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는 그림을 전문적으로 배우고 익히며 화단을 만들어 창작활동을 했던 화가들이 있었다. 이들은 단순히 생계만을 위해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그림을 그려 판매하거나 그림을 가르치는 일이 주요한 생업이긴 했지만 생계를 넘어 그림을 통해 꿈과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화가들은 궁중화원이 되어 조선팔도에 이름을 떨치기를 원했다. 또한 깊은 유교적 철학이 담기면서도 격조 높은 작품을 창작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선비는 조선을 떠받치는 핵심세력이었다.
이들은 ‘엄격한 예법과 자발적 청빈’이라는 철학을 ‘지조와 기개’로 삶속에 녹여 실천하고 행동했다. 이들은 관직에 진출해 양반이라는 계층을 형성하여 국가를 이끌었다. 선비는 왕과 함께 조선시대를 통치한 핵심 세력이다.
조선시대 화가의 태생적 신분은 선비나 농민과 같은 양민에 속했고, 사회적 신분은 중인계층에 속했다. 중인은 일반적으로 실무를 담당하는 하급공무원을 말한다. 중인은 관직의 서열은 낮았지만 의학, 통역, 회계, 기술, 그림과 같은 전문직에 종사했기 때문에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했다.
선비 중에서 그림에 소질을 보여 학문과 그림을 동시에 병행한 사람을 ‘선비화가’라고 한다.
또한 양반가문 출신의 화가를 ‘양반화가’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선비출신이든 양반 가문출신이든 중인 출신이든 상관없이 모두 ‘화단’이라는 공간에서 창작활동을 했다.
조선시대 화가들의 미술재료는 먹과 붓과 종이였다.
먹과 ‘묵(墨)’은 같은 말이다.
먹과 종이를 이용해 그리는 그림을 흔히 수묵화, 수묵담채화라고 부른다.
아무튼 선비들이 진채물감을 사용하지 않고 먹에 물을 타서 그리는 수묵화나 물감을 엷게 칠하는 수묵담채화를 선호하고 발전시켰던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먹과 붓과 종이는 글쓰기 도구와 같다.
글쓰기의 재료가 그림의 재료가 되는 현상은 특별나지 않다. 서구에서는 글쓰기 재료인 연필, 잉크를 사용하는 펜이 연필화, 펜화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다.
글쓰기 도구가 미술도구로 발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익숙함과 편리함 때문이다.
글쓰기를 통해 먹과 붓을 다루는 방법을 익힌 사람들은 같은 도구를 가지고 그림을 그리는데 이질감이나 불편함을 크게 느끼지 않는다.
미술은 원래 도구의 예술이다.
그림도구가 없이는 미술작품을 창작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림그리기에서 미술재료가 차지하는 비율을 절반이 훌쩍 넘는다. 다시 말해 유화물감을 사용할 수 있는 방법만 배워도 그럴싸한 유화작품을 창작할 수 있다는 말이다. 기법과 같은 표현방법은 미술재료를 사용하는 방법과 다르지 않다. 물론 같은 미술도구를 사용해도 작가의 능력에 따라 작품의 수준은 천차만별이다.
또한 글쓰기 도구가 미술도구로 전환할 때 편리함이 있다.
글쓰기를 위한 문방구는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기 때문에 가격이 저렴하고 구하기가 쉽다. 수준이나 가격대에 따라 다양한 물건들이 시장에 나온다.
글쓰기 도구의 발전이 곧 미술도구의 발전과 직결되는 것이다.
선비들의 ‘문인화’는 먹과 붓, 종이를 사용해 그린 그림이다.
선비들이 내면의 수양을 위해 ‘문인화’를 그렸다면 화가들은 선비들과 똑같은 도구를 사용해 그림을 그렸다. 이것은 화가들의 수묵화가 선비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는 바탕이 되었고 동질감을 갖게 하는 역할을 했다.

둘째, 수묵화는 선비사상이 반영되어 있다.
조선의 학문의 나라이다. ‘주자성리학’이라고 하는 학문을 지배이념으로 삼아 발전했다.
조선시대 선비는 요즘으로 치자면 ‘지식인’이다.
학문과 정치는 동전의 양면과 같았다. 학문을 한다는 것은 곧 정치를 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말이다. 학문의 깊이가 있는 사람이 정치를 잘한다고 여겼다.
‘주자성리학’은 여러 유학 중에서도 ‘엄격한 예법’을 강조한다. 예법은 사람을 규정하고 존중하는 방법이자 사회적 관계의 형성하는 원리이다.
또한 중국과 다르게 조선의 선비들은 ‘청렴과 청빈, 염치’라는 행동지침을 가지고 있었다.
선비들이 관료로 진출해 자신들의 사상을 세상에 펼쳐나갈 때 가장 중요한 덕목이 바로 ‘청렴, 염치’이다. 궁궐의 정문에는 청렴하지 않고 부패한 관리를 잡아먹는다는 해태 조각물을 세웠고 전국의 관청에는 ‘청렴’을 상징하는 은행나무를 빠짐없이 심었다.
조선이 500년이 넘는 세월동안 종묘사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선비들이 부패하지 않고 사리사욕을 채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비들은 일상생활 속에서도 화려한 옷이나 기름진 음식을 멀리했고 거만함이나 허영심, 사치를 경계했다.
이런 선비들의 사상은 화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선비들은 권력과 재부를 가진 조선의 지배층이었기 때문이다.
