쳐지길 바란다. 
더불어 그 가치를 세계만방에 펼쳐나가는 미래를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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