화가들은 선비들의 영향을 받아 그림에 채색을 넣지 않았다. 색은 화려함이고 허영심과 사치의 상징이었고 허영과 사치는 곧 학문의 부패, 정치의 부패로 여겼기 때문이다. 화려한 색은 오직 궁궐에서만 용납되었다.
진채그림인 ‘책가도’가 궁궐뿐만 아니라 양반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던 것은 학문의 권장과 학문에 대한 사랑과 찬양이라는 내용이 담긴 것이기도 하지만 조형적으로 본다면 무채색의 그림이란 측면도 작용했다. 즉, 수묵화와 느낌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궁중회화 중에서 가장 화려하며 가장 많이 그려져서 일반 백성들의 삶속까지 파고든 ‘궁중모란도’은 정작 선비들에는 철저하게 배척되었다. 진채로 그린 모란그림은 부귀영화를 뜻했기 때문이다. 부귀영화는 선비들의 ‘청렴, 자발적 청비’과 대치된다. 화려한 색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허영과 사치를 상징한다.
그림도 외형적 화려함이나 정교한 묘사보다는 그 속에 담긴 뜻에 더 많은 비중을 두었다.
묘사능력이 뛰어나고 물감을 잘 썼던 오원 장승업도 선비들 사이에서 ‘천기(賤伎)’를 가졌다고 비난을 받았다.
‘천기(賤伎)’는 그야말로 ‘천박한 재주, 기교’를 뜻한다.

셋째, 흑백의 먹은 색깔과 맞지 않았다.
수묵화는 ‘준법과 여백, 농담’을 주요 기법으로 사용한다.
준법(皴法)은 붓을 이용해 사물의 질감이나 입체감을 내는 방법이고 농담은 먹의 많고 적음을 통해 강약, 가벼움과 무거움 따위를 표현하는 방법이다.
수묵화에서 여백은 흑백이라는 미술도구의 한계 때문에 생긴 것이다.
검은 색을 내는 먹으로 화면을 빽빽하게 그리면 그림은 그야말로 시커멓게 된다. 시커먼 그림은 보기가 싫고 미술적 가치가 현격하게 떨어진다. 그림이 시커멓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먹을 최소한으로 사용해야 한다. 그래서 수묵산수화에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안개나 하늘이 많이 등장한다. 수묵화에서 안개의 표현은 아무것도 그리지 않고 그냥 비워놓는 것이다.
빈 공간, 즉 여백을 적절하게 남기면서 형상을 표현한다. 먹을 사용하면서 먹을 최대한 절제해야 좋은 그림이 된다. 그래서 여백은 수묵화의 구도를 만들고 화면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로 자리 잡았다.
수묵화의 담백한 느낌은 바로 여백에 나오는 것이다.
수묵화의 담백한 느낌 , 먹의 절제는 선비들의 ‘자발적 청빈, 청렴, 염치’ 따위의 사상과 미학적으로 연결된다.
수묵화에 엷은 색깔을 사용하여 그린 것을 수묵담채화라고 한다. ‘담채’라는 말 자체가 ‘엷은 채색’을 뜻한다.
이렇게 수묵화에 엷은 채색을 하는 것은 흑백의 먹이 짙은 채색과 조형적으로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채색화에서 빈 공간, 즉 여백의 표현은 불가능하다. 수묵화에서 안개나 하늘의 표현은 그냥 비워두면 되지만 채색화에서는 흰색이나 파란색 따위로 칠해야 한다. 채색화에서 여백은 아무것도 칠하지 않은 면이 되고 그림의 미완성으로 이어진다.
채색화에서 형태를 이루는 선묘도 대부분 먹이 아니라 어둡거나 밝은 색으로 칠한다.
여백이 있고 검은 색의 먹으로 사물을 그린 화면에 진한 색을 칠하면 강하게 튄다. 색깔이 사물의 형태나 여백을 압도해 버리는 것이다.
색을 칠할 필요가 있을 때는 화면을 압도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스며들도록 표현하는 방법은 색을 사용하되 색의 채도를 최대한 낮추는 것이다. 색의 채도를 낮추는 방법은 색에 흰색이나 검정색을 섞는 것이다. 수성물감으로 채도를 낮추기 위해서는 물로 희석시키는 방법과 먹과 물감을 섞는 방법이 있다. 수묵화에서 물은 먹을 녹이는 역할도 하지만 흰색의 역할도 한다. 물을 많이 섞을수록 먹은 엷어지면서 동시에 밝아진다.
먹을 이용한 선묘와 여백이 많은 그림과 충돌하지 않으면서 색을 사용하는 방법은 흑백을 수용한 색, 즉 채도를 최대한 낮추는 것이다.
화가들의 수묵화, 수묵담채화는 조선시대 지배층인 선비들의 철학을 담은 그림형식이다.
그림을 통해 학문을 논하고, 그림을 감정하고 평가하는 기준도 학문적 가치였다.
유럽의 추상 화가들이 재현기술과 내용을 버리고 조형성 자체에만 집착한 것과 달리 수묵화는 철저히 철학적 내용을 중시했다.
이렇게 엄격한 철학을 바탕으로 창작되었던 수묵화도 시대의 흐름을 거역하지는 못했다.
거대하게 폭발하는 대중의 욕망을 담은 민화와의 결합을 시도한다.
조선 말기 민화가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화가들이 궁중회화나 수묵화가 가진 내용적 조형적 가치를 대중의 요구에 맞게 녹여내어 주었기 때문이다.